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애마저 저를 냉대하시는 겁니까? 텔리야시 님이야 처음부터 저를 찬밥 취급하셨다지만…….”
“어머나, 커튼 씨. 말은 바로 해야죠. 제가 언제 커튼 씨를 찬밥 취급했죠? 찬밥이 아니라 쉰밥쯤 되겠네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텔리야가 거튼의 말을 지적했다. 그녀는 냉정하게 정정해 준 뒤 메일의 곁으로 이동했다. 저와 달리 제재받지 않는 모습에 거튼이 억울한 심경을 내비쳤다.
“차별은 옳지 못한 거라고 배웠습니다.”
“이건 구별이에요. 아니면 도와드릴까? 지금 여기서 성별을 바꾸면 커튼 씨도 나무 요정님의 곁으로 올 수 있어요.”
“예? 성별을 어떻게…… 아니, 아닙니다. 상상했어요. 꿈에 나올 것 같아. 으윽.”
“그런데 두 분, 뭘 하고 계셨던 건가요?”
메일은 티격태격(?)하는 둘을 차례로 쳐다본 뒤 물었다. 조금 전까지 거튼과 텔리야가 자아냈던 합작은 확실히 범상한 장면은 아니었다.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남자와 그런 남자를 발로 떼어내는 여자라니. 그것도 구경꾼에게 둘러싸여서 말이다.
답변은 텔리야에게서 나왔다. 그녀는 별반 대수롭지 않은 사정이라는 듯 담담했다.
“제가 빼앗기에서 졌어요. 그런데 커튼 씨가 그걸 인정을 안 하네. 저기요, 왜 댁의 파트너에게로 안 가시나요? 파트너분 토라지겠어요.”
“일부러 지신 거잖습니까! 너무해요! 이 더하기 이가 어떻게 삼입니까?”
“계산 실수였어요.”
“거짓말!”
“아, 끈질겨.”
“크흑, 버리지 마세요. 제 파트너는 텔리야시 님뿐입니다.”
텔리야가 그에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혐오도 아니고 극도로 혐오. 거튼은 그새 익숙해졌는지 상처받는 기미가 없었다.
텔리야는 메일을 위해 좀 더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알고 보니 빼앗기에서 절 이긴 도전자가 커튼 씨와 안면이 있는 사이더라고요. 과거의 악연이라나? 이대로 그녀의 파트너가 되었다간 이런 짓 저런 짓,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짓을 당할 게 뻔해서 그게 너무 무섭다며 지금 이러고 있는 거랍니다.”
“살려 주세요…… 흑흑. 그간 쌓인 정을 생각해서라도.”
“어머, 그런 걸 쌓은 기억은 없는데요.”
텔리야의 태도는 한결같아도 너무 한결같아서 거튼은 또 매달리자마자 버림받았다. 그는 결국 불가능한 공략을 포기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차순위 구세주를 응시했다. 시선을 받은 메일이 난감하게 웃었다.
“그렇게 쳐다보셔도.”
“메리 영애…….”
“왜 이자와 동행하는 거지?”
그때까지 가만 거튼을 막아서고 있던 황제가 불쑥 입을 열었다. 대단히 못마땅하다는 투였다. 표정은 보이지 않아도 목소리만으로도 거튼이 싫어 죽겠다는 의사가 충분히 전해진다. 텔리야가 그에 유대감을 느꼈다. 어머, 동지.
“저는 막중한 임무를 지고 있습니다. 엘리사를 찾아야 한다구요. 제가 이 중에서 엘리사의 외모에 대해 가장 잘 압니다.”
저한테 물은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제 얘기니 거튼이 대답했다. 작부에 빠삭하다는 건 자랑으로 삼기엔 너무 구렸으나 이 순간에서만큼은 구원 줄이었다. 그는 열심히 제 쓸모를 피력했다.
“엘리사를 만나 본 건 저밖에 없잖습니까? 저는 엘리사가 가면을 쓰고 염색을 하고 있어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목소리도 기억하는데다, 특히 가슴이…….”
“거기까지. 더러운 주장 잘 들었어요. 어떡할까요, 나무 요정님?”
메일의 귀가 더럽혀지는 걸 원치 않은 텔리야가 거튼의 말을 끊었다. 강약약강 거튼이 얌전히 입을 다물고 결정권은 메일에게로 넘어왔다. 어쩌다 거튼의 처우에 대한 권한을 쥐게 된 메일이 난처한 낯으로 고민했다.
“지금 그러니까…… 거튼 씨와 계속 동반하느냐 아니냐가 쟁점인 거죠? 그를 텔리야시 양으로부터 빼앗기에 성공한 도전자에게 넘겨 줄 것인가, 말 것인가.”
“말 것인가! 저는 무조건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허, 조용.”
“반은 어떻게 생각해요?”
메일은 황제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그건 곤란한 결정을 떠맡긴다기보단 그의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의미가 강했다.
로하이덴은 메일의 배려를 읽곤 그녀를 응시했다. 속내를 밝힐 것 같으면 고를 것도 없이 당연히 아니오였지만, 상대가 마음을 써주었으니 그 또한 그에 화답해야 했다. 그는 본심을 누르고 냉정하게 셈했다.
“엘리사라는 작부를 찾는 일이 많이 중요한가?”
“네. 저한테는요.”
“그럼 동행하지.”
대신 메일의 반경 얼마 이내로는 접근할 수 없다. 로하이덴은 조건을 달고 개자식의 동반을 허용했다. 거튼이 쌍수를 들었다.
“현명하신 선택이십니다!”
텔리야는 황제의 허락에 내심 놀랐다. 그도 그럴 게 그는 지금 눈빛만 봐도 거튼을 당장 잘게 다져 내쫓아버리고 싶어 하는 의지가 충만하게 읽혔다. 아주 끓는 물처럼 넘실거린다.
한데 저걸 참고 상대를 위해 다른 결정을 내리다니. 원래 저런 분이었던가.
‘오라버니보다 한참 앞서계시는구나. 한 만 걸음쯤.’
알아내려 애쓰지 않아도 보였다. 황제는 이미 사랑에 빠져 있었다. 더할 수 없을 만큼. 남은 건 반테르뿐이었다. 전에는 비슷하게 갈 길이 멀었던 것 같은데 언제 저리 추월당했을까.
텔리야는 이러다 정말로 애정이 뭔지도 모르고 관에 들어가게 될 것 같은 제 혈육을 잠시 걱정했다. 그리 틈새 걱정을 마치고 메일을 돌아본다.
“좋아요. 그럼 도전자에게 다시 빼앗기를 신청해서 쉰밥의 파트너 자격을 되찾아올게요. 잠시만 계세요.”
“잠깐만요? 왜 제 명칭이 커튼보다 더 심한 걸로 바뀐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잘못 들은 거겠죠?”
텔리야는 대꾸 않고 도전자에게로 향했다. 거튼이 그런 텔리야를 어미닭을 쫓는 병아리처럼 졸졸 뒤따랐다. 황제는 멀어지는 둘을 지나가듯 쳐다본 뒤 시선을 거뒀다. 그가 거튼의 존재를 인내한 것은 오로지 메일 때문이었다. 메일이 엘리사를 찾고 싶어 하니까.
‘왜 찾으려는 걸까.’
황제는 메일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그녀는 막 시작을 앞둔 텔리야의 빼앗기에 주의를 쏟고 있었다. 새하얀 나비가면, 그 아래 살짝 드러난 코끝. 이어서 매끈하게 선을 그리는 인중, 입술. 끝이 섬세하게 둥근 턱선. 그리고 얼핏 가녀려 보이는 목.
하나하나 새기듯 눈에 담던 황제는 메일이 슬쩍 그를 쳐다보는 순간 깜짝 놀라서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훔쳐보다 들킨 사람처럼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아니, 처럼이 아닌가.
“반.”
“……왜 부르지?”
“후작 부인이 이겼어요.”
“뭐?”
황제는 메일이 바라보던 방향으로 시선을 주었다. 뭘 했는지 그새 승리한 걸로 추정되는 텔리야가 기뻐 날뛰는 거튼을 매단 채 돌아오고 있었다. 벌써?
“아아, 이렇게 찝찝한 승리라니.”
“고생했어요. 그런데 무슨 종목으로 경합한 건가요?”
텔리야의 낯엔 근심이 가득했다. 이겨놓고 웬 근심인고 하니 거튼 따위(?)를 탈환했다는 현실이 심란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치유하듯 메일에게 바짝 달라붙어 물음에 답했다.
“눈싸움을 하자더라구요.”
“눈싸움이요?”
“서로 마주 본 채로 먼저 눈을 깜박이는 사람이 지는 거죠. 그래서 시작하자마자 마법을 써서 눈을 감게 했어요.”
“……아하.”
빠른 승리의 비결은 마법이었다. 편법이지만 반칙은 아닌 것이 모호했다. 상대는 왜 제가 그리 허망하게 패했는지 앞으로도 이유를 알지 못할 것이다. 텔리야는 이기긴 이겼지만 보상이 저딴 거(?)라서 이쪽도 상처뿐인 승리라며 덧붙였다.
“아무튼 되찾아왔으니 얼마나 쓸모를 다하는지 볼까요?”
거튼을 포함한 네 사람은 그렇게 2층을 누비기 시작했다. 목적은 여상했다. 엘리사 찾기. 짝짝이 다니느니 차라리 뭉쳐 다녔으면 좋겠다는 텔리야의 주장에 따라 넷은 떨어지지 않고 다 같이 움직였다.
메일은 좌 텔리야 우 황제를 두고 걸으며 리엘라가 혹시 이런 기분이었을지 잠깐 생각해 보았다.
2층은 1층에 비해 넓지 않았다. 탐색은 금방 끝났다. 팔짱을 낀 텔리야가 미간을 꾹 눌렀다.
“왜 없죠?”
테라스는 물론이고 홀 안까지 쥐 잡듯이 뒤졌다. 결과는 허탕이었다. 3층은 이미 텔리야가 살펴보았으며 이 저택은 3층이 끝이다. 실컷 쓸모를 주장하더니 무효용인 거튼을 보며 텔리야가 살벌하게 묻자 당황한 거튼이 눈동자를 굴렸다.
“저도 잘 모르…….”
“왜 모르죠?”
“살려 주세요.”
일단 빌고 보는 거튼과 그런 그를 조질 모양인지 손목을 우드득 꺾는 텔리야를 뒤로하고 메일이 연회장 전체를 시야에 담았다.
화려한 드레스. 색색의 눈동자와 머리카락. 모발은 염색이나 가발로 가릴 수 있으니 눈동자를 위주로 확인했다.
그러나 번번이 조건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눈 색만 비슷할 뿐 턱이 각지거나, 피부가 검거나, 입술이 얇거나 등 이유는 각양각색이었다.
‘손가락의 특징도 안 맞고.’
왼손 중지와 약지의 길이가 같다고 했었지. 메일은 그걸 기억해서 항상 대상의 손을 먼저 관찰했다. 하나 수확은 없었다. 엘리사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다른 사람을 붙잡고 물어봐도 모른다는 답뿐이고. 생각보다 더 까다롭네요.”
화풀이 삼아 거튼을 족친 텔리야가 양손을 탁탁 털며 메일에게 다가왔다. 메일은 고개를 짧게 끄덕여 의견에 동의했다.
‘설마 정말 1층에 있는 걸까?’
재수 없는 가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운 나쁘게 사실일 수도 있었다. 메일이 난간을 짚고 끙 앓았다. 텔리야가 곁에서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제 감도 영 무뎌진 것 같아요. 분명 3층이 예감이 좋았는데. 하아, 설마 미녀를 찾는 일에 이 내가 도움이 안 될 줄이야.”
힘 빠진 목소리에선 진심이 묻어났다. 어떻게 자신이 미녀를 찾지 못할 수가 있냐는 한탄. 메일 또한 그런 부분에 어느 정도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 뭐라 해줄 말이 없었다. 그때 황제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데.”
“네?”
“왜 엘리사를 찾는 거지?”
일행 중 그가 처음으로 목적을 물었다. 텔리야는 알려줄 수 없다는 말을 사전에 미리 듣고 파티에 합류한 것이라 여태 그 주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메일은 황제의 질문에 조금 곤란한 기색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말해도 될까?’
갈등은 짧게 끝났다. 결론은 아니. 아직은 아니었다. 지금은 단순히 제 꿈과 감에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상태다. 보다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나면 그때 이야기해도 늦지 않다. 결정한 메일이 눈을 들어 올렸다.
“나중에…… 말씀드려도 될까요? 조금 더 이후에.”
물음에 대한 답으로 나중을 기약하는 건 실상 그리 좋은 답변은 아니다. 하나 최악의 답 베스트 ‘몰라도 돼’, ‘알아서 뭐 하게’, ‘알 필요 없어’보다는 당연하지만 훨씬 나았다. 최악까지 각오하고 있었던 황제가 내심 마음을 놓았다.
“얼마든지.”
안도한 그가 옅게 웃었다. 스치듯 지나간 미소라 알아챈 사람은 없었다. 황제는 곧 이어서 말했다. 이제 엘리사를 찾으러 가자고.
여태 실컷 찾아다녀놓고 ‘이제’라는 부사가 붙는 것이 어딘지 어색했다. 이번에야말로 허탕을 피하자는 의미일까. 메일은 그렇게 생각하다 문득 묘한 사실을 감지했다. 황제의 목소리에는 막연함이 없었다.
“……어디로요?”
“3층.”
망설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정말로 엘리사와 대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