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리야는 벽에 등을 붙이고 섰다. 바로 옆에 문을 두고 그러고 있으니 꼭 문지기 같았다. 그녀는 내친김에 테라스에 방음 마법도 걸어준 뒤 옆 사람을 불렀다.
“폐하.”
문 좌측에 그녀. 우측에는 황제가 있었다. 거튼은 괜히 근처에서 알짱대다가 황제의 손에 명을 달리할까 봐 텔리야가 먼발치로 보냈다. 황제가 응수했다.
“호칭이 대담하군. 후작 부인.”
“걱정 마세요. 이쪽에도 얇은 막을 둘러서 소리를 차단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엘리사를 그렇게 찾을 생각을 하셨어요?”
황제를 대하는 것치고 텔리야의 어투는 썩 허물없이 편안했다. 그도 그럴 게 어릴 때부터 친오빠인 반테르를 따라 그녀가 얼마나 자주 황제를 마주했던가.
결혼한 뒤로는 얼굴을 볼 일이 현저히 줄었지만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질릴 만치 꾸준했다. 황제와 텔리야는 막역하다면 막역한 사이였다.
황제는 시선은 주지 않으며 대답했다.
“자네가 3층이 예감이 좋았다고 하지 않았나. 틀렸을 리 없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바로 그리로 올라가서 미남계를 쓰신 거예요?”
미남계. 퍽 말문이 막히는 단어였지만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황제는 당당하게 일행을 끌고 3층으로 올라가서는 잠시 혼자 떨어져 있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가발을 벗어던지고는 매력 발산. 다들 처음에는 저게 뭐 하는 짓인가 어안이 벙벙했으나 정말로 엘리사가 자석에 달라붙듯 꼬이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엘리사가 먼저 접근하리란 건 어떻게 확신하셨어요?”
“거튼 멀그므란 머저리가 엘리사라는 여자와 인연이 있는 걸 자랑처럼 이야기하지 않았나. 눈치로 보아 손님으로 만났던 것 같지는 않더군. 사적인 만남이었다면 답은 훤하지. 그 멍청이가 가진 거라곤 얼굴뿐이니.”
그를 통해 엘리사가 미남에 혹하는 성정이라는 걸 추측했단 소리다. 텔리야는 황제의 안목을 인정했다. 얼굴뿐인 멍청이라니. 잠깐만 보고도 완벽한 분석이었다.
“아무튼 기쁘네요. 제 감이 도움이 되었다는 얘기니까. 하기야 내가 다른 것도 아니고 미녀를 놓칠 리가 없지.”
“…….”
“그런데 말이에요, 폐하.”
텔리야가 대화 주제를 바꿨다. 마법을 걸어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하고도 그녀는 은밀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 혼나셨어요?”
“뭐?”
“나무 요정님한테 말예요. 누굴 가리키는 호칭인지는 당연히 아실 테니 부언하지 않을게요.”
황제는 조금 기가 차서 눈을 돌렸다. 별걸 다 묻는다 싶었다. 그러다 곧 그녀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누구 덕분에 이곳에 왔는데, 참.
양심이 존재하는 황제가 순순히 대답했다.
“혼났네.”
“어머나.”
“자네가 알려줬다는 것도 이미 불었어.”
“엇, 그래요?”
텔리야는 황제와 함께 나타난 뒤로 저를 대하던 메일의 태도를 떠올렸다. 변화는 전혀 없었다. 책망하더라도 얌전히 들어야지 마음먹었건만 예상외인 일이었다.
“브로치를 만들어 달아드린 것 때문인가…….”
“브로치?”
“밤을 꼬박 새워서 마법 용품을 하나 만들었거든요. 이쪽에서 위치 탐지가 되고, 그쪽에서는 신호를 보내는 게 가능한 걸로. 혹시 저랑 떨어져 계실 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
“…….”
“그런데 신호는 결국 안 왔어요. 다행히 별일은 없었나 봐요.”
있었지만 황제가 해결했다. 그는 굳이 메일에게 닥쳤던 위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언급은 고사하고 상상만 해도 꺼졌던 살심이 다시 솟구쳤기 때문이다. 그 개새끼, 역시 죽였어야 했나.
황제는 강제로 팔을 붙들렸을 때 메일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던 것을 기억했다.
가능하면 나서지 않고 그림자처럼 쫓아다닐 계획이었던 그가 이성을 잃고 끼어든 것은 그래서였다. 아랫입술을 사려 물던 얼굴에선 미약하지만 분명 공포심이 읽혔다.
그는 조금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텔리야.”
“말씀하세요.”
“……최근에 있었던 공개 처형,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조용히 목이 잘린 거면 몰라도 공개 처형이라면 근래 한 건뿐이었다. 정신 나간 간택전 후보와 더 정신 나간 별궁 병사가 함께 저질렀던 미친 짓 콜라보. 피해자는 메일이었다. 두말하면 입 아프게 기억하고 있던 텔리야가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하죠. 지금 생각하면 그걸 구경 갔어야 하는데.”
“후유증은…… 결국 남을 수밖에 없는 건가?”
황제는 답답했다. 그 답답함은 일종의 무력감과 닿아 있었다. 범인을 잡고, 치죄하고, 그는 제게 허락된 모든 것을 다했으나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것으로 되돌리는 일만은 할 수 없었다. 실은 그것이 가장 간절한데 말이다.
텔리야는 황제가 뭘 말하고 싶은지 알아들었다. 보통 공포를 동반한 외상은 정신적 트라우마를 남긴다. 소중한 사람이 그런 일로 괴로워하는 건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고통이 되게 마련이었다. 그녀는 고심하다 입술을 뗐다.
“많이 심해요? 밤중에 악몽을 꾸다 깰 만큼?”
“그건…… 모른다만.”
“괜찮으실 거예요. 지금은 아니더라도 아마 금방 좋아지시겠죠. 그만큼 강한 분 같았으니까. 더구나 범인이 잡혔잖아요? 가해자가 죗값을 치르는 건 생각보다 피해자에게 큰 위안이 되거든요.”
반대로 그러지 못했을 경우에는 속이 썩어 문드러진다. 말 그대로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가장 억울한 경우였다.
텔리야는 그래서 인성이 덜 된 권력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수많은 이의 가슴에 구멍을 뚫어놓을 수 있는 작자들이었다.
황제는 텔리야의 말에 서린 긍정적인 확신에 약간이나마 마음을 놓은 듯했다. 그런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전보다는 평온했다.
“그나저나 혼나셨다면서요. 많이 혼나셨어요? 제가 기껏 오라버니를 통해 귀띔해 드린 보람은 있었나 모르겠네.”
“그건…….”
대화의 주제가 밝은 것으로 회귀하려 했다. 그때 테라스의 문이 열렸다. 텔리야와 황제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시선을 주었다. 문을 열고 나온 메일은 두 사람이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던 모양인지 깜짝 놀랐다.
텔리야가 먼저 말을 걸었다.
“목적하신 건 잘되셨어요?”
메일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엘리사에게 들은 내용을 떠올렸다.
‘술에 잔뜩 취해 있었어요. 자기가 뭘 지껄이는지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였죠. 그런 와중에도 나를 안아보겠다고 눈은 또 벌개져서. 혹시 아실까요? 전 돈을 준다고 아무하고나 자진 않거든요.’
과거의 언젠가를 회상하는 엘리사의 얼굴은 별다른 감응 없이 무감했다. 대단히 강렬한 기억은 못 되었다고 덧붙이면서도 그녀는 제법 세세하게 그날을 설명해 주었다.
‘면전에 대고 속삭여 줬죠. 나와 자고 싶으면 돈 말고 다른 게 있어야 한다고. 뭔가 마음이 동할 만한 걸 꺼내보라고 말이에요. 그랬더니 어지간히 몸이 달았던 모양이죠. 가진 보석을 다 끄집어내도 내가 시큰둥하자 그는 결국 입을 열었어요.’
엘리사는 말하다 우스웠는지 중간에 잠깐 입을 가리고 웃었다. 멀쩡한 상태였다면 그 귀족이 아무리 멍청했더라도 그런 이야길 화대 삼아 꺼내진 않았을 것이다.
하나 이성을 흐리는 술, 절로 본능이 앞서게 하는 유혹적인 미녀. 판단력이 사라진 귀족은 기억하지 못할 실수를 했다.
‘혹할 만한 이야길 해주겠다고 하더라고요. 황제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그는 사실 병든 사람이라고 말이죠. 시작부터 개소리 같았지만, 또 나름 흥미롭긴 했어요. 그래서 조금 경청하는 티를 내주었더니 신나서 술술 늘어놓기 시작하더군요.’
‘…….’
‘황제의 생모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산고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알고 있겠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그녀는 황제가 일곱 살은 되었을 때 숨을 거뒀다. 그럼에도 황제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
‘그 밖에도 뭐라 주절주절하긴 했지만 그때부턴 발음이 너무 심하게 뭉개져서 알아듣기가 힘들었어요. 사투리도 심했고요.’
‘사투리요?’
‘사투리라고 해야 하나, 음…… 어쨌든 특정한 곳에 사는 사람들만 사용하는 독특한 억양 같은 건데. 사실 그 귀족도 제가 그걸 알 거라곤 생각 못 했을 거예요. 일부러 그 나라 사람인 걸 감추려고 복식도 완전히 제국의 것으로 차려입고 있었고. 다만 그 치가 몰랐던 게 있다면 우리 가게에 그 나라에서 살다가 이민 온 작부가 한 명 있었다는 거죠.’
엘리사는 이어 말했다. 확언이나 다름없었다.
‘그 귀족, 에시스 왕국 사람이었어요.’
“후작 부인.”
메일은 저도 모르게 상대를 불렀다가 자기가 놀라 입을 가렸다. 가명으로 호칭해야 한단 사실을 순간 잊을 정도로 정신을 한군데 팔고 있었다. 당황하는 메일을 향해 텔리야가 괜찮다는 의미로 씩 웃어보였다.
“마법으로 방음막을 쳐 놨어요. 아직 해제 안 했고요.”
“……아.”
“그런데 전 왜 부르신 건가요?”
텔리야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메일을 응시했다. 제게 해선 안 되는 말 같은 건 없으니 무엇이든 얘기하거나 물으라는 표정이었다. 과할 만큼 호의가 가득한 눈빛에 메일이 약간 어색하게 웃은 뒤 입을 열었다.
“혹시 에시스 왕국에 대해 아시는 게 있나요? 제국과의 관계라든가, 뭐든.”
메일은 에시스 왕국을 알지 못했다. 최소한 모국인 벨티에 왕국과는 교류가 없는 나라였다. 그러나 이상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꼭 전에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에시스 왕국?”
텔리야가 눈을 깜박였다. 진한 회색 눈동자가 눈꺼풀의 움직임에 따라 드러났다 사라진다. 곧 그녀가 수월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전 비전하, 그러니까 첫 번째 대비 전하의 모국인걸요. 여전히 국교를 맺고 있어서 매해 사절단을 보내기도 하는 곳이에요. 그런데 에시스 왕국은 왜?”
텔리야의 대답에는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느냐는 의문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메일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순간 힘이 빠져 가까이 있던 문고리를 잡고 지탱했다.
‘그럴 수밖에요. 첫 번째 대비의 외척인 에시스 왕가가 워낙 막강하기도 했고, 그 본인의 성격도 썩…….’
답을 듣자마자 떠오른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울렸다. 분명 생경한 이름인데 어디서 들어보았나 했더니, 그랬다. 본궁의 축하연에서 처음 만났을 때 거튼이 실컷 늘어놓은 얘기 중 그런 언급이 있었다. 메일은 엄습하는 잔혹한 가정에 입을 틀어막았다.
‘세 번째 대비가 죽게 된 건…….’
황궁은 세 번째 대비의 사망을 은폐했다. 사실을 감추고 거짓을 알렸다. 그렇다면 그 진상을 에시스 왕국에서는 어떻게 알고 있나.
너무 우스운 질문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세 번째 대비의 죽음에 첫 번째 대비가 관련되어 있다는 얘기밖에 더 될까.
메일은 문득 전에 읽었던 어떤 이야기책을 떠올렸다. 왜 이 순간 생각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제목이 뭐였지, 공주님의 눈물이었나? 책은 동화 같던 도입부와는 달리 비극을 담고 있었다. 질투에 미친 왕비. 그런 왕비의 손에 살해당한 후비. 후비가 죽던 날은 그녀의 어린 딸인 공주의 생일이었다.
“메일.”
메일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알아챈 황제가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메일은 문고리를 놓고 황제에게 몸을 기댔다. 걱정으로 그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어디 안 좋은 건…….”
“폐하. 혹 일곱 살 때의 기억이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