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야겠네요. 나무 요정님도 가면을…… 어머.”
텔리야는 옆을 돌아보았다가 제 입을 가렸다. 착용을 권하려고 했더니 메일은 그새 이미 가면을 쓰고 있었다. 방금 막 걸친 듯 매듭 주변의 머리카락을 정리한 메일이 물었다.
“……괜찮은가요?”
메일에겐 거울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없었으니 자연히 평가를 남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텔리야는 짧은 침묵 후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너무 아름답네요. 감격스러울 만큼.”
메일의 가면은 텔리야의 것과 무늬와 형태는 같았으나 색이 흰색이었다. 어두운 머리색과 어두운 드레스차림에 얼굴을 가린 가면만 눈처럼 새하얗다.
텔리야는 마담이 과연 이걸 계산해서 가면을 골라준 건지 궁금해졌다. 자아내는 분위기가 굉장히 묘했다. 어딘지 건드려선 안 될 것 같으면서도 건드리고 싶은 기분이 들 만큼.
“저도 다 썼습니다.”
“쓰시든가.”
괜히 끼어들었다가 본전도 못 찾은 거튼이 시무룩해졌다. 짙은 보라색 가면을 착용한 그는 가면을 쓰고도 퍽 잘생긴 얼굴이었으나 이 중에 그것을 칭찬해 줄 사람은 없었다.
세 사람은 곧 마차에서 내려 저택의 입구로 다가갔다. 입구에는 사람이 서 있었는데 경비를 위한 것은 아닌 듯 손에 펜과 종이를 들고 있었다. 그는 사람이 다가오자 외알 안경을 추켜올렸다.
“어서 오십시오. 이름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텔리야 시…….”
텔리야가 저도 모르게 대답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가면 쓴 메일을 감상하면서 걷느라 그만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난감하게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린 뒤 둘러댔다.
“……예요. 텔리야시.”
덕분에 묘하게 이상한 이름이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안경을 쓴 남자는 들은 것을 또박또박 종이에 적었다. 메일이 물었다.
“익명이라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맞습니다. 굳이 본명을 알려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도회가 무르익으면 중반에 선물을 증정하는 이벤트가 있을 예정인데, 이 명단은 그때 쓰일 겁니다.”
“그렇군요. 전 메리예요.”
“메리……. 예, 다음 분은?”
텔리야시와 메리를 적은 남자가 눈을 들었다. 남은 것은 거튼의 가명뿐이었다. 그는 뭔가 멋들어진 것을 내놓고 싶은 듯 고민하는 기색으로 뜸을 들였다. 그의 고뇌가 길어지자 메일이 기다려 주지 않고 먼저 말했다.
“커튼이요.”
“예, 커튼. 다 됐습니다. 들어가시죠.”
“여, 영애!”
커튼이라니요! 잔뜩 당황한 거튼이 그 어느 때보다 항의하고 싶은 낯으로 외쳤으나 메일은 들어주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서만 잠깐 쓰고 말 가명인데 커튼이면 어떻고 컭튼이면 어떻담. 메일이 무시하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은 문을 열자마자 바로 무도회장으로 통했다. 아니, 어쩌면 건물 전체가 통째로 연회장인 것 같았다.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어지간히 연회에 미친 사람이겠네요.”
뒤따라 들어선 텔리야가 그리 감상을 꺼냈다.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눈이 부신 천장은 고개가 아플 정도로 높고, 계단과 난간을 통해 나누어진 층은 높이만 다를 뿐 어디나 똑같은 풍경이었다. 술과 요리, 음악, 그리고 가면이 사방에 가득했다.
춤을 추는 사람도 있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다. 메일은 연회장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본 후 뒤늦게 문제를 자각했다.
“……어떻게 찾죠?”
풍성한 드레스에 화려한 가면이 여기저기서 눈에 들어와 시야를 어지럽혔다. 가면 밖으로 드러난 생김새는 저마다 조금씩 달랐으나 얼핏 보기에는 서로 비슷하여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메일은 그 와중에 가발을 썼거나 염색을 한 걸로 추정되는 사람마저 몇 발견했다. 익명의 파티라더니 그들은 저를 감추는 것에 썩 능숙해 보였다.
‘이래서 번거로울 거라고 했구나.’
마담이 말이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이건 조금이 아니잖아. 메일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따라붙은 거튼이 뒤에서 종알거렸다.
“영애, 정말 이건 아닙니다. 예? 커튼이라뇨. 저는 좀 더, 그러니까 테리우스 같은 이름을…….”
“백작님. 아니, 익명을 위해서 커튼 씨.”
“차라리 본명으로 불리겠습니다!”
“별로 차이 없잖아요. 아무튼 엘리사의 용모와 특징을 아시죠? 설명해 주세요.”
셋 중에서 엘리사의 생김새를 아는 건 거튼뿐이었다. 항의를 묵살당한 거튼이 삐친 표정을 지었다가 텔리야가 살벌한 시선을 보내자 얼른 부지런히 입을 열었다.
“우선 엘리사는 은발입니다. 은발인데, 음, 이게 좀 색이 애매하다고 해야 하나. 회색인 듯 회색 아닌 회색 같은 은발입니다.”
“탁한 은발이네요.”
“바로 그겁니다! 그리고 눈동자는 빨간색인데, 이게 또 주황인 듯 주황 아닌 주황 같은…….”
“다홍색.”
“예, 그거!”
“어휘력이 왜 이 모양이죠?”
메일은 텔리야의 말에 동의했으나 그를 책잡지는 않았다. 탁한 은발에 다홍색 눈. 속으로 되뇐 메일이 이어 물었다.
“다른 특징은요? 신체나, 얼굴형이나.”
“턱이 갸름하고 입술은 도톰한 편입니다. 피부는 희고요. 몸매는 허리나 팔목만 보면 말랐는데 가슴이…… 음…….”
“네, 알겠어요. 그리고요?”
“그리고…… 아, 왼손 중지와 약지의 길이가 같습니다.”
독특한 특징이 나왔다. 메일은 그것을 새겨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외모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세 사람에겐 곧 새로운 임무가 생겼다.
“이제 각자 흩어져서 찾을 거예요. 커튼 씨도 마찬가지구요.”
“커…… 후우…… 찾고 나서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음, 악단의 근처에 함께 계셔 주세요. 그리고 악단에게 요청해 음악을 잠시 동안만 크고 빠르게 변주하면, 찾았다는 신호로 알아듣고 제가 그리로 갈게요.”
“예에, 알겠습니다.”
“나무 요정님.”
텔리야는 거튼이 먼저 사라지는 것을 가만 보다가 뒤를 돌았다. 메일은 막 자리에서 움직이려다 멈칫했다.
“네, 후작 부인…… 아니, 텔리야시 양?”
“그 우스꽝스러운 이름도 나무 요정님의 입에서 나오니 사랑스럽네요.”
“고마워요. 그런데 왜?”
“다른 게 아니라, 이거.”
텔리야가 손을 움직였다. 부드러운 손길이 메일의 가슴께에 잠깐 머물렀다가 떨어진다. 메일이 눈을 내렸다.
“브로치…… 네요?”
“맞아요. 다만 그냥 브로치는 아니에요. 이걸 달고 있으면 제가 언제든 나무 요정님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마법 브로치죠.”
메일이 깜짝 놀랐다. 그런 식의 마법 용품은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퍽 희귀했다. 갑자기 귀한 것을 드레스에 매달게 된 메일이 눈동자를 흔들었다.
“이걸 왜?”
“걱정이 되니까요. 제가 전에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었죠? 다름 아닌 이걸 만드느라 그랬던 거랍니다. 시간이 촉박해서 밤은 좀 샜지만 뿌듯하네요.”
“이렇게까지…….”
메일은 고마우면서도 미안해서 말의 갈피를 못 잡았다. 물론 안전을 목적으로 상대에게 동행을 부탁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해주기를 원한 것은 아니다. 이 정도면 민폐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생각할수록 고마움보다 미안함이 더 컸다. 그 기색을 눈치챘는지 텔리야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아요. 한편으론 저를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나무 요정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간, 뭐…… 저와 오라버니의 앞날도 썩…….”
“네?”
“아니에요. 아무튼 가지고 계시다가 위험할 것 같다 싶으면 브로치를 벽에 내던지거나 발로 밟으세요. 충격이 전해지게요. 그럼 제가 신호로 알고 바로 달려갈 테니까요.”
“알겠어요. 고마워요.”
“그럼 조심하세요. 엘리사는 저도 최대한 눈을 비벼가며 찾아보도록 할게요!”
마지막 당부를 남긴 텔리야가 눈을 찡긋하곤 사라졌다. 메일은 멀어지는 상대의 뒷모습과 브로치를 한번 번갈아본 뒤 조금 멋쩍게 발을 돌렸다. 어쨌든 저를 위해 고생해 준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께에서 공연히 온기가 간질거렸다.
‘정말로 사용할 일은 없겠지만.’
메일은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어땠는지를 떠올렸다. 헛걸음은 있었으나 순탄했다. 가게마다 매달린 등을 보며 신기해하고,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고.
어딘지 모르게 위험과 스릴이 넘칠 거라고 상상했던 것과 달리 그건 마치 평범한 유람 같았다.
‘역시 그것 때문인가? 손님 중에 귀족이 많아서?’
이유야 어쨌든 예상했던 위험이 없다는 건 다행인 일이었다. 바깥에서도 그렇게 아무 일이 없었는데 보는 눈 많은 이 안에서야 당연히 더 아무 일이 없겠지.
메일은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그저 엘리사가 어서 나타나 주길 소원할 뿐이었다.
가면무도회는 일반적인 파티가 아니다. 거튼이 과거 엘리사를 만나 짝짜꿍했던 파티가 그랬듯, 통상의 범주에 넣기에는 지나치게 퇴폐적이고 문란했다.
메일은 어색하게 웃으며 문을 닫았다.
“실례했습니다.”
줄어드는 사이 간격으로 ‘가지 말고 놀자’, ‘예쁜 언니’ 같은 말이 부정확한 발음으로 새어 나왔다. 물론 무시하는 것이 좋은 말이다. 메일은 테라스의 문을 닫고 돌아서서 식은땀을 훔쳤다.
‘심했다, 여기.’
메일이라고 아무런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오히려 각오를 제법 단단히 다졌다. 다른 곳도 아니고 향락가에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작부를 끼고 참석하는 파티다. 경험이 없어도 이 파티가 어떤 느낌일지는 충분히 유추가 가능했다.
그래서 어지간히 노골적이고 난잡한 것을 보더라도 놀라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었는데.
‘최소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라도 보여줘…….’
메일은 참패했다. 각오는 휴지 조각이 되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향락 파티를 만만하게 봤다는걸.
조금 전, 엘리사를 찾아 나서면서 메일은 우선 탐색할 범위를 정했다. 연회장은 넓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어지러울 정도로 많다.
무작정 누비는 것만큼 막막하고 비효율적인 것도 없었으니 일단 선순위를 지정하는 편이 좋았다. 메일이 고른 장소는 바로 테라스였다.
테라스는 연회장 내에서 인정받는 명당이다. 혹자는 파티의 꽃이라고도 칭했다. 메일은 감수성이 메말라서 남들이 찬양하는 테라스의 대단한 분위기 같은 건 아직 느껴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많은 이가 선점하고 싶어 하는 인기 장소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수가 탐내는 곳이니 아마 엘리사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메일은 그러한 추측하에 가장 가까운 테라스부터 하나씩 들어가서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굉장한 감각적 공해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