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려라 메일 (87)화 (87/144)

“어서 오세요. 아름다운 레이디, 잘생긴 신사분.”

앞서와 달리 이곳의 지배인-혹은 주인-은 여성이었다. 상대를 레이디와 신사라고 칭한 그녀는 정작 본인이 이곳에서 가장 레이디다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코르셋에 페티코트까지 빠짐없이 차려입은 그녀의 노란 드레스가 풍성하게 원을 그렸다.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흰색 장갑, 보석과 장식용 가화가 눈에 띄는 챙이 짧은 모자.

메일은 들어오면서 봤던 건물의 외관을 잠시 떠올렸다. 마치 귀부인의 별장처럼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지. 가게마다 특색이 있는 모양이었다.

“반가워요, 그러니까…….”

“샤랄리아예요. 마담 샤랄리아.”

“그래요, 마담.”

“호호, 아름다우신 분. 생각해 두신 아이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누굴 고르시더라도 그 아이에겐 더없는 행운이 되겠군요.”

“엘리사를 만나러 왔어요.”

“어머나.”

마담이 과장되게 눈을 크게 떴다. 왼손에 든 부채를 펼쳐 입을 가리더니 이내 눈가를 접으며 웃는다. 그녀가 말했다.

“엘리사에게 미리 들어온 예약 중에 이런 미인은 안 계셨던 걸로 아는데요. 혹시?”

“예약은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아.”

알겠다는 듯 마담이 부채를 접었다. 앞서 들른 가게의 중년인보다 그녀는 이런 일에 배는 익숙한 듯 보였다. 마담은 당황하지도, 난감해하지도 않으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예약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가시겠어요? 지금이라면 삼 주쯤 기다리셔야 할 테지만, 중간에 공백이 생기면 레이디께 가장 먼저 연락을 드리겠다 약속하지요.”

저 약속을 과연 몇 명에게나 주었을까. 물론 메일은 마담의 공수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사양하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은 뒤 메일이 품에서 보석을 꺼냈다.

“값은 미리 지불할게요. 난 엘리사의 하루를 사러 온 게 아니에요. 그녀와 몇 마디 대화만 나눌 수 있다면 충분해요.”

“흐음?”

메일이 꺼낸 보석 장신구는 고가품이었다. 놀고먹느라 바쁘지만 돈이 많은 거튼은 보석을 자주 봐서 그런지 어느 정도 안목이 있었다. 곁눈질로 장신구를 살핀 그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비싼 거네.

마담 또한 그간 쌓아온 연륜이 있는지라 감정에 능숙했다. 그녀가 움찔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고작 잠깐 대화를 나누는 데에 그만한 값을 지불하시겠다고요? 설마 이 마담을 놀리시는 건 아니겠지요?”

“가치는 상대적인 거니까요. 저한테는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일이니까 치르겠다는 거예요.”

마담이 침묵했다. 그녀의 시선이 베일 너머 메일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렇게 쳐다보면 뭐가 보이나. 거튼이 곁에서 그리 생각했을 무렵 마담의 입이 열렸다.

“아쉽네요.”

“거절하겠다는 건가요?”

“그럴 리가. 미녀와 잠깐 대화를 나누고 보석을 얻을 수 있다면 저보다는 엘리사가 쌍수를 들 텐데요.”

“그럼…….”

“하지만 엘리사는 지금 이곳에 없답니다.”

아쉽다고 한 건 이래서였다. 메일이 눈에 보이게 당황했다.

“네? 그게 무슨.”

“이곳이 많이 생경하신 것 같으니 알려드릴게요. 엘리사처럼 몸값이 비싼 아이는 손님이 대개 부호이거나 귀족이고, 그런 만큼 그녀를 찾는 목적이 단순히 하룻밤 자기 위해서가 아닌 경우가 잦답니다. 엘리사는 종종 은밀한 파티에서 지체 높은 귀족의 파트너, 혹은 액세서리를 역할을 담당하곤 하죠. 오늘도 마침 그런 경우고요.”

“아아, 그래서 그때 그 파티에.”

거튼이 아는 체를 했다. 메일의 당황이 짙어졌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마담에게 한 발 다가갔다.

“전 오늘 엘리사를 꼭 만나야 해요. 혹 기다린다면…….”

“언제 올지 모르는걸요. 해가 밝은 이후가 될 수도 있어요.”

“그런…….”

메일은 앞이 캄캄해졌다. 베일로 표정을 가리고도 그 심경이 남에게 전해질 정도라 마담이 내심 혀를 찼다.

엘리사 얘가 대체 바깥에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뭐를 어쨌기에 누가 봐도 환락가에 초행인 이런 귀족 영애마저 이리 애타게 구는지.

할 수 있는 가장 파격적인 치정을 상상한 마담이 고개를 내젓고는 부채를 펼쳤다. 거튼이 옆에서 도와준답시고 개소리를 했다.

“어허! 그냥 잠깐 이리로 부르면 되지 않느냐? 통신구 정도는 있을 텐데. 감히 귀족을 기약 없이 기다리게 하겠다는 것이냐?”

“신사분, 신사분도 귀족이지만 엘리사를 데려가신 분 또한 귀족이에요.”

“이쪽의 신분이 더 높다!”

“어떻게 자신하시죠?”

“왜냐면 여기 계신 이분이 바로 시클…… 읍!”

“쓸데없는 소리 마세요. 그러자고 동행하신 거 아니니까. 마담, 정말 방법이 없을까요? 꼭 이 장소에서 만나지 않아도 괜찮아요.”

표정은 보이지 않아도 목소리가 간곡했다. 마담은 부채질을 하며 으음, 낮은 신음을 흘렸다.

사실 그녀는 거튼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모르기에는 그가 너무 잘생기고 유명-좋은 쪽은 아닐지라도-했기 때문이다.

마담은 태연한 척 굴었으나 실상 백작위란 결코 예사 신분이 아니다. 환락가의 손님 중 과반수가 귀족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그의 계급은 높았다.

거튼이 정말 작정하고 깽판을 친다면 엘리사를 이리로 데려오는 것쯤이야 그의 말처럼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건 오늘 엘리사를 지명한 귀족이 자작이기 때문에 더 그랬다.

‘멀그므 백작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더군다나 그럼에도 진짜 문제는 백작이 아니다. 메일이 도중에 급하게 막긴 했지만 거튼의 외침은 이미 두 음절이나 공기를 탔다.

‘시클’. 백작이 ‘분’이라고 지칭할 만큼 높은 신분에 시클이라는 단어. 마담은 바보가 아니었다. 저걸 듣고도 누구인지 유추하지 못할 만큼 아둔했다면 애초에 이런 곳에서 마담 행세를 하고 있지도 못 했을 것이다.

‘시클라민 후작 부인. 어쩌다 이런 거물이.’

부러 두꺼운 화장으로 가린 마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듣도 보도 못 한 이름에 후작만 달아도 충분히 거물이거늘, 시클라민은 거기에 몇 술 더 떠 수도 제일의 재력가였다.

멀그므 백작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시클라민 후작에 비하면 새 앞의 파리에 불과했다.

더구나 시클라민 후작 부인의 본가는 모하임 공작가. 가게는 둘째 치고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그녀의 눈 밖에 나서는 결코 안 된다.

‘그렇다고 엘리사를 진짜로 부를 순 없어. 그런 식으로 고객을 기만했다는 말이 나오면 장사에 크게 문제가 생긴다. 어쩔 수 없지.’

생각을 마친 마담이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었다. 장사도 계속해야 하고 목숨도 보존해야 하니 방법은 한 가지뿐. 그녀가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시다면야 영 길이 없는 건 아니죠. 다만 조금 번거로우실 텐데, 괜찮으신가요?”

“물론이에요. 얼마든지.”

“좋아요. 그럼 엘리사가 있는 곳을 알려드릴게요.”

대상이 있는 장소로 직접 찾아가라는 소리다. 마담은 그러고선 덧붙였다.

“단, 파티의 손님으로서 입장하셔야 해요. 약조하시면 이곳에서 바로 약도를 그려드리죠.”

엘리사가 오늘 저를 지명한 고객과 함께 참석한 파티. 듣지 않아도 통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 것이 훤하다. 그러나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메일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요.”

“그럼 이곳에 잠시만 계세요. 금방 약도를 그려올 테니.”

그렇게 말하며 사라진 마담은 잠시 후 지도 말고 다른 것들도 함께 가지고 돌아왔다. 거튼이 먼저 반응했다.

“가면?”

“맞아요. 특별히 준비했답니다. 엘리사가 있는 저택에선 지금 가면무도회가 진행 중이거든요.”

마담은 메일과 텔리야, 거튼에게 각각 가면을 나눠준 뒤 흰색 염료 또한 내밀었다. 가면무도회는 익명으로 참가하는 파티였다.

그런 곳에서 신분을 숨기는 건 불문율이니 만약 타고 온 마차에 문양이 있다면 이것으로 가려달라는 것이다.

물론 염료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마차의 문양은 이미 한참 전 백작저를 들르면서 가려둔 상태였다.

황성을 통과할 때까지는 공연히 수상해 보일까 문양을 그대로 드러냈지만, 환락가에서도 그리 공개적으로 다닌다면 혹 후에 추문이 돌게 될까 메일이 걱정했기 때문이다. 정작 텔리야는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으나 메일이 강경했다.

그렇게 염료는 놔두고 세 사람은 약도와 가면을 챙겨 가게를 떠났다. 마차의 실루엣이 멀어졌다. 마담은 바깥에서 그들을 배웅한 뒤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줄곧 의연함을 가장했던 마담이 그제야 식은땀을 훔치며 신경안정제를 찾은 것은 떠난 이들은 모르는 일이었다.

마차가 다각거리며 달렸다. 벌써 세 번째 목적지였다. 메일이 조금 진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더 까다롭네요, 엘리사를 만나기가.”

“뭐, 그래도 저는 재미있는걸요? 그 덕에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보고. 이번엔 또 가면무도회라니.”

빈말이 아닌 듯 텔리야는 흥미롭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든 가면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뭉툭하니 못생긴 민무늬는 아니고, 치장용으로도 쓸 수 있을 법한 화려한 나비 가면이었다.

텔리야가 그것을 우선 얼굴에 써봤다. 가면은 그녀의 얼굴을 절반쯤 가리고 이마 일부와 코 아래를 드러냈다. 그녀는 그 상태로 거울을 만들어-마법은 별걸 다 할 수 있었다-확인한 뒤 감상평을 뱉었다.

“가면으로는 미모를 다 가릴 수 없겠는데요? 우리 나무 요정님 큰일 났네.”

“……꼭 가면을 써야 하는 걸까요?”

“가면무도회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얼굴을 가리는 게 목적이라면 여태 그랬던 것처럼 베일을 쓰고 있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도착해 봐야 알겠지만 안 될 겁니다. 보통 이런 가면무도회는 주최자의 취향이 주최 동기가 된 경우가 많거든요. 가면을 쓴 타인의 모습에 매력을 느끼는 거죠.”

“어머, 취향이란.”

“정말 모르는 게 없으시네요. 지나치게 특정된 분야라는 게 문제지만.”

“그거 칭찬입니까?”

거튼이 제가 들은 말이 칭찬인지 아닌지 헷갈려 하는 사이 마차가 속도를 늦췄다.

벌써? 메일은 일행과 눈을 맞춘 뒤 마차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웅장한 저택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렇게 가까이에 저택이 있었어요?”

“위치가 교묘하네요. 다른 건축물에 가려서 안 보였던 것 같아요.”

“별장이군요. 누구의 소유인진 모르겠지만.”

환락가 안쪽에 있는 것이니 누가 주인이든 늘 사람을 바꿔 대여될 것이다. 메일은 점차 선명해지는 저택을 보며 손에 든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가면은…….’

이렇게 화려하고 문양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매개가 되어 누군가를 떠오르게 만든다.

메일은 가면의 표면을 만져 보았다. 무늬와 장식 때문인지 손끝에 남는 느낌이 거칠다. 그건, 이렇지 않았는데.

“도착했습니다.”

그때 마차가 멈췄다. 메일은 공연히 화들짝 놀라서 들고 있던 가면을 내던졌다가, 이내 그것을 써야 한다는 걸 깨닫곤 도로 주워 들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지. 스스로의 한심함에 메일이 몰래 한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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