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 텔리야시 님!”
거튼이 얼마나 놀랐는지 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듣기 거북했다. 귀를 막은 텔리야가 덧붙였다.
“어머, 졌네. 틀렸으니까 진 거 맞죠? 그럼 이제 파트너를 빼앗겨야겠네. 자, 가져가세요.”
“버리지 말아주세요!”
“누구시죠? 전 당신 같은 사람 모르는데. 어서 본인의 파트너에게 가도록 해요.”
거튼은 3초 만에 버림받았다. 빼앗기가 이렇게 빨리 끝난 건 해당 전통(?)이 생겨난 이후 처음이었다. 텔리야의 거친 냉대와 거튼의 불안한 매달림과 그걸 지켜보는 여인.
2층에서는 그렇게 웃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구경하던 누군가가 자기도 모르게 주전부리를 찾았다.
다시 1층으로 돌아와서. 로하이덴은 난생처음이라고 봐도 좋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연달아 다섯 명을 물리치고도 숨 하나 가빠지지 않은 메일이 곧 태연하게 여섯 번째 승리를 선언했다.
“제가 이겼네요. 다음분?”
“어떻게 이럴 수가!”
여섯 번째 도전자가 도저히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기색으로 기함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졌으면 진 거지. 메일은 냉정하게 그녀를 외면했고 패배한 도전자는 곧 다음 사람에게 밀려 구석으로 사라졌다. 일곱 번째 도전자는 사뭇 비장한 얼굴이었다.
“당신 뭐지? 나기 전부터 식물도감으로 태교하고 난 이후로는 밥 먹고 식물도감만 읽었나?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이야.”
“칭찬 고마워요.”
“후, 여유가 만만하군. 그래도 난 꽤 다를 거야. 이래 봬도 아카데미 시절에 교양 식물학 성적이 꽤 좋은 편이었거든. 내가 당신을 꺾어주겠어.”
“그러세요. 먼저 시작하실 거죠?”
패기 넘치게 선언한 일곱 번째 도전자는 말뿐이 아닌지 확실히 달랐다. 그녀는 앞서 다른 이들보다 퍽 오래 버텼다.
하나 그게 끝이었다. 버티기는 길게 버텼으나 결과는 같았다. 마찬가지로 패배의 쓴잔을 마친 일곱 번째 도전자가 이내 영혼을 털린 낯으로 터덜터덜 퇴장했다.
웅성거림이 커졌다. 첫 대결을 시작할 때만 해도 소곤거림 정도였던 주변의 소란은 이제 대놓고 시끌벅적한 수준이 되었다.
메일은 그 와중에 여덟 번째 도전자를 호명했다. 이번에는 바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으로 도전에 공백이 생겼다.
로하이덴은 그 광경을 가만 보다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감쌌다. 입가를 가린다.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표정이 그의 낯 전체를 물들였다.
‘미치겠군.’
그는 지금 보호를 받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메일에게 말이다. 분명 그녀를 지켜주러 왔는데 도리어 그녀가 몸 던져 황제를 수호하고 있다.
로하이덴은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지 않고 메일을 응시했다. 그녀가 앞을 가리고 막아선 터라 그의 눈에 들어오는 건 흑갈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동그란 뒤통수뿐이었다.
그는 그것을 가만히 시야에 담았다. 말없이 응시한다. 만지고 싶은 충동은 온 이성을 동원해 내리눌렀다.
로하이덴은 실감했다.
‘이젠 정말 구제불능이 됐어.’
그는 입가를 허물어뜨렸다. 가면이 없었다면 꽤나 봐줄 만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황제는 고개를 숙여 손으로 가면까지 감쌌다.
사람에게 반하는 순간이 있다. 옷자락을 잔뜩 스민 가랑비를 뒤늦게 발견할 때 말고, 갑자기 머리 위로 쏟아진 소나기에 깜짝 놀라 하늘을 볼 때. 로하이덴은 그 시점이 지금이었다. 황당하게도 다시 반하고 말았다. 지금 여기서. 메일에게.
‘고문 같군.’
허락되지 않는 달콤함은 고통으로 치환된다. 억지로 취할 수도 없으니 그 달콤함은 농도가 짙어질수록 통증만을 키울 뿐이었다. 이 이상 아플 일은 없을 거라 여겼는데. 황제는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인정했다. 마음은 더 깊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더 괴로워질 수도.
그는 눈가를 찡그렸다가, 눈을 감았다 뜨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도로 폈다. 황제는 사실 고통을 인내하고 가리는 것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육체가 아니라 마음이 이만큼 아파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생소하고 생경하나 곧 이것 또한 견딜 수 있게 될 것이다. 비록 여태 감내해 온 그 어떤 통증보다 크다고 하더라도.
제가 자초했으니 누굴 원망할 것인가. 한 사람에게 두 번 반한 미련한 남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머뭇거리며 나선 여덟 번째 도전자 또한 메일에게 참패했다.
그 이후로는 소강이 찾아들었다. 결국 이길 수 없는 대결이라는 걸 깨달은 듯 분위기가 잠잠해졌다. 메일은 기다려도 다음 도전자가 나타나지 않자 후, 길게 숨을 내쉬었다. 긴장을 덜어 내보내는 것 같은 한숨이었다.
곧 그녀는 몸을 돌렸다. 황제를 올려다보며 웃는다.
“이겼어요.”
지켜주겠다던 다짐을 무사히 완수했다. 메일은 뿌듯한 눈치였다. 황제는 오랜만에 상대의 눈부신 미소와 마주쳤다.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 이래서 다행이었다.
맨 얼굴로 저를 보며 그렇게 웃었다면 그는 차마 손을 뻗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간신히 이성을 붙잡고 평정을 가장했다. 겨우 초연한 척 응수한다.
“활약이 대단하더군.”
“박수를 받을 만큼이요?”
“충분히.”
“이 정도야 뭐, 당연한 결과인걸요. 흠흠. 그럼 이제 2층으로 올라가요.”
메일은 약간 작위적으로 눈을 돌린 후 계단에 올랐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어색함이 티 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의식을 하고 시선을 주어도 자꾸만 입술을 보게 되어 통 난감한 기분이었다.
그럴 때마다 심장은 또 얌전히 있어주지도 않았다. 그녀는 가면이 상기된 제 낯을 가려주리라 믿으며 층계를 밟았다.
2층은 1층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마찬가지로 소란스러운 편이었다. 메일은 2층에 도착하자마자 사람이 한군데 몰려 있는 것을 목격하곤 그리로 눈길을 주었다. 구경꾼은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엘리사?’
잠깐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젓는다. 그렇게 운이 좋을 거였으면 1층에서 진작 찾았겠지. 근거 없는 낙관은 괜한 실망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았다. 메일은 기대를 버리고 동행인을 이끌었다.
“참, 제가 엘리사의 외양에 대해 말씀드린 적 없죠? 우선 다홍색 눈동자에…….”
“살려 주세요!”
“탁한 은발…… 응?”
메일의 주의가 자연히 특정한 곳으로 옮겨갔다. 그건 단순히 구조 요청을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어라, 혹시.
“어떻게 저를 그렇게 쉽게 버리실 수가 있죠? 우리가 고작 그런 사이였나요? 예? 여기까지 함께 온 의리가 있는데!”
“놓고 말해요. 집에 가면 드레스부터 버려야겠네.”
“결론은 그러니까 저 좀 살려 주세요!”
“……커튼 씨?”
동그랗게 모인 군중이 뭘 구경 중인가 했더니, 원 가운데에는 다름 아닌 거튼과 텔리야가 있었다. 바짓가랑이, 아니, 드레스 밑단을 붙잡고 늘어지는 거튼을 구두 굽으로 매정하게 밀어내던 텔리야가 메일을 발견했다.
“어머, 나무 요정님.”
발견은 이어 한 번 더 뒤따랐다. 눈치 빠른 텔리야는 메일의 옆자리를 지키고 선 남자가 누구인지 시야에 담자마자 알아챘다. 결국 오셨구나. 역시.
“텔리야시 양.”
저를 부른 것에 화답하듯 메일 또한 텔리야의 파티용 가명을 입에 올렸다. 황제가 옆에서 듣고는 반응했다.
“텔리야시?”
본명인 듯 본명 아닌 애매하고도 우스꽝스러운 그 명칭은 뭐냐는 눈치였다. 메일이 설명해 주었다.
“이곳에서 쓰는 가명이에요. 입구에서 갑자기 요구하는 걸 즉석으로 짓다 보니 어쩌다.”
“아아. 아까 이야기했던 메리도 그 말이었군.”
“조금 성의 없죠? 어차피 여기서만 부를 거니까…… 어, 그러고 보니 반도 들어오면서 이름을 적지 않았나요?”
입구에 서 있었던 안경을 쓴 남자는 잠깐 마주쳤으나 은근히 깐깐해 보였다. 그때 받은 인상이 틀리지 않았다면 아마 저택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마다 칼같이 붙잡고 이름을 물었을 것 같은데. 황제가 담담히 대답했다.
“본명을 댔지.”
“네?”
“성은 붙이지 않고 이름만 떼서.”
로하이덴은 기억을 떠올렸다.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귀찮아서 그랬다. 들키지 않게 메일을 미행하는 것만으로도 바쁜데 가명 따위를 생각하느라 심력을 쏟으려니 영 성가셨다. 그래서 그냥.
메일은 황당히 눈을 깜박이다 물었다.
“……뭐라던가요?”
“나보고 배짱이 좋다더군.”
“푸핫.”
순간 웃음이 터져서 메일은 입을 가렸다. 본명을 알려주었더니 배짱이 좋다는 평가라니. 하기야 누가 감히 황제가 이곳을 방문했다고 생각할까. 어딜 봐도 사칭처럼 들리기는 했다.
메일은 입구에서 담대한 사칭범으로 취급받았을 황제를 상상하곤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며 웃고 말았다. 예상치 못했는지 로하이덴이 당황했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나?”
“조금요. 본인이 본인의 사칭범이 됐다는 게 왠지.”
“……겨우 그걸로.”
“내가 반이었다면 스스로 생각해도 웃길 것 같은데. 반은 아닌가 봐요?”
메일은 약간 놀리듯 말했다. 황제는 그에 빤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책망을 하려는 건 아니고, 뭐랄까. 그는 어딘지 안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를 대하는 게 편해졌군.”
마치 지금은 되돌릴 수 없는 이전의 어느 때처럼 말이다.
황제의 목소리는 혼잣말을 하듯 작았으나 간격이 가까워 메일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메일은 잠시 말을 아끼고 그에 대해 생각했다.
황제의 말이 맞다. 그녀는 상대를 미리 밀어내는 것을 포기한 뒤로 조금씩 그를 전처럼 대하고 있었다. 다만 고작 그런 사실 하나에 안심하고 기뻐하는 상대의 태도가 가슴을 아릿하게 할 뿐이었다.
“헉! 비제…… 아니, 메리 영애!”
그때 거튼이 뒤늦게 메일을 발견하곤 냅다 외쳤다. 무시할 만한 크기가 아니라서 메일은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참, 그러고 보니. 저 둘은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커튼 씨, 거기서 뭐 하세요?”
“영애. 크흡.”
그는 매달리듯 쥐고 있던 텔리야의 드레스 자락을 놓고는 메일에게로 다가왔다. 물론 로하이덴이 가로막았기에 일정 이상 접근할 수는 없었다.
거튼은 지각 능력이 부족한 모양인지 그제야 황제의 존재를 인지하고는 눈을 끔벅였다.
“……어라? 누구시죠?”
“그쪽이 방금 허락 없이 접근하려던 사람의 파트너.”
“어? 언제 파트너를 만드셨어요?”
거튼은 놀란 눈으로 로하이덴과 메일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황제라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메일이 답해 주었다.
“조금 전에요.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 거기 서서 얘기해 주세요. 더 다가오지는 마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