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탑을 열 거야.”
하늘이 팽팽 돌았다. 반테르는 체면머리 없이 드러누운 채로 숨을 고르다 옆을 쳐다보았다. 그보다는 몰골이 나았으나 마찬가지로 땀에 젖은 황제가 흐트러져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반테르가 대답했다.
“북쪽 외곽에 있는 것 말씀이십니까?”
“그래.”
북쪽 별궁 뒤편, 성벽과 닿은 외곽에는 작고 높은 첨탑이 하나 있었다. 어떤 용도로 설계된 것인지 시초를 아는 사람은 현재 없다. 탑은 시대를 거슬러오며 매번 다른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한때는 반역자를 가두는 감옥으로 쓰였다고도, 혹은 비인간적인 실험을 행하는 장소로 쓰였다고도 한다. 하나 지금에서는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탑은 잠겨 있었다.
“왜 그걸?”
“탑을 누가 잠갔는지 기억하나?”
“그야 선황께서…… 으음.”
“그러니 열어야지.”
오래된 이야기였다. 선황은 어느 날 별다른 선언 없이 북쪽 첨탑의 문을 봉했다. 언질을 받은 이도 없었다. 그렇게 잠긴 첨탑은 그 이후 선황을 포함하여 아무도 출입하지 못했고, 십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폐쇄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테르가 말했다.
“단서가 있을 거라 보십니까?”
“잘하면.”
“글쎄요. 은폐를 결심해놓고 구태여 증거를 남겨놓았다는 것도 좀…….”
“열어봐야 알겠지. 더구나 다른 길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고인을 붙들고 대체 뭘 숨기고 계신 거냐고 물을 수는 없지 않나?”
“하기야, 그도 그러네요.”
상공을 가만 쳐다보던 반테르는 문득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짙은 남색 머리카락이 움직임을 따라 흐트러졌다. 그는 황제를 응시했다.
“설마.”
“그래, 그거네.”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표정만 봐도 느낌이 온다는 말 아나?”
“……끄응. 오랜만에 아버지를 뵈러 내려가겠군요.”
긴 손가락으로 반테르가 제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헤집었다. 잠긴 첨탑을 여는 방법은? 간단하다. 하나, 열쇠를 찾는다. 둘, 문을 연다.
물론 보다 쉽고 간편하게 문을 부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마지막 수단이었다. 열쇠고 뭐고 찾아보지도 않고 문부터 부수기엔 선황은 아들에게 퍽 좋은 아버지였으니까. 탑을 열고 나서도 그 평가가 계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까진 그랬다.
황제는 열쇠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는 짐작했다. 진정으로 평생 첨탑이 닫혀 있기를 바랐다면 선황은 문을 봉하는 게 아니라 탑 자체를 붕괴시켰을 것이다.
하나 그러지 않았다는 건 언젠가는 열리리라 생각했다는 뜻. 그렇다면 문을 열 수 있는 열쇠 또한 파기하지 않고 보관해 두었을 가망이 컸다.
아마도, 다른 이의 손에.
“아버지께선 모하임 공과 막역한 관계셨지. 가능성을 따지자면 가장 높아.”
“열쇠가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 허탕 치는 거고.”
황제는 몸을 일으켰다. 먼발치서 지켜보고 있던 사용인이 이제 들어가시는가 보다 하고 수건을 든 채로 가까이 다가왔다. 시종이 완전히 가까워지기 전 황제가 말했다.
“참고로 공작이 열쇠를 들고 있어도 경이 그걸 얻어내지 못하면, 그것도 허탕 치는 거지.”
“윽.”
이내 지척으로 다가온 시종이 수건을 내밀었다. 깨끗하게 삶은 마른 천이 황제의 얼굴을 대충 훑었다. 이어서 몸을 일으킨 반테르가 침음을 흘렸다. 모하임 공작. 아버지는 그에게 퍽 어려운 상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