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은 맥락 없이 갑작스러웠다. 적어도 듣는 이에겐 그랬다. 황당할 만도 한데 황제는 그를 지적하는 대신 순순히 답을 주었다.
“……일곱 살 때라면, 아니. 그때의 기억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군.”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요?”
“그건…… 없을 수밖에. 어머니는 내가 태어난 직후 돌아가셨으니까.”
메일은 황제에게 기댄 채로 숨을 골랐다. 질문은 남아 있었으나 바로 내뱉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길지 않은 침묵을 흘려보낸 후 입술을 뗐다.
“……선황 폐하에 대한 것은요?”
선황. 즉 황제의 아버지. 그는 십 년 전 작고한 인물이었다. 선황은 당시 황태자였던 아들이 장성하여 성년식을 일 년쯤 앞두었을 때 병상에서 숨을 거뒀다.
십 년은 강산을 변화시킬 수는 있어도 기억이 바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황제는 친부에 대한 기억이 선명했다.
“좋은 분이셨지. 인자하셨고. 늘 내게 많은 것을 해주고 싶어 하셨던 기억이 나는군.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왜였을까. 무슨 연유에선지 내게 사과를 하셨지만.”
많은 장면이 선연했지만 그중 가장 뚜렷한 것은 바로 부친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병상에 누운 지 꼬박 반년이 되던 날. 궁의는 오늘을 넘기기 힘들 거라 진단했고 황제 또한 그것을 직감했다. 그는 그날 종일 아버지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어스름한 새벽.
‘……미안하다.’
선황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러곤 숨을 거뒀다.
황제는 아직도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선황은 그에게 좋은 아버지였다. 냉대하지도, 무심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따뜻했다.
선황의 뜻 아래 황제는 어릴 때부터 반테르와 친분을 쌓고, 제왕학을 배웠으며 검을 수련했다. 그는 받은 것이 많았다. 한데 무엇이 부족했다고 마지막 가는 길에 다른 것도 아니고 사과를 남겼나.
황제는 그저 막연히 짐작했다. 그건 사람이 죽기 전에 울걱 치밀어 오르는 일종의 정체 모를 회한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별달리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지는 않은, 그런.
그러나 메일의 감상은 그와 달랐다. 황제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지만 메일은 선황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죄책감.’
생전 뭐든 부족하지 않게 해주려 한 것도, 그랬으면서 눈을 감던 순간에는 사과를 남긴 것도. 그가 정말로 세 번째 대비의 죽음을 은폐했다면 그건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었다. 사람이라면 최소한 그 정도의 죄책감은 느꼈어야 옳지 않나. 그와 그녀의 아이에게.
메일은 황제의 품에 이마를 묻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이제야 어렴풋이 윤곽을 그리기 시작한 비극은 여전히 막연하고 추상적이었으나, 그럼에도 무겁게 가슴을 죄어왔다.
그건 하필 그 불행의 주인공이 황제라서가 맞을 것이다. 눈을 누르듯 감았다 뜬 메일이 알게 된 사실을 정리했다.
엘리사의 말은 전부 실담일 것을 전제로 두었다. 그건 꼭 그녀의 눈빛이나 태도가 진솔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이야길 믿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메일은 그 내용을 바탕으로 비극의 실체를 구성했다.
우선 선황은 황후와 사별한 뒤 세 명의 비를 들였다. 그중 에시스 왕국 출신인 첫 번째 비가 가장 지닌 위세가 높았으며, 성정이 포악한 편이라 나머지 비를 가만 두지 않았다.
두 번째 비는 입궁 후 몇 년이 지나 스스로 비의 자리를 내려놓은 뒤 황궁을 떠났고, 세 번째 비는 그보다는 더 버텼으나 결국 황제가 일곱 살이 되던 해 죽고 말았다.
선황은 그녀의 죽음을 덮었다. 진상은 가려지고 세 번째 대비의 사망은 산고로 인한 것으로 탈바꿈되었다.
무려 7년이나 되는 시기를 날조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도 선황은 그것을 택했다. 그건 아마도 모친의 죽음을 겪은 일곱 살짜리 아이가 어미에 대한 기억을 통째로 잃었기 때문에.
메일은 몸에 힘을 빼고 저를 지탱한 품에 완전히 기댔다. 불행의 무게가 벅찼다. 그녀가 가정한 실체가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면 지금 황제는 극심한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는 말이 된다. 악의적으로 건드렸다간 어떤 결과를 불러들일지 두려울 만큼 지독한.
황제는 메일이 제게 온전히 기대자 흠칫 놀랐다가 이내 그녀를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아프냐고 묻는 것에 메일은 고개를 저었다. 안긴 채로 메일은 질문을 꺼냈다. 마지막 확인이나 다름없는.
“폐하, 혹시 악몽 같은 걸…… 꾸신 적 있나요? 한두 번 말고 꾸준히요. 그런데 이상하게 깨고 나서는 기억나지 않는.”
“그걸 동반하는 불면증이라면 꽤 오래됐지.”
황제는 구태여 감추지 않았다. 어차피 그와 오래 세월을 함께한 이라면 전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간혹 불규칙적으로 찾아오는 원인 모를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런 날에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간 메일의 말처럼 기억나지 않는 악몽을 꿨다. 깨어난 이후 의식에 남는 것이라곤 그저 끝없이 괴로웠다는 감각 외엔 전무했다.
메일은 그것을 듣고 확신했다. 엘리사에게 말을 떠벌린 에시스 왕국 귀족이 황제를 병든 사람이라고 지칭했던 건 그래서였다. 황제에게는 정말로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것도 의식의 기저 아래를 담당하는 깊은 무의식 속에.
‘그걸 건드리려는 거라면.’
메일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곪아서 썩어가는 상처는 본인이 그 존재를 모를수록 더 위험했다. 모르기 때문에 타인이 그 상처를 노려도 막을 수 없었다. 어떻게 헤집어서 어떤 식으로 무너뜨려도.
‘……지금 제국에서 이 사실을 전부 아는 사람이 누가 있지?’
은폐된 대비의 죽음. 황제의 오래된 불면증. 두 가지를 전부 아는 사람이라면 그 둘을 연관 짓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용의선상에 올리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모호한 것이 사실이었다.
다른 방법은…….
“폐하.”
“이야기해. 안색이 계속 좋지 않은데 정말 아픈 것이 아닌가?”
“아뇨, 괜찮아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요. 그보다 부탁드릴 게 있어요.”
황제를 노리는 흉수는 실재한다. 그걸 전제로 두고 메일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았다.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요.”
선황은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감추고자 하는 내막을 아는 사람을 황궁과 제도에 그대로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부 죽여서 입을 막을 수는 없었을 테니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거나 은퇴시키는 방식을 택했겠지. 메일은 지금부터 그들을 한 명씩 만나 볼 생각이었다.
은밀히? 아니, 눈에 띄게. 행각을 감추더라도 필히 어설프게.
“장소는 어디든 괜찮아요. 자리를 만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럼 분명히 저를 가만두지 않으려는 자가 나타날 테니까.
메일은 스스로를 낚싯바늘에 매달았다. 이게 지금으로선 흉수를 끌어낼 유일한 수단이었다. 부디 원하는 상대가 물어주기를. 그녀는 복잡한 눈빛을 하고서도 결코 제 청을 거절하지 않는 황제를 보며 문득 엘리사의 작별 인사를 떠올렸다.
‘다음에 언젠가 나를 또 찾아와줘요. 내킨다면 말이에요. 와서 구하고 싶다던 상대를 얼마나 멋지게 구했는지 영웅담을 들려주세요.’
엘리사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왜 그녀를 찾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지, 거튼이 알려준 이유를 제외하고도 알 것 같을 정도로 말이다.
메일은 은근한 혼란이 읽히는 황제의 황금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금가루를 개어 풀어놓은 호수를 보듯 그의 금안은 깊고 맑았다. 내 것이 아님에도 결코 바래는 걸 가만 지켜볼 수 없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반.”
메일은 읊조리듯 소리 냈다. 이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더 남았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지키고 싶었다. 손을 놓더라도 이 사람을 모든 위험에서 구해낸 뒤, 그러고 나서야 놓을 것이다.
“돌아가요, 이제. 황성으로.”
나라를 지키러 제국에 온 용사는 그렇게 본분을 잊고 다른 것을 지키겠노라 결심했다. 하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메일은 눈을 감고 고개를 기댔다. 저를 지탱하는 손길은 잔뜩 긴장해 굳어 있으면서도 또 유리를 옮기듯 조심스러워, 가슴께를 온기로 간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