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려라 메일 (96)화 (96/144)

엘리사. 그녀는 작부 일을 시작하면서도 제 본명을 그대로 사용한 인물이었으나 이 파티에서만은 이름을 감췄다. 이름뿐일까? 엘리사는 여러모로 본인을 훌륭하게 감춰냈다.

상대를 마주하고 텔리야는 두통이 일었다.

“이래서 내가 놓쳤던 거구나.”

텔리야가 3층 전체를 구석구석 뒤집고도 엘리사를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엘리사는 파티용 가명으로 ‘리사’라는 이름을 썼고, 가발 대신 염색을 통해 머리색을 감췄다. 물론 여기까지였다면 눈치 빠른 텔리야가 그리 허탕을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엘리사는 제 가장 큰 특징을 숨겼다. 그것도 꽤나 능란하게.

생긋 웃으며 엘리사가 제 와인색 장갑을 벗었다.

“손가락 길이를 달라 보이게 하는 건 쉬운 일이에요. 간단한 장난감만 있으면 되니까.”

테라스의 만월 아래 엘리사의 맨손이 드러났다. 그녀는 왼손의 약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에 각각 뭔가를 끼우고 있었다. 모양은 얼핏 골무를 닮았으나 용도는 한눈에도 그와 명백하게 다르다. 거튼이 충격으로 입을 벌렸다. 헐.

“다른 곳에서라면 이렇게까지 하진 않는데. 알잖아요? 오늘 이 파티는 빼앗기가 성행하는 거. 입장하자마자 나를 빼앗기면 어쩌냐고 우리 자작님이 얼마나 달달 떠시던지,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제가 신경을 좀 쓴 거랍니다.”

“가슴도 그래서 감춘 건가? 가슴골을 보이면 누가 알아챌까 봐?”

놀라 입만 벌리고 있던 거튼이 불쑥 물었다. 아, 이 자식. 텔리야가 경멸의 눈빛을 쏘았으나 거튼은 웬일로 꿋꿋했다. 실상 그에게는 나름 중요한 질문이긴 했다. 그는 말뿐이 아니라 정말로 가슴을 보고 엘리사를 구분해 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엘리사는 귀한 집 레이디가 아니라 작부다.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그녀가 대꾸했다.

“당연하죠. 어디 내 가슴이 다른 데서 쉽게 볼 수 있는 가슴인가? 드러내고 다녔다간 꼭 백작님 같은 사람이 알아볼 테니까 꽁꽁 숨겼죠. 취향도 아닌 드레스를 입은 건 그래서예요. 왜요? 보고 싶으세요?”

“물론 보고 싶…… 이 아니라! 하아. 이래서야 내 쓸모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리잖아.”

엘리사가 입은 것은 가슴께에 화려한 프릴이 겹겹이 달린 단색 드레스였다. 어린 소녀나 가슴이 콤플렉스인 여성을 위해 디자인되었다더니, 확실히 입은 이의 가슴이 작은지 큰지 알 수 없게 가려주는 기능이 탁월했다.

상심한 거튼이 우울하게 침잠하자 텔리야가 어쩐 일로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백작님 자체가 무용지물인데요, 뭘. 기대 안 했어요.”

“그거 위로 아니죠?”

“알아듣네?”

“아무튼 제 가장은 퍽 괜찮았는데 말이에요. 입장한 이후 아무도 저를 알아보지 못했을 만큼. 그런데 이렇게 스스로 정체를 밝히게 될 줄이야.”

엘리사는 그렇게 말한 뒤 입술을 핥았다. 루즈를 발라 새빨간 입술을 붉은 혀가 야릇하게 쓸었다. 시선은 황제를 향하고 있었다.

놀란 메일이 자기도 모르게 황제의 눈을 가렸다. 엘리사가 호호 웃었다.

“걱정 마세요. 유혹하려 들 생각은 없으니까. 어차피 통하지도 않을 것 같고. 내가 다 벗고 덤벼들어도 넘어오긴커녕 나를 붙잡아다 그대로 경비대에 넘길 것 같은데, 아닌가요?”

“예? 정말입니까? 남자가 어떻게 그런…….”

“멀그므 백작님. 세상 사람이 다 너 같지는 않아요.”

거튼이 텔리야에게 익숙하게 구박당하는 사이 메일이 약간 겸연쩍게 손을 내렸다.

상대에게 유혹할 의사가 있었든 아니든, 가려서 뭘 어쩌겠다고 눈을 가렸지. 민망함에 혼란하게 양손을 뒤로 감추는 메일을 황제가 묘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그걸 지켜보던 엘리사가 말을 덧붙였다. 난간에 등을 기댄 몸이 낭창낭창했다.

“그리고 남의 떡은 먹지 말잔 주의이기도 하고요. 소화를 못 시킬 만한 과한 것도 마찬가지죠. 원래라면 접근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낚였지, 낚였어.”

엘리사는 조금 전을 회상했다. 만취해 곯아떨어진 파트너를 테라스에 버려두고 연회장 안을 느긋하게 서성이던 중이었다. 음료로 목을 축이다 근처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기에 그쪽을 쳐다봤다. 그랬더니 웬 남신이 있었다.

파티용 가면 아래 드러난 높은 콧대와 환상적인 하관. 가발이라도 쓰고 있다가 벗어던졌는지 조금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가락이 지독하게 섹시했다. 엘리사는 그때 직감했다. 저 남자, 분명 다시없을 미남이구나.

그녀는 미남을 좋아한다. 이미 거튼이라는 선례도 있다. 도둑이 빈집을 그냥 지나치지 않듯 엘리사 또한 백금발의 휘황한 미남을 가만 흘려보내지 못했다.

‘안녕. 혹시 파트너 있어요?’

고고하게 서 있던 미남은 엘리사가 말을 걸자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황금색 눈동자는 일견 무심하게 그녀를 담았으나 엘리사는 그 시선에 가슴이 크게 뒤흔들렸다. 확신이 한층 깊어졌다. 정말 잘생긴 남자였다. 지나치게.

엘리사는 여태 수많은 미남과 밤을 보냈다. 상대가 먼저 접근하기도 하고, 그녀 쪽에서 다가가 작정하고 넘어뜨리기도 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 수가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다는 거다. 경험이라면 쌓일 만큼 쌓였다. 하나 그럼에도 엘리사는 심장이 마구 두근거려 상대의 앞에서 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미남은 곧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마저 소름 끼치게 훌륭했다.

‘글쎄. 그대가 누구냐에 따라 내 대답이 달라질 것 같은데.’

‘엘리사예요.’

엘리사는 다급하게 저를 밝혔다.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제 이름이 지닌 값어치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눈앞의 미남을 붙잡기 위해 가지고 있는 가장 강한 패를 고민하지 않고 꺼냈다.

‘들어보았을걸요, 내 이름. 어때요? 오늘 나를 안으면 당신에게 훈장이 하나 추가될 텐데.’

여태 엘리사가 이렇게 나왔을 때 그녀를 거부한 남자는 없었다. 적어도 환락가에서는 말이다. 만인이 탐을 내지만 아무나 손에 넣을 수는 없는 거리 제일의 작부.

그녀를 정복함으로써 얻는 휘장은 비록 통념적으로는 같잖은 것이나 이런 데에 방문하는 남자에겐 무엇보다 영예로운 것이 되게 마련이다. 엘리사는 그걸 알았기에 자신만만했다.

그러고 나서는 어떻게 되었나. 미남이 테라스로 자리를 옮기자 제안하기에 다 넘어왔구나 싶었다.

그래, 테라스에 들어가 단둘이 되면 저 가면부터 벗겨야겠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문에 빗장을 건 다음 얼굴을 마주 보고 깊고 뜨거운 밤을 보내야지.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달콤했다. 그리고 상상만으로 끝났다.

난간에 기대 있던 몸을 바로 세운 엘리사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때는 지금처럼 이렇게 위압감이 느껴지지도 않았어. 그랬으면 애초 다가가지도 않았겠지. 하아, 어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물고기가 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네?”

“어허, 엘리사. 누구 앞이라고 하대더냐?”

“혼잣말이에요. 푸념 비슷한 거. 그나저나 백작님이 설설 길 정도면 어지간히 높은 신분이신가 봐요?”

엘리사는 황제를 지긋 응시했다. 꼭 뭐라도 꿰뚫어 볼 것 같은 시선이라 메일이 내심 움찔했다. 거튼은 홀로 아무것도 몰랐기에 딴 대답을 내뱉었다.

“그렇지! 다른 때라면 네가 눈도 감히 못 마주칠 고귀한 귀부인이시다.”

“어머나, 백작님. 틀렸어요. 미인은 신분이 어떻든 무조건 저와 눈을 마주 할 수 있답니다. 물론 백작님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기분이 나빠져서 예외지만요.”

거튼은 입을 열 때마다 본전도 못 찾으면서 참 학습 없이 꾸준했다. 텔리야가 익숙하게 거튼을 구박하고 엘리사는 여전히 황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곧 엘리사가 입매를 예쁘게 늘려 웃었다.

“아무튼 좋아요. 구태여 저를 찾아오신 건 그만한 용건이 있어서겠죠. 이 자리에서 들으면 될까요?”

서두는 끝난 것 같으니 이만 용무를 꺼내 달라는 얘기였다. 메일은 옆을 돌아보았다. 황제, 텔리야, 슬슬 왜 함께 있는지 의아해지는 거튼. 약간 망설이다 메일이 이내 입을 열었다.

“저…… 가능하면 엘리사와 단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괜찮을까요?”

실컷 도움을 받아놓고 막상 중요할 때 내쫓는 꼴이라 메일의 요청은 조심스러웠다. 물론 이 중 그것을 안 된다고 거절할 사람은 없었다.

거튼이야 애초 발언권이 없으니 차치하고, 텔리야는 나무 요정님의 말이라면 이미 뭐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건 황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순순히 그러라 허락한 뒤 자리를 비우기 직전 당부 하나를 남겼다.

“위험할 것 같으면 문을 두드리거나 소리를 쳐. 부수고라도 들어갈 테니.”

걱정이 담긴 낮은 속삭임은 은연중에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테라스의 문이 닫힌 후 메일은 공연히 귓가를 살짝 매만졌다. 엘리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 짓도 안 해요. 나도 목숨이 소중한 사람인걸.”

“엘리사.”

메일의 목소리는 작았다. 방음이 되는 건 알지만 완벽하지 않으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잡음이 섞이면 들리지 않을 크기라 엘리사는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찾아들었다.

단어를 몇 개 골라 질문을 정리한 메일이 이내 말을 꺼냈다.

“돌려 말하거나 서론을 붙이지는 않을게요. 묻고 싶은 게 있어요.”

“…….”

“세간에 알려진 사실과 다른 내용을 알고 있다고 들었어요. 현 황제폐하의 생모인 세 번째 대비, 그분의 죽음에 대해서.”

엘리사의 눈이 살짝 커졌다. 메일의 질문이 예상했던 범위를 벗어난 모양이었다. 그녀는 한 손은 손바닥을 보이며 앞으로 뻗은 뒤 다른 손으로는 제 미간을 꾹 눌렀다. 그러곤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아, 거튼 이 새끼.”

“…….”

당사자 없다고 막말이 쉽게도 나왔다. 본래 없는 데선 나라님 욕도 한다지만 그래도 맞은편에 귀가 멀쩡한 청자가 있는 마당에 퍽 대담한 언사이기는 했다. 메일이 황당한 기색을 내비치자 엘리사가 손을 내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거튼 그놈의 가벼운 입을 생각하니 혈압이 올라서요. 잠시 진정 좀 시키느라고. 후, 정작 중요한 건 시원찮던 게 주둥이 하나는 아주 상공을 노니네.”

메일은 침음을 삼켰다. 뭐가 시원찮은지 알 것 같은데 알고 싶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거튼에 대해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된 메일이 그걸 털어내듯 고개를 흔든 다음 입을 열었다.

“부정하지는 않는군요.”

“해서 뭐 할까요? 문 너머에 있긴 하지만 들은 놈이 함께 와 있는 마당에 말이에요. 흐응, 이런 경우를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그때는 하필 너무 기뻐서.”

“…….”

“저한테 그 얘길 들은 건 거튼 멀그므뿐이에요. 사실 그것도 실수였죠. 다른 때라면 그리 경솔하게 말을 흘리진 않았을 텐데, 그날이 하필이면 제가 마담한테 진 빌어먹을 빚을 다 갚은 날이었거든요. 내 최고의 날에 취향인 미남까지 낚아놓고 나니 머리가 어떻게 됐었던 거지.”

엘리사는 그렇게 말하고선 고개를 확 꺾었다. 단순히 별을 보는 것 같기도, 뭔가를 떠올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내 시선을 되돌린 그녀가 빙긋 웃었다.

“미안해요.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닐 텐데. 알고 싶으신 걸 말씀드릴게요. 하지만 그 전에.”

한 템포 쉰 엘리사가 말을 이었다.

“왜 그에 대해 알고 싶으신 건가요?”

이유를 요구한다. 거튼이라면 이때 어떻게 나왔을까. 건방지다며 노발대발 난리를 쳤겠지. 확실히 엘리사의 태도는 귀족을 앞에 둔 것치곤 지나치게 대담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메일은 신분을 상기시켜 상대를 겁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게 통하는 유형도 아니야.’

길지 않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파악했다. 엘리사는 본인이 내켜야만 움직이는 인물이었다. 동하지 않으면 목에 칼을 들이밀고 물어도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메일은 부디 골머리를 앓아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길 바라며 답을 꺼냈다.

“나는 누군가를 돕고 싶어요. 정확히는 구하고 싶죠.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엘리사가 알고 있는 내용이 필요해요.”

“…….”

“그게 전부예요.”

메일은 내심 조마조마했다. 이건 그녀가 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답이었다. 이걸 듣고도 엘리사가 비협조적으로 군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강압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 성공률은 둘째 치고 그건 역시 내키지 않았다.

다행히 엘리사는 메일의 대답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다홍색 눈을 약간 빠르게 깜박인 그녀가 한 걸음 움직여 간격을 좁혔다. 이어 도톰한 입술이 열렸다.

“재미있는 분이네요, 당신. 결코 낮은 신분으론 보이지 않는데 나를 존중해 주고 있잖아요. 사실 난 뺨을 맞을 것도 각오하고 물은 거였는데.”

엘리사는 그리 말하곤 후후 웃었다. 동쪽 환락가 제일의 작부라는 미녀의 웃음은 꽤나 매력적이라 메일 또한 찰나 주의를 빼앗기고 말았을 정도였다.

염료로 물들인 어색한 흑발이 연풍을 타고 몇 가닥 날렸다. 엘리사는 그것을 한 손으로 그러모아 정돈하며 이야기의 서두를 뗐다.

“언제더라. 작년쯤인가. 예약도 없이 가게를 찾아왔는데 운 좋게 저를 지명했던 손님이 있었어요. 마침 예약자 쪽에 사정이 생겨 공교롭게도 제 일정에 공백이 생긴 날이었죠. 다시 생각해도 참 운이 좋아.”

그녀는 기억을 더듬듯 손가락 끝으로 턱을 매만졌다. 말을 잇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 귀족입네’ 하던 양반이었어요. 외양은 평범했죠. 당연하지만 남자였고, 나이는 아마도 중년. 그리고 꽤나 초행인 티를 냈어요.”

“…….”

“가게도 가게지만, 특히 제국에 초행인 티가 심했죠.”

“네?”

경청하던 메일이 반응했다. 유의미하면서도 당혹스러운 정보가 있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님을 알려주듯 엘리사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제국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 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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