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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메일 (102)화 (102/144)

“옳은 말씀이십니다.”

놀라느라 입에 침 바를 정신도 없는 메일 대신 로즈가 호응을 맡았다. 메일은 복잡한 눈으로 제가 반려한 색동 프릴 드레스를 쳐다보았다가 그보다 더 복잡한 시선으로 리엘라를 응시했다. 안목…… 아니, 그건 둘째 치고. 그보다 이거 뭔가.

“공주님.”

“왜?”

“반테르 경 말이에요, 어떤 사람 같으세요?”

리엘라의 완벽함을 점검하던 로즈가 장갑의 레이스에서 흠을 발견했다. 짝짝이였다. 로즈의 강경한 주장하에 장갑을 다른 것으로 갈아 끼며 리엘라가 답했다.

“기사.”

“……다른 건요? 좀 더 공주님의 감상이 들어간.”

“강한 기사?”

메일의 표정이 허탈하게 풀어졌다. 착각이었나? 리엘라는 그야말로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상대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거나 하는 상태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그냥 기분이 좋아서 선심 쓰신 건가?’

답지 않게 반테르의 조언을 무시하지 않은 건 그냥 그 정도 의미였을지 모른다. 메일은 괜한 상상을 한 것 같아 금세 머쓱해졌다. 무슨 의의를 부여하려고 했던 거람. 제가 누굴 좋아하고 있으니 공연히 너도나도 사랑을 할 것 같은가 보지.

메일이 남몰래 민망해하고 로즈가 새 장갑을 낀 리엘라를 익숙하게 찬사하는 사이, 창밖으로 석양이 졌다. 쏟아지는 빛이 제법 선연하게 붉다. 기다리던 전조에 리엘라가 눈에 띄게 기뻐했다.

“이제 나가?”

안 나간다고 하면 혼자서라도 손수 문고리를 잡고 돌릴 기세다. 로즈가 바람처럼 움직여-그녀의 힘과 스피드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문을 열고 출발을 알렸다. 세 사람이 바깥으로 나서자 문을 지키고 있던 맥이 움직였다.

“어디 가십니까?”

“잠깐 산책을 다녀오려고 해요.”

“경호하겠습니다.”

일행은 넷이 되었다. 호위를 위해 따라붙은 맥은 경호 대상이 별궁 밖으로 나갈 기미를 보이자 목적지를 물었다. 메일은 행선지 없는 산책일 거라 생각했으나 의외로 리엘라에게선 답이 나왔다.

“어제 갔던 곳.”

“어, 거길 다시 가시려던 거였어요?”

“예뻐서.”

리엘라가 어제 방문했던 곳은 본궁 뒤편의 정원이다. 정원이 칭찬을 받았다는 사실에 자기가 더 뿌듯해하던 메일은 곧 영문 모를 맥을 위해 어디라고 부연해 주었다. 맥은 장소를 듣고는 위치를 바꿔 앞장섰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길치 둘과 길치는 아니지만 목적지에 초행인 한 명은 호위 겸 안내자를 따라 수월히 원하던 곳에 도착했다. 해는 아직 완전히 저물지 않았으나 조금만 기다리면 서산으로 넘어갈 듯 보였다. 리엘라가 눈을 반짝이며 빛냈다.

“어제 여기 왔어!”

“그러셨죠.”

“어두워지면 더 예쁜 거 알아?”

메일은 어젯밤 만월이 떴던 것을 기억했다. 그때 저는 테라스에 있었지만 정원에서 보았다면 훨씬 정취가 좋았을 것이다. 오늘도 달이 밝아야 할 텐데. 메일은 폴짝거리는 리엘라를 따라가며 피식 웃었다.

“공주님, 넘어져요.”

“괜찮아. 로즈가 잡아주니까.”

안 넘어진다고는 장담하지 않는 것이 본인을 제법 잘 안다 싶었다. 앞서가는 리엘라와 그 옆을 바짝 지키는 로즈.

메일은 처음 방문하는 본궁의 정원을 천천히 둘러보며 급하지 않게 걸었다. 맥은 묵묵히 수행했다.

‘폐하는 지금 바쁘실까.’

로즈의 묘사처럼 멋대로 자라 있는 나무들을 보여 메일이 그런 생각을 했다. 평소에도 전조 없이 곧잘 떠오르곤 하는 상대는 장소와 매개가 갖춰지자 쉽게 그녀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메일은 느린 걸음으로 걷다가 볼을 감쌌다. 갑작스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 봤잖아.’

심지어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다. 메일은 제 충동이 낯부끄러워 덥지도 않으면서 손부채질을 했다. 사정을 알 길 없는 맥이 추우면 뭐라도 가져와 둘러드리면 되는데 더울 땐 어떻게 해드려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사이 저 앞에서 리엘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수가 없잖아! 메일, 분수 없어졌어.”

“그럴 리가요.”

덕분에 상념을 떨친 메일이 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리엘라가 분명 여기에 있어야 할 것이 사라졌다며 미간을 모으고 있었다. 메일은 보자마자 알았다. 절대 여기 아니다.

“……어떻게 봐도 여긴 분수가 있었을 장소라기엔…….”

“여기 맞는데? 로즈, 맞잖아?”

“죄송합니다. 사실 저도 잘…….”

“이쪽입니다.”

다가온 맥이 당당한 길치의 미스를 바로잡았다. 그가 앞장서서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자 거짓말처럼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중앙에는 바로 그 분수가 있었다. 낙하하는 물소리가 맑고 규칙적으로 울렸다. 제멋대로 자란 풀과 나무들이 싱그러우면서도 투박한 가운데, 저 혼자 섬세하게 조각되어 더욱 시선을 사로잡는 새하얀 분수.

‘응?’

그리고 그 앞에는 사람이 서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뒷모습을 보이고 있던 상대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조금 커다랗게 뜨였다.

“공주님? 비제아트 영애?”

“모하임 경.”

정원 안을 이동하는 사이 해가 더 기울었다. 어스름해진 빛이 또렷한 이목구비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짙은 남색 머리카락이 밝기 탓인지 얼핏 흑발처럼도 보인다. 반테르가 놀란 낯으로 네 사람을 맞이했다.

“이곳엔 어쩐 일로…….”

“산책을 나온 길이에요. 경께서는요?”

반테르는 내심 곤혹스럽게 손을 감췄다. 차마 분수에 동전을 던지러 나왔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둘러댔다.

“비슷합니다. 산책을 좀.”

“우연이네요.”

“저도 놀랐습니다.”

반테르의 놀랐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공교로운 우연인 것은 차치하고 하필이면. 그는 손에 쥔 동전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자연스럽게 숨길 수 있을까 촌각에 여러 번 고민했다.

그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의식처럼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것은 아는 사람만 아는-한 손으로 꼽았다-조금 낯부끄러운 버릇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모하임 공자님. 일시적으로 비제아트 영애의 호위를 맡게 된 맥입니다.”

그때 한발 물러서 있던 맥이 앞으로 나와 정중하게 인사했다. 반테르가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구면이다. 한때 지도 삼아 검을 나누기도 했던 맥 플러리 경. 그는 기사로서 반테르에게 동경심을 품고 있었다. 둘이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리엘라가 분수로 다가갔다.

“공주님, 그러다 빠지십니다.”

따라붙은 로즈가 걱정스레 한마디 했다. 리엘라는 분수에 바짝 몸을 기대고 수면을 들여다보았다. 장난으로 누가 밀기라도 했다간 그대로 입수하기 좋은 자세였다. 물론 여기서 감히 그럴 사람은 없었지만. 리엘라는 여상하게 대꾸했다.

“나 헤엄칠 줄 알아.”

“그런 문제가 아니지만.”

“어? 물 안에 뭐가 있네.”

물끄러미 분수 안쪽을 응시하던 리엘라가 뭘 발견했는지 문득 손을 뻗었다. 의식 없이 행한 일이었다. 막아낸 것은 반테르였다.

“……?”

인사를 나누던 상대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맥이 당황스럽게 눈을 깜박였다. 리엘라는 제 손의 진로를 가로막은 반테르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아슬아슬함을 만끽한 반테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님.”

“반테르잖아.”

“네, 접니다.”

“언제 왔어?”

언제 온 게 아니라 먼저 있었다. 리엘라는 내내 분수에만 눈길을 주느라 몰랐던 모양이었다. 왠지 그럴 것 같았던 반테르가 담담히 대답했다.

“방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왜 왔는데?”

“별 이유는 없습니다. 산책을 좀 하느라.”

“나랑 똑같네. 그런데 왜 막아?”

반테르가 팔을 뻗어 막았기에 리엘라의 손은 분수에 입수할 수 없었다. 반테르는 목적을 완수한 팔을 차분히 거두며 답했다.

“장갑이 젖습니다.”

“맞다.”

“그리고 분수가 보기보다 깊습니다. 장갑을 벗으신 대도 십중팔구 소매가 젖을 테니 제가 대신 꺼내 드리겠습니다.”

그는 신사적으로 나왔다. 대단한 정도는 아니고 기사로서 레이디에게 으레 보일 법한 수준이었다. 어쩌다 구경꾼이 된 메일은 반테르의 친절이 아닌 다른 것에 놀랐다.

‘로즈보다 먼저 반응했어.’

메일은 조금 전을 떠올렸다. 리엘라가 제 차림도 망각하고 서슴없이 물에 손을 뻗었고, 그걸 반테르가 얼른 팔을 내밀어 막았다. 여기까진 그저 자연스럽다. 문제는 반테르의 반응이 너무 빨랐다는 데 있었다.

‘분명 맥 경과 서로 안부를 묻고 있었는데.’

그의 움직임은 즉각적이었다. 주의가 다른 곳을 향한 상태였다면 나올 수 없는 속도였다. 그 말인즉 맥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신경은 온통 리엘라에게 쏟고 있었다는 뜻이 되는데. 상황을 정리한 메일의 눈빛이 의미심장해졌다. 로즈도 비슷했다.

리엘라는 장갑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그것을 벗으려다 이어진 만류에 콧잔등을 찡그렸다.

“정말? 내가 못 꺼내?”

“떠다니는 게 아니라 침수되어 있는 거라면 힘듭니다. 뭘 보셨습니까?”

“저거.”

지목한 것은 손쉽게 눈에 들어왔다. 꽤 떨어진 간격에 분수의 바닥에 잠겨 있음에도 물이 맑아서인지 선명하게 형제가 보였다. 수면이 흔들릴 때마다 착시 효과로 그것이 함께 이지러졌다. 반테르는 신음을 삼켰다.

‘동전이잖아.’

동그란 구리동전이 물속에서도 반들반들 존재감을 뽐냈다. 저 동전이 무슨 동전이냐. 다름 아닌 반테르가 몇 분전 그리로 던져 넣은 것이다. 던진 것만 해도 충분히 부끄러운데 심지어 그걸 다시 건져야 할 위기에 처한 반테르가 입을 닫고 고민했다.

‘동전 자체에 관심이 생긴 거면 차라리.’

동전이 가라앉아 있는 위치는 이곳에서 퍽 멀었다. 저쯤 있는 걸 손을 뻗어 잡겠다고 나선 리엘라의 거리 감각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반테르는 자기가 던진 걸 도로 줍기 위해 분수 안으로 입수하는 것과 감추고 있던 남은 동전을 내미는 것 중 뭐가 더 수치스러울지 고민해 보았다. 결판은 쉽게 나지 않았다.

“저거 꺼내고 싶은데.”

“……공주님.”

“응?”

“꼭 물속에 잠겨 있는 걸 원하십니까?”

주저하던 반테르가 결국 손을 내밀었다. 어차피 계속 천년만년 쥐고 있을 수도 없던 노릇이고. 그의 옷엔 주머니가 없었다. 반테르는 가능한 태연함을 가장했다.

“동일한 겁니다.”

리엘라의 흰 장갑 위로 구리동전이 놓였다. 황금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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