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끝없는 승강이 끝에 메일은 겨우겨우 마차를 탈 수 있었다. 황제는 대단히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지만 계속 이러면 전처럼 눈도 안 마주치겠단 메일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고집을 꺾었다.
풀 죽은 황제의 모습은 제법 귀한 구경거리였다. 텔리야는 그때 마법구로 영상을 찍어 황제를 두고두고 놀려먹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참고로 거튼은 버려졌다.
“꽤 피곤한 상태로 도착하기는 했지…….”
회상하며 메일이 중얼거렸다. 밤늦게 성문을 통과한 마차는 그녀를 조용히 내성에 내려주었다. 텔리야는 브로치를 회수하지는 않고 걸어놓은 마법만 해제했다. 평범한 선물이 된 브로치는 모양이 예뻐 일반 장식용으로도 썩 나쁘지 않았다.
메일은 그것을 함에 담아두었다. 왕국으로 돌아갈 때 잊지 않고 가지고 갈 생각이었다. 그건 당장은 꺼내 보기 힘들어도 나중엔 그저 웃으면서 추억할 만한 매개가 되어줄 것이다. 언젠가는.
세안을 마치고 리엘라는 늘어져라 기지개를 켰다. 침의를 갈아입지도 않고 침대에 도로 발랑 눕는다. 그 상태로 눈을 깜박이다 리엘라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메일.”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아니. 있잖아, 나 이제 안 심심해.”
뭘 요구하려나 했더니 리엘라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메일은 피로를 풀어줄 목욕물을 받다 말고 리엘라를 쳐다보았다. 뭐랄까, 일단 선언 자체는 달가운 내용이기는 한데.
“갑자기 그런 말씀을?”
“어제 산책을 나갔다가 반테르를 만났는데.”
리엘라가 누운 채로 서두를 뗐다. 그녀는 요새 산책을 제법 자주 다니고 있었다. 물론 혼자서는 아니고 매번 경호 겸 안내원으로 로즈를 대동하기는 하지만, 주인도 안내원도 사이좋게 길치이니 둘이 함께 나갔다가 용케 귀환하는 것이 매번 대견한 외출이었다.
메일은 제가 몰랐을 뿐 리엘라가 원래 나들이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나 생각하다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반테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닌 모양이다. 리엘라는 정정해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돌아다니다 보니까 복도에 갑자기 걔가 있더라?”
“……반테르 경이요?”
“응.”
길을 잃고 헤매다가 본궁까지 갔다는 소리였다. 아니, 그보다 언제 이름으로 부르게 된 거야. 메일은 어지간하면 리엘라의 이야길 중간에 끊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건 도저히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주님, 그, 반테르 경을 이름으로 부르시네요? 어제까지만 해도 가짜 운명의 상대라고 지칭하셨잖아요.”
“걔가 이름으로 부르라고 해서.”
“네?”
혼란이 가중되었다. 혼돈에 빠진 메일이 결국 로즈의 도움을 구했다. 호출을 받고 날아온 로즈가 익숙하게 설명의 막을 올렸다.
“그건 바야흐로 어제 오후였습니다.”
세 시쯤 메일이 떠나고 한 시간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로맨스 소설을 읽던 리엘라가 질렸는지 대뜸 외출할 준비를 했다.
드레스와 장신구를 골라줄 메일이 없었기에 리엘라는 여상하게 예의 ……(생략)…… 한 모습이 되었다. 참고로 로즈의 미적 감각은 전사의 수준에 그쳐 있어서 기대할 것이 못 되었다.
그렇게 화려하고 화려하며 화려해진 리엘라는 그 상태로 로즈를 대동하고 처소를 나섰다.
길치의 산책에 공통점이 존재한다면 그건 목적지가 없다는 점일 것이다. 있어도 대체로 도착하지 못하니 처음부터 없앤다. 리엘라와 로즈는 행선지 없이 막무가내로 걸었고 그러다 본의 아니게 본궁에 도착했다.
본궁의 경비병은 공주의 출입을 막지 않았다. 간택전 후보의 자격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이 본궁 안에도 몇 군데 되었다.
리엘라는 본궁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발 가는 대로 활보했는데, 그러던 와중 마침 퇴근하던 반테르와 마주쳤다.
‘공주님.’
‘어? 가짜 운명의 상대.’
진부하게 모퉁이를 돌다 맞닥뜨린 둘은 얼굴을 보자마자 서로 한마디씩 건넸다.
그리고 반테르는 이내 침묵했다. 가짜 운명의 상대라니. 우연히 마주친 것도 괜찮고 아는 척을 해주는 것도 다 좋은데 호칭에 심상찮은 문제가 있었다.
반테르는 리엘라가 제 이름을 모르고-들었으나 까먹고-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냉철한 판단을 내렸다. 물론 정답이다. 그는 다시 자기소개를 입에 올렸다.
‘제 이름은 반테르 폰 모하임입니다. 반테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격식을 따지려면 모하임 공자, 혹은 모하임 경 쪽이 보다 적합한 호칭이겠으나 반테르는 리엘라를 잘 알았다.
어찌어찌 가문의 명으로 칭해 달라는 요청이 먹히더라도 ‘야, 모하임’ 이렇게나 부를 것이 눈에 훤했다. 그건 그 혼자만 골치 아파지는 호칭이 아니었으니 차라리 이름을 불리는 편이 나았다.
리엘라는 반테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그러나 성의는 없었다. 반테르는 리엘라가 대답만 저렇게 하고 뒤돌자마자 도로 까먹을 거란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일리 있는 의심이었다.
다음에 마주칠 때는 장소가 이런 한적한 복도가 아니라 사람이 바글거리는 연회장일 수도 있다. 그리 듣는 귀가 수다한 곳에서도 가짜 운명의 상대라고 불렸다간 곤란해질 게 뻔한 일이었다. 반테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따라해 보세요.’
‘응?’
‘반테르.’
‘……?’
‘어서 따라해 보세요. 반테르.’
‘반테르.’
상대의 단호한 말투와 표정에 리엘라가 얼결에 얌전히 따라했다. 반테르가 기특하다는 듯 활짝 웃었다.
‘좋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불러주세요.’
“……라는 일이 있었습니다.”
설명이 끝났다. 메일은 우선 박수를 쳤다. 로즈의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단순히 말로 전달받은 게 아니라 마치 재연극을 본 것 같았다. 선 감탄 후 메일이 감상을 꺼냈다.
“모하임 공자께선 공주님과 알게 되신 지 얼마 안 되셨죠?”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정말 놀라울 만큼 공주님을 꿰고 계시네요.”
“저도 동감입니다.”
메일은 정원에서 반테르와 처음 마주쳤을 때를 떠올렸다. 확실히 그때부터 인상이 남다르기는 했다.
리엘라의 행동과 언사에 바람처럼 빠르게 적응한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초면이면서 공주님을 능숙하게 잘 다루지 않았나. 그건 역시 다시 생각해도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내공이 높은가?’
문득 든 생각에 메일이 옳다구나 납득했다. 그러고 보니 상대는 그(?) 텔리야와 이십 년이 넘게 부대낀 경력이 있다. 그만한 내력이라면 우리 공주님 정도야.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메일은 요즘 리엘라가 그렇게까지 유별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덜 유별난 리엘라가 말했다.
“반테르랑 놀면 안 심심해.”
“노셨어요?”
“어제 그렇게 만난 뒤로 산책을 같이 하셨습니다.”
반테르는 그때 퇴근길이었다. 즉 다음 일정이 없다는 뜻이었으며 다시 말해 리엘라의 길 안내 요구를 거절한 명분이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나 굳이 제의-명령이나 다름없었지만-를 받지 않았더라도 반테르는 알아서 안내원을 자처했을 것이다. 해가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덕분에 산책이 조금 길어졌습니다. 본래는 어두워지면 위험하니 바로 귀환할 생각이었는데 모하임 공자께서 안전을 담보해 주셨으니까요. 공주님께선 저녁 산책을 꽤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만.”
“맞아. 재미있던데?”
리엘라가 기다렸다는 듯 거들었다. 메일은 그 모습에서 리엘라가 아까 하려던 말이 뭐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해가 진 후에 한 산책이 퍽 즐거웠다는 감상을 꺼내놓고 싶었던 거구나. 하기야 국왕은 하나뿐인 공주를 금이야 옥이야 키웠으니 목적지 없는 밤나들이는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알고 나니 보였다. 리엘라는 약간 상기된 기색이었다.
“산책으로 어딜 다녀오셨는데요?”
“작은 숲.”
“숲이요?”
“본궁 뒤편에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그간 봐온 산책용 정원보다는 비교적 덜 다듬어진 느낌이었는데, 아마 일부러 그렇게 둔 것 같았습니다.”
나무와 풀의 키가 들쑥날쑥했다. 여태 봐온 산책용 정원에선 있을 수 없던 일이었다.
로즈는 마치 개인정원을 넓게 확장시켜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고 묘사하면서, 또 가운데의 분수대는 몹시 섬세하고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어 인상적이었다고 덧붙였다. 리엘라가 옆에서 동의하듯 연신 끄덕거렸다.
메일은 덕분에 실없이 웃음이 터졌다. 아무리 손이 덜 간 모습이었다지만 정원을 작은 숲이라 표현한 것도, 로즈의 설명에 고갯짓으로 열심히 맞장구를 치는 모양새도 마냥 귀여웠다. 언제 이만큼 정이 들었지. 정들더니 콩깍지도 두꺼워졌다.
“운명의 상대가 좋은 사람이면 좋겠어요.”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냥요. 괜히 그런 생각이 드네. 제 콩깍지보다 다섯 배는 두꺼운 게 쓰여서 공주님의 행동, 말 하나하나 전부 사랑스럽게 여기는 그런 사람과 만나시면 좋을 텐데.”
그러지 않고서야 안심이 되지 않을 것이다. 메일은 의자 등받이에 양팔을 얹은 채로 리엘라를 빤히 바라보다, 문득 제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곤 아연하게 팔에 이마를 묻었다. 배우자 걱정이라니. 이게 웬 피붙이나 할 법한.
‘……아니, 그래도 역시 염려가 된단 말이지.’
메일은 슬그머니 눈을 들었다. 정말 좋은 사람이 데려갔으면 좋겠다. 진심이었다.
뇌 청순 공주님 때문에 나라가 망하겠다고 한탄했던 것은 이제 까마득한 옛날 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