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그것으로는 가려지지 않는 백금발이 눈부셨다. 남자와 저의 사이를 막아선 단단하고 넓은 등이 과거 언젠가의 향수를 끄집어내며 익숙하게 시야를 점령한다.
메일은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고 나서야 이게 환상도 아니고 꿈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왜 여기에!’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머리카락, 익숙한 뒷모습. 이게 착각일 리가 없다. 메일은 벌벌 떨고 있는 남자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당황해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황제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으나 보호하듯 그녀의 앞을 가리고 선 자세에서 그의 주의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놀라서, 당혹스러워서, 혹은 설레서. 요란한 고동은 한 가지 이유로 정의내리기에는 곤란할 만큼 복잡했다. 메일은 제 심장 소리를 들으며 상대의 찬란한 백금발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는 사이 황제가 남자의 손목을 붙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악, 으악, 남자가 연달아 비명을 질렀다. 어지간히 아픈지 새빨개진 얼굴로 외치는 비명이 크기도 했다. 황제는 남자가 어떻게 반항하고 버둥거리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악! 내 손목! 손목 부러지겠네, 악!”
남자의 비명은 제법 실감나고 우렁찼으나 남들이 듣기에는 다소 과장처럼 들렸다. 마치 자해공갈단의 입버릇처럼 말이다. 지나가다 몸을 살짝 부딪혀놓곤 아이고 어깨가, 아이고 심장이 하듯.
그러나 애석하게도 남자의 외침은 공갈이 아니었다. 엄살도 아니다. 여기서 전제가 되어주는 것은 황제의 악력이 보통 사람의 것과는 몹시 다르다는 사실이다.
황제는 마음만 먹으면 이대로 남자의 손목뼈를 가루처럼 부수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니 고작 부러뜨리는 것쯤이야.
남자는 제가 고래고래 외친 것처럼 정말로 손목이 부러지기 직전이었다. 지금 황제는 눈에 뵈는 게 없어서 봐준다거나 조절한다는 선택지가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대로 몇 초만 더 지났다면 남자의 손목뼈는 분명 처참히 으스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사이 메일이 황제를 부르지만 않았다면.
“……반.”
작은 소리였으나 황제에게는 천둥 같았다. 아무리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라도 절대 놓칠 수 없는 목소리나 단어쯤은 있게 마련이다. 황제의 동작이 정지했다. 손아귀에서도 힘이 빠져서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겨우 제 손목을 빼냈다.
메일이 침을 꿀꺽 삼켰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녀는 짧은 시간 남모르게 고민했다. 폐하? 당연히 안 된다. 선배님? 그 관계가 깨어진 게 언젠데 무슨. 로하이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저기요’나 ‘당신’ 이렇게는 부르고 싶지 않았다. 우습지만 그렇게나 타인처럼 굴기는 싫었다. 그래서 입에 담은 것이 저 이름이었다. 얼핏 듣기에는 흔하여 남들은 누구의 것인지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저만은 숨은 무게를 아는 그런.
황제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찌나 뻣뻣하게 움직이는지 끼긱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메일은 상대가 저를 응시하자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눈을 내렸다.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을 때는 이상하게 용기가 났는데 눈을 마주치니 왠지 제가 엄청나게 대담한 호칭을 입에 올린 것 같았다.
황제가 더듬 입을 열었다.
“……방금 나를.”
“이봐! 이게 무슨 짓이야?! 어?”
남자가 소리쳤다. 끼어드는 타이밍이 수준급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중요한 순간을 방해받은 듯한 기분에 황제가 미간을 파삭 구겼다. 저 개자식이. 황제가 살벌하게 시선을 돌렸다.
“……운 좋게 사족을 부지해 놓고도 분간을 못하는군. 그렇게 죽고 싶나?”
“허? 갑자기 사람한테 폭력을 행사한 게 누군데? 이 미친…….”
“지은 죄가 있으면 기는 척이라도 해야지. 이렇게 생각이 없고 미련해서야.”
황제가 손을 움직였다. 다음 순간 남자의 목이 그의 손아귀에 잡혔다. 목울대가 눌린 남자가 컥, 하는 소리를 냈다. 힘을 주기 시작하자 낯빛이 점차 새파랗게 질린다. 조금 전 붙잡혔던 손목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부위였다.
“그래, 이런 데서 파트너가 없는 여성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모르느냐고 했었나? 그걸 행동을 통해 보여주려 하다니 참 가상해. 그러니 나는 답례로 다른 걸 알려주지.”
“크…… 커억…….”
“이런 데서 남의 파트너를 건드린 개새끼가 어떤 꼴이 되는지.”
“사…… 살…… 려주…….”
“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남자가 게거품을 물자 결국 메일이 나섰다. 황제는 마치 조건반사처럼 이번에도 움직임을 멈췄다.
황제의 손에서 풀려난 남자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는 연신 기침했다. 정신을 잃지 않고 버틴 것이 그저 용했다. 황제가 메일을 돌아보았다.
“…….”
가면으로 가리고도 전해지는 표정에는 분명 불만이 담겨 있었다. 왜 자꾸 이놈을 치죄하는 걸 방해하냐는 불만. 메일은 그 무언의 불평을 읽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도로 열었다. 그녀는 우선 팩트로 공격했다.
“언제부터 반이 제 파트너였죠?”
사실관계로 폭행당한 황제가 눈동자를 흔들었다. 그의 마음은 복잡했다. 메일이 반이라고 불러줘서 기쁜데, 그 와중에 파트너가 아니지 않느냐고 지적하는 건 가슴이 쓰렸다. 희와 애 중에 뭐가 더 큰지 모르겠다.
“그건…….”
“알아요. 도와주시려고 그런 거죠. 저도 딱히 그게 싫다거나 한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저 남자는 살려줬으면 좋겠어요. 죽을죄를 지은 것까진 아니니까.”
세숫대야처럼 좁아졌던 메일의 인내심이 연못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같은 회복에는 사실 황제의 공이 컸다.
분명 강제로 팔목을 붙잡혔을 때만 해도 나서서 상대를 불구덩이로 처넣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황제가 나타나 저를 감싸고 보호자마자 거짓말처럼 그 충동이 사라진 것이다.
마치 마법 같았다. 메일은 관대하게 남자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손목이 으스러질 뻔하고 목을 졸리는 등 갖은 고통을 겪긴 했지만.
“……하지만.”
반면 황제는 납득할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더 정확히는 납득하기 싫은 것 같았다. 메일은 죽을죄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의 기준에선 충분히 죽을죄였다. 고통을 조금 준 것으론 모자랐다. 죽을죄를 지었으면 죽어야 하지 않나.
그러한 기색을 읽어낸 메일이 얼른 입을 가렸다. 하마터면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말리고 있는 입장에서 상대의 분노가 기분이 좋으니 저도 참 안 될 인사였다.
그녀는 헛기침으로 웃음기를 숨겼다. 메일은 슬며시 눈을 아래로 내리고 손을 뻗었다. 제가 마음이 풀리고 나니 어떻게 하면 상대의 분을 흩어지게 할 수 있을지도 알 것 같았다. 메일의 손이 천천히 움직여 부드럽게 황제의 손을 잡았다.
“……!”
황제가 화들짝 놀랐다. 누가 보아도 놀란 티를 내며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결코 잡힌 손을 빼지는 않았다. 메일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살려줄 거죠?”
“…….”
부끄러움 탓에 메일의 시선은 계속 아래를 향했다. 귓가가 붉어졌다. 설마 제가 이런 수단을 동원할 줄 알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그리고 그건 황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마 이런 식으로 화가 풀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해봤다. 언제 그런 게 있었냐는 듯 살심이 사라지고 온 신경이 손으로 쏠렸다. 남자를 족치는 건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목적했던 대로 황제의 분노가 사그라졌다. 남자는 모르겠지만 이 순간 메일은 그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민망함에 눈을 여러 차례 깜박인 메일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럼 살려주는 걸로 알게요. 그리고 저 할 말 있어요.”
할 말도 있고 물어볼 것도 많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계속 남의 시선을 주워 담으면서 할 것은 못 된다. 메일은 주변을 스치듯 둘러본 뒤 말했다.
“자리, 옮겨요.”
황제는 아직 메일에게 손이 붙잡혀 있었다. 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장 안에는 빈 테라스가 없었지만, 비어 있지 않은 곳을 빈 곳으로 만드는 건 가능했다. 메일은 저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테라스로 들어가 안에 있는 사람을 쫓아냈다. 죄책감은 없었다.
밖의 바람은 선선하고 어둠이 깔린 난간 너머로는 색색의 불빛이 아롱거렸다. 저 불빛이 오면서 봤던 가게의 등이라는 걸 생각하면 결코 좋은 풍경이라곤 말할 수 없었지만, 그걸 잊고 본다면 썩 예쁜 경치였다. 메일은 난간을 잡고 섰다.
“폐하.”
‘반’이라고 불리던 달콤한 시간은 끝났다. 황제는 내심 크게 아쉬워졌다. 메일은 몸을 돌려 상대를 마주 보곤 취조를 시작했다.
“왜 여기 계신가요?”
“…….”
“저를 따라오신 거예요?”
침묵은 보통 무언의 긍정으로 치환된다. 황제도 그걸 알았기에 뭔가 둘러댈 구실을 찾으려 했으나 마땅치 않았다. 메일의 말이 맞았다. 그는 그녀를 미행했다.
“우연…….”
“설마 우연히 마주친 거라는 말을 제가 믿을 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필사의 변명은 궁색해도 너무 궁색해서 바로 휴지 조각이 되었다. 황제는 결국 침묵했다. 그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미 몰래 쫓아왔다는 티를 너무 팍팍 내놔서 이제 와 비밀 업무가 어쩌고 해도 통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정적이 흘렀으나 답은 들은 거나 마찬가지다. 메일은 질문을 바꿨다.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짚이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제가 저도 모르게 황제를 찾아가 다 불어버리고 기억상실이라도 걸린 게 아니라면 경로는 한 가지뿐이었으니까. 이번 질문은 침묵이 대답이 될 수 없었던 터라 황제가 입을 열었다.
“시클라민 후작 부인에게…… 도움을 좀 받았지.”
“……하아, 역시.”
메일은 놀라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으니까. 그녀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보며 숨을 한번 내쉰 뒤 시선을 되돌렸다. 눈길에 타박이 담겼다.
“왜 그러셨어요?”
어떻게 보아도 혼을 내는 형국이었다. 메일 선생님이 무려 황제를 나무랐다. 황제는 잘한 게 없어서 묵묵히 혼을 듣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되니까.”
“제가요?”
“그래.”
로하이덴은 조금, 제 입장으로서는 조금 억울해서 목소리에 미약하게 투정을 담았다. 여기까지 쫓아오는 동안 그가 얼마나, 몇 번이나 심장이 내려앉았는지 안다면 솔직히 저를 질책해서는 안 되었다. 멋대로 미행을 나선 벌은 그렇게 충분히 받았으니까.
“사과를 할 수는 있어. 배려 없이 내 의사대로만 행동했다는 자각 정도는 하고 있으니.”
“…….”
“하나 후회는 못 해.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해. 내게 영애는 그런 사람이야.”
“……폐하.”
“물론 영애가 나를 이제는…… 그러니까, 싫어한다는 건 알지만.”
내내 또렷이 이야기하다 싫어한다는 부분에서만 발음이 흐렸다. 어지간히 입에 담기가 괴로운 듯했다.
메일은 바늘로 찌르듯 속이 따끔거렸다. 저도 이런데 상대는 얼마나 속이 말이 아닐까. 그녀는 울컥해서 완전히 부정할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많이 싫어하지는 않아요.”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이 정도였다. 하나 메일은 뱉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아, 하지 말걸.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나았을 법한 말이었다. 따끔거리는 통증을 참기 힘들어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가, 괜히.
메일은 상대가 황당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만한 발언이었으니까. 그러나 황제는 의외로 그런 기색 없이 차분히 그녀를 응시했다.
무도회용 가면은 얼굴의 절반을 가렸으나 눈을 마주치는 데에는 아무런 방해가 없었다. 시선이 얽혔다. 눈동자 안에 서로가 비쳤다.
“그래.”
“…….”
“그런 것 같군.”
“…….”
“최소한 지금은.”
“…….”
“피하지 않고, 나를…… 보고 있으니까.”
황금색 눈동자가 오롯이 메일만을 담았다. 그것은 차분하고 고요하고, 또 절절했다. 메일은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단지 쳐다보는 것뿐인데도 그는 마치 그녀에게 매달리는 것 같았다. 쿵. 쿵. 가슴의 고동이 빨라졌다.
테라스는 적막했으나 가만히 입을 다물면 희미한 음악소리가 들렸다. 닫힌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연회장의 불빛, 옅은 소란. 몸을 스치듯 건드리는 바람은 미약하게 풀잎의 향기를 전달한다. 밤이 찾아든 사위는 어두웠으나 달빛이 인위적인 조명 대신 사람과 사물을 비췄다.
메일은 깨달았다. 남들이 왜 테라스의 분위기를 극찬했는지. 그 분위기에 취한다는 것이 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말이다. 고작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허술하게 단절된 공간은 이상하리만치 꼭 다른 세계 같았다.
다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저와 상대만이 함께하는 그런.
‘위험해.’
메일은 문득 생각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뭐가 위험한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이곳에 더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도망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피해야만 했다. 그때 황제가 입을 열었다.
“메일.”
그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아까 연회장에서처럼 분노나 노여움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인내하는 이의 목소리였다. 참고, 억누르고, 절제하고, 하나 그럼에도 완전히 열기를 내리누르지 못해 끝이 갈라지는.
욕망은 목소리보다 눈동자에서 더 선연했다. 뚜렷한 열기에 메일이 숨을 멈췄다. 사로잡힌 것은 시선뿐인데 거짓말처럼 손도, 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득했다.
“……허락을.”
“…….”
“구해도 될까.”
그는 허락의 객체를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러나 메일은 그럼에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상대의 시선은 집요했다. 집요하게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
메일은 안 된다고 대답하려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당연히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하며 고개를 저으려 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정말 이상했다. 그녀의 몸은 의사를 거스르고 반대로 움직였다. 그녀는 스스로를 말릴 수 없었다.
메일은 눈을 감았다. 곧 로하이덴의 손이 그녀의 턱을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