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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메일 (100)화 (100/144)

“경은 일곱 살 때의 기억이 있나?”

“예? 일곱 살?”

반테르는 뜬금없는 질문에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일곱 살이라니. 그때를 상기하려면 지금보다 스무 해나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나이가 마흔쯤 된 것도 아닌데 이십 년은 너무 긴 세월이었다. 그는 목검을 설렁 쥐고 기억을 더듬었다.

“어렴풋하게는…… 하지만 그건 기억이라기보단 추론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아마 내가 그때 그랬지, 이런 식의.”

강렬한 사건이 있었다면 생생히 떠올리지 못할 것도 없겠지만 반테르의 유년기는 애석하달지 다행이랄지 평이했다.

아, 작달막해서는 졸졸 따라다니던 텔리야를 신기하게 여겼던 기억은 있다. 반테르는 그걸 덧붙였다.

“텔리야가 지금보다 사람스러운 동생이었던 건 생각이 납니다. 사랑스러운 것 말고, 사람.”

“나와 경이 처음 만났을 때가 언제였지?”

“그건 여덟 살 때죠.”

“그래, 그랬지. 경의 이마가 깨졌던 게 기억이 나는군.”

“어디 저만 깨졌습니까?”

황제와 반테르는 여덟 살에 처음 만났다. 황제의 주선으로 상면한 동년배의 남자애 둘은 만나자마자 인사 대신 대련으로 서로의 이마를 깨놓았다.

물론 아무리 동의하에 펼친 결전이라지만 황태자와 공작 자제의 이마가 같을 리 없다. 반테르는 그 날 가문으로 돌아가 먼지 나게 흠씬 맞았다. 아련한 추억이었다.

“한데 왜 갑자기 그런 걸?”

“경.”

황제는 손에 든 목검을 휘두르는 대신 날을 바닥으로 두고 세웠다. 날 끝이 흙바닥을 조금 파고들었다. 그리 비스듬히 세워두고 황제가 입을 열었다.

“난 여태 이상하게 여겨본 적이 없었어. 내게 일곱 살 때의 기억이 없는 걸 말이야. 유년기의 기억이라는 건 통상 다 자란 후 추론과 상상으로 채워 넣는 퍼즐 같은 것이게 마련이니까. 경의 말처럼.”

“…….”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 문득 의문이 들더군.”

황제는 전날을 회상했다. 그림처럼 그려지는 기억 속에서 메일은 그에게 몸을 기대고 물었다.

‘폐하. 혹 일곱 살 때의 기억이 있으신가요?’

질문 자체만 보면 별거 아닐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묻는 건 가끔 인사 대용으로도 쓰였다.

하나 황제가 그를 대수롭게 여기게 된 건 메일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녀는 마치 확인하듯 질문했다. 그리고 답을 듣곤 표정의 명암을 낮췄다.

왜일까. 그때의 기억이 없다는 답은 메일에게 대체 어떤 의미가 되었을까. 황제는 그제야 의문을 품었다.

“경과 처음 만난 것은 여덟 살 때의 일이지. 한데 그거 아나? 난 그 무렵의 기억이 대단히 생생해. 몹시.”

뭐든 강렬한 감각을 동반한 기억은 선명하고 오래 남는다. 메일이 아주 어릴 때 죽을 뻔했던 일을 기억하는 것도, 반테르가 이마가 깨진 채 부친에게 두들겨 맞았던 날을 비교적 생생히 떠올릴 수 있는 것도 그래서였다.

하나 황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와 조금 달랐다. 그는 여덟 살 무렵의 거의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무엇을 배웠는지, 누구와 뭘 했는지, 누굴 만나 얼굴을 익혔는지. 흐리고 바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반테르는 이때 알고는 있지만 굳이 되새기지는 않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상기했다. 황제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그것도 남다르다는 수식이 붙어도 좋을 만큼. 반테르가 당황한 낯을 했다.

“폐하.”

“한데 고작 일 년의 차이를 두고 그 전 해의 일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참 재미있지 않나.”

“그 말씀은…….”

“이런 거라면 어떨까.”

“…….”

“아무 일도 없어서 기억에 남은 것이 없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서 그걸 기억하기를 거부하는 거라면.”

“폐하, 지금…….”

반테르가 들고 있던 목검을 바닥에 꽂았다. 던지려다가 기사로서 차마 그건 못 하겠어서 일단 그렇게 세로로 놓아두었다. 그 상태로 반테르가 혼란스럽게 상대를 응시했다.

“제가 바르게 이해한 게 맞습니까? 지금, 폐하의 유년기에 억지로 기억을 지울 만한 일이 있었을지 모른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반테르는 말문이 턱 막혔다. 저건 결코 쉽게 꺼낼 소리가 아니었다. 사람의 뇌는 잊고 싶다고 그것만 쏙 골라 잊게 해주는 편리한 기관이 못 된다. 죽을 뻔한 일도 또렷이 기억하는 게 사람이었다.

그런데 기억 자체를 통째로 들어낼 만한 일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제가 몰랐을 리가.”

“나와 만나기도 전의 일이 아닌가.”

“아버지나 선황께선 아셨을 게 아닙니까.”

“나도 그 생각을 했지. 그러고 나니 드는 가정이 있더군.”

메일은 황제에게 아무것도 밝히고 싶지 않아 했다. 손가락의 작은 생채기조차 발견하고 나면 아픈 법이다.

무의식에 트라우마를 남길 정도의 깊은 상처를 별다른 대책도 없이 본인에게 자각시키는 건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그래서 질문을 하면서도 왜 그것을 묻는지에 대해선 함구했다.

그러나 황제는 메일의 말이나 행동을 예사롭게 넘길 만큼 그녀에게 무심하지 못했다. 어조, 목소리에 담긴 감정, 시선, 표정. 전부 좇았으며 따라갈수록 명확해졌다. 듣지 않고도 알아챌 수 있었다.

“끔찍한 사건을 겪은 아이가 그에 대한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다면, 과연 아이의 부친은 그것을 일깨워주려 할까, 아니면…….”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뭔가가 존재할 가능성을.

“없었던 일로 만들어 덮을까.”

“좋습니다. 폐하,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었습니다.”

반테르가 양손으로 얼굴을 건조하게 쓸었다. 그는 그러고 나서 황제를, 제 친우를 다시 마주 보았다.

“그래서 결론은 뭡니까. 설마 그에 대해 알아내시겠다는 겁니까?”

“그래야겠지.”

“안 됩니다.”

“허락을 구하려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이십 년 동안 가까이한 친우이자 신하로서 드리는 말입니다. 안 됩니다.”

이곳이 집무실이었다면 반테르는 황제의 책상에 양손을 내려치듯 짚는 불경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 자리에 없는 책상을 치는 대신 간격을 성큼 좁혔다. 고작 반걸음을 띄우고 서서 반테르가 말했다.

“머리가 괜히 그걸 지우려 든 게 아닐 겁니다. 짐작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구태여 떠올렸다간 어떤 후유증이 뒤따를지 모릅니다.”

“각오해야지.”

“저는 각오 못 합니다.”

“언제 그리 나약해졌나, 경.”

“폐하.”

반테르가 손을 움찔거렸다. 멱살을 잡고 싶지만 마지막 선만은 지키는 모양새였다. 그는 친우를 붙잡고 마구 흔들고 싶은 충동을 겨우 자제했다. 연무장은 한산했지만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저 좋자고 드리는 말씀 아닙니다. 옥체 보전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건강한 정신도 옥체의 일붑니다.”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아닌가? 막상 들춰 봤는데 별것 없을 수도 있지 않나.”

“전혀 그렇게 생각하시는 기색이 아니십니다만.”

“반테르.”

순간 이름을 불린 반테르가 입을 다물었다. 저번처럼 장난도 뭣도 아니었다. 그건 친우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내가 전에 왜 이젤린을 곁에 두는지 이유를 알고 싶다고 했던 것, 기억하나?”

“……기억합니다.”

“나를 돕겠다고 했지. 성심성의껏.”

설마. 반테르가 미간을 좁혔다. 황제가 지금 떠올린 것이 바로 정답이라고 일러주듯 말을 이었다.

“실마리가 있을 것 같군.”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게 어떻게…….”

“사실 이건 조금 전에야 확신한 건데 말이야. 나는 실상 이 의심을 전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어. 왜 일곱 살 때의 기억만 지워낸 듯 없을까, 불규칙적으로 찾아오는 불면증이 실은 그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

“그런데 그동안은 무의식적으로 피한 거지. 의혹의 여지가 있지만 일부러 인식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온 거야. 그만큼 기억해 내는 걸 몸이 두려워했다는 방증이지.”

“…….”

“절망적인 이야기처럼 들리나? 하나 우습지. 나는 여기서 희망을 찾았어.”

“예?”

반테르가 숨기지 못한 당황을 그대로 드러냈다. 황제가 피식 웃었다.

“나는 왜 이젤린을 놓지 못할까. 난 그게 사랑해서는 결코 아니라고 확언했어. 한데 그러면서도 은연중엔 불안하더군. 증거가 없으니까.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야.”

“…….”

“곁에 붙들고 보호하려 들면서 사랑은 아니라. 개새끼의 짖음으로 치부하기 딱 좋은 소리지. 한데, 만약 그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일과 관련이 있다면? 기억해 내기 두려워 무의식이 벌벌 떠는 무언가와 내가 이젤린을 곁에 두는 이유에 연관성이 있다면…….”

황제는 웃고 있었으나 미간에는 주름이 졌다. 생경한 표정이었다. 절망 속에서 간신히 한줄기 희망을 찾고, 그러고도 그것이 혹 썩은 동아줄일까 무서워 애써 기대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라면 저런 얼굴을 할까. 반테르는 그것을 뭐라 형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능성이 생기지. 그렇다면 놓을 수 있지 않을까. 망각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기억이 이젤린을 붙잡게 하는 끈이라면, 그런 어두운 이유라면, 어떻게든 끊어낼 수 있지 않을까.”

“…….”

반테르는 침묵했다. 만류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상대가 지워진 기억을 찾아내려는 동기는 호기심이 아니다. 오기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제길.”

반테르가 욕설을 뱉었다. 불경의 끝을 달렸다. 그는 그러고선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곤 길게 한숨을 토한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좋아 미치시겠습니까? 여태 잘 잊고 계셨던 뭔지 모를 최악의 기억을 끄집어내야 할 만큼, 도저히 없이는 못 사시겠습니까?”

황제가 기억을 헤집으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걸 헤집다 보면 만에 하나 이젤린을 끊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고, 이젤린을 끊어내고 나면, 혹 어쩌면, 정말로 붙잡고 싶은 사람을 붙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작은 가능성 하나를 위해 깊이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상처를 들춰내겠다는 건 그 얼마나 무모한 발상인지. 반테르는 주먹질을 해서라도 말려야 한다는 걸 알았다. 머리로는 말이다.

“자네도 나중에는 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런 거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반테르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황제는 소리 내 웃은 뒤 목검을 손에 쥐었다. 날 끝에 묻은 흙먼지를 몇 번 휘저어 털어낸 뒤 말한다.

“대련하지.”

“……이 와중에? 지금 말입니까?”

“경에게 명분을 주겠다는 거네. 그러려고 나온 거고. 내가 이기면 경은 내 기억을 찾는 걸 성심성의껏 돕고, 경이 이기면 난 기억이고 뭐고 찾는 걸 포기하는 걸로. 어떤가?”

반테르와 황제는 그간 수도 없이 검을 나눴다. 대충 건너뛰고 세어도 최소한 천 번은 될 것이다. 반테르는 눈가를 찡그렸다. 참고로 황제와의 대련에서 그의 전적은 1,000전 1무 999패다.

말 그대로 명분 주기였다. 몸을 일으킨 반테르가 긴 한숨을 내쉰 다음 목검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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