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다 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답답하시잖아요.”
황제는 잠시 후 가발을 벗고 대신 모자를 눌러썼다. 일일이 머리카락을 정돈해야 하는 가발에 비해 모자는 착용이 퍽 수월했다. 메일은 허공을 배회하던 눈을 도로 들어 상대를 짧게 탐색했다.
‘……이건 안 되겠다.’
결론은 빠르게 났다. 보통 어두운색의 모자를 눌러쓰면 음침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걸 노리고 구해 온 건데 황제가 쓰자 당황스럽게도 전혀 다른 효과가 탄생했다.
얼굴에 진 그림자마저 잘생길 건 대체 뭐란 말인가. 메일은 양손을 교차해 엑스 자를 만든 뒤 다시 가발을 가리켰다.
“가발이 낫겠어요.”
“가려지는 면적은 모자가 더 넓지 않나?”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가발이 더 나아요.”
세상에는 가렸는데 잘생김이 심화되는 사람도 있다. 메일은 그걸 오늘 알았다. 미스터리였다.
그렇게 황제는 최종적으로 가발을 써서 용모를 일부 감췄다. 가발이라고 그의 외모를 완벽히 차단해 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본래의 백금발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메일은 조금이나마 덜 눈부셔진 황제와 함께 테라스를 나왔다.
그녀가 황제와 동반하기로 마음먹은 건 한 가지 심경의 변화 때문이었다. 메일은 조금 전 단념했다.
뭘? 그의 마음을 모른 척하는 것을.
착각을 사실인 것처럼 오해하게 두고,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일부러 상대를 보지 않았다. 그렇게 밀어내고 외면하며 눈을 감았다.
왜 그랬나? 그러는 편이 서로에게 옳다는 핑계를 댔지만, 실은 그건 일종의 회피성 방어였다.
어차피 고국으로 돌아가고 나면 볼 수 없는 사람이다.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렇다면 제국을 떠날 때 조금이라도 덜 아프고 싶었다.
계속 그를 보고, 마주치고, 그가 주는 호의를 받다가 갑작스레 헤어지게 되면 그건 너무, 지나치게 아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미리 벽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건 결국 서로를 지속적으로 상처 입히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적어도 황제가 메일의 일에 무심하게 굴지 못하는 한은 말이다.
메일은 그가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곳에서 깨달았다. 어떤 말로 밀어내도 여전히 저를 걱정하고, 위하고, 보호하려 들 것이다.
간절함이 섞인 호소는 외려 강압적인 구속보다 강력했다. 메일은 차마 그것을 뿌리칠 수 없었다. 제 사람이 되어 곁에 머무르라는 들어줄 수 없는 요구가 아니다.
단지 도움이라도 줄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마냥 조심스럽고 그저 애탄 소원이었다. 그녀는 결국 두르고 있던 방어를 무너뜨렸다. 그마저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래, 그냥 나중에 실컷 아프고 말자.’
아프면 뭐 어떤가. 설마 죽기야 할까. 자포자기와 낙관의 중간쯤, 그 가운데 서서 메일은 훗날의 고통을 각오했다. 각오하고 나니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저 사람.”
“맞지? 머리는 달라졌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 시작하자 주변에서 소요가 일었다. 메일은 제게 보폭을 맞춰주는 상대의 사소한 배려에 잠깐 정신이 팔려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아직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는 황제의 얼굴-입술-대신 애꿎은 어깨 어림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엘리사는…… 우선 2층에서부터 찾기 시작할게요. 1층은 제가 거의 다 둘러봤으니까요.”
“그러지.”
함께 찾아볼 첫 번째 탐색지는 바로 위층이었다. 물론 메일이 테라스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엘리사가 위에서 1층으로 내려왔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가정이라 메일은 부디 그것만은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계단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부지런했으나 조급하지는 않았다. 가까워지는 계단에 시선을 둔 메일이 바라듯 말했다.
“빨리 찾았으면 좋겠어요. 그렇죠?”
“…….”
황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와 ‘아니’가 속에서 서로 부딪혔다.
이런 곳에 메일을 한시도 더 놔두고 싶지 않다는 이성과 그러면서도 지금처럼 함께 다니는 시간이 가능한 길었으면 하는 모순된 욕심이 어느 쪽도 지지 않고 팽팽했다. 승부가 나지 않으니 답을 고르는 시간만 길어진다. 그때였다.
“저기?”
낯선 목소리가 둘을 불렀다. 높고 카랑카랑했다. 먼저 돌아본 것은 메일이었다.
“반가워요. 그러니까, 두 분 서로 파트너죠? 맞나요?”
눈만 달려 있어도 알 수 있을 법한 것을 묻는 음성에서는 딱히 궁금증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몰라서 물어보는 것은 아니란 소리다. 메일은 우선 고갯짓으로 긍정한 뒤 되물었다.
“용건이 있으신가요?”
“그럼요.”
“어떤…….”
“당신의 파트너가 탐이 나서요.”
“……네?”
메일은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건 황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둘은 서로 황당한 시선을 교환함으로써 각자가 들은 것이 환청이 아님을 확인했다. 메일이 굳이 느낀 바를 감추지 않으며 응수했다.
“그래서요?”
“저 주세요.”
“……?”
가발인지 제 머리인지 모를 적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인이 가면을 쓴 채로 생긋 웃었다. 너무 당당하니 외려 화를 내거나 면박을 줄 마음도 들지 않는다. 메일은 이곳이 참 적응하기 힘든 장소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싫은데요.”
거절은 칼같이. 파트너가 물건도 아닌데 뭘 주고 말고 하느냐는 설교는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다. 그런 걸 알아들을 상대였으면 애초에 저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테니까.
여인은 메일의 단호박 같은 응수에도 여상히 미소를 고수했다. 그녀는 오히려 예상한 답이라는 듯 굴었다.
“그야 당연히 싫으시겠죠. 하지만 전 이미 요청했다구요?”
“네? 그게 무슨 뜻…….”
“종목은 그쪽이 고르세요. 뭐든 내가 자신 있는 게 나왔으면 좋겠는데.”
여인의 말은 길어질수록 수수께끼 같았다. 아니, 다짜고짜 저건 또 뭔 소리야. 도통 알아듣기 힘든 말에 메일이 상대에게 보다 친절하고 상세한 설명을 요구하려던 차였다. 순간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쪽은 혹시 파트너가 없나요?’
‘있었지. 조금 전에 빼앗겼지만.’
1층의 마지막 테라스. 그곳에서 웬 남자와 나눴던 대화가 시기 좋게 수면 위로 부상했다. 메일은 그걸 상기하고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설마.
“혹시 지금…… 저랑 영애랑 대결을 하자는 건가요? 제 파트너를 걸고?”
“달리 뭐가 있겠어요?”
설마가 정답이 되는 순간이었다. 여인의 태도는 뻔뻔하고 능숙해서 그녀의 요구가 별달리 이례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맙소사. 메일은 일순 말문을 잃었다. 설마하니 그 ‘빼앗겼다’가 정말 단어 그대로의 의미였을 줄이야.
“얼른 종목을 골라줘요. 기다리기 애타니까.”
노골적인 눈빛으로 황제를 훑은 여인이 입술을 핥으며 채근했다. 메일은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일단 황제의 앞을 막았다. 왠지 위기를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황제의 위기. 넘겨주었다간 큰일이 날 것 같다.
“……받아들이지 않겠다면요? 제가 왜 굳이 파트너를 걸고 도박을 해야 하죠?”
“어머, 이렇게나 초행인 티를 내다니.”
여인이 짧게 혀를 찼다. 메일은 살다 살다 환락가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무시를 당한 건 처음이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와인처럼 어둡게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여인이 말을 이었다.
“‘빼앗기’에서 도전은 도전자의 권한이라구요. 도전을 받은 사람의 권한은 그 도전자를 어떤 방식으로 상대할지 정하는 거고요. 참고로 대결의 보상이 되는 파트너의 권한은 이 상황에선 전무하답니다. 원래 그래요.”
적당한 요약을 가미한 설명이 새빨간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빼앗기라니. 메일은 다시 말문을 잃었다. 지나치게 직관적인 건 둘째 치고 대체 얼마나 허다한 일이기에 따로 명칭까지 생겨났을 정도란 말인가. 더구나 룰도 존재한다.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알아들었죠? 자, 그럼 어서 정해요. 권한이 내게 있었다면 바로 춤을 골랐을 텐데.”
“……빼앗기에 순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죠? 룰을 어기고 제가 거절한다면?”
“그건 별로 추천하지 않아요. 파티에서 이만 퇴장할 생각이었다면 모를까.”
쫓겨난다는 말이었다. 메일은 침음을 삼켰다. 뭐 이런. 이곳이 결코 일반적인 장소가 아니라는 것은 앞서도 충분히 체감한 사실이지만, 이렇게 새로운 충격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또 몰랐다. 뺏고 빼앗기고. 파티가 아니라 무슨 야생인가.
“이런 데서 야생의 섭리를 체험하게 될 줄은…….”
“아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요? 오래 시간을 끄는 게 매너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죠?”
“좋아요. 대결해요.”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로마에 왔으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 목적을 이루지도 못 했는데 이대로 허무하게 파티에서 나갈 수는 없었다.
메일은 잠깐 뒤를 돌아봤다. 졸지에 보상으로 걸리게 된 황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메일.”
“여기서는 메리예요. 사실 저야 본명으로 불린대도 별로 상관없지만. 아무튼 폐…… 가 아니라 반.”
말실수를 할 뻔한 메일이 정정했다. 반가운-특히 황제의 입장에서-호칭을 도로 입에 담은 그녀가 다짐하듯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꼭 이겨서 지켜드릴게요.”
황제의 당황이 깊어졌다. 과연 이걸 기뻐해야 하는가. 전혀 생각지도 못 했던 흐름이라 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도 없었다. 메일은 다시 돌아서서 여인과 눈을 맞췄다.
“그럼 종목을 말씀드릴게요. 혹시 영애의 뒤를 이어 제게 도전하실 분이 있다면 지금 같이 들어주세요. 저는 쭉 이걸로 대결할 테니까.”
우선 선언한다. 다음 메일은 말을 이었다.
“제가 도전자분을 상대할 종목은 바로 끝말잇기예요. 단!”
한 박자 쉬고. 원래 이런 건 뒤에 따라붙는 말이 핵심이다. 녹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식물의 이름만 말할 수 있답니다.”
이른바 식물 끝말잇기. 패배를 용납하지 않겠다 결심한 정원 덕후의 표정은 진지했다. 연승의 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한편 같은 상황은 2층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텔리야는 옆에 거튼을 낀 채로 웬 곱슬머리의 여인과 대치했다. 입가의 점이 인상적인 여인이 호호 웃으며 말했다.
“어서 종목을 골라주세요. 후훗.”
여인은 사자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냐면 잡아먹힐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뜻이다. 거튼은 본능적으로 텔리야의 뒤에 바짝 숨었다. 자비 없는 텔리야가 그를 발로 밀어냈다.
“종목을 고르라고 했죠? 뭐든 상관없나요?”
“그래요. 무엇이든.”
여인의 노력한 목소리에선 자신감이 묻어났다. 이미 수차례 이런 대결에서 상대의 파트너를 빼앗아본 경험이 있는 모양이었다. 텔리야는 고민하지 않았다.
“사칙연산으로 해요. 한 자리 수 사칙연산.”
“……네?”
“서로 문제를 내고 맞히는 걸로. 자, 영애 먼저 시작. 얼른. 빨리.”
텔리야가 재촉했다. 생각지도 못 했던 종목에 당황한 여인은 독촉을 받자 저도 모르게 일단 입을 열었다. 얼결에 뱉은 거라 엄청 기본적인 문제가 튀어나왔다.
“이, 이 더하기 이는?”
텔리야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