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려라 메일 (86)화 (86/144)

“왔습니다. 여기서부터가 입구입니다.”

마차는 한참을 더 달려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는 동안 해가 저물어 바깥은 이미 어두웠다. 메일은 우선 멈추지는 말고 마차를 천천히 몰아줄 것을 요청했다.

“생각보다 길이 좁고…… 굉장히 기네요. 후작 부인께서도 이곳은 처음이시죠?”

“그럼요.”

메일과 텔리야가 나란히 마차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한때 제집처럼 드나들었던 거튼만이 혼자 시큰둥했다.

환락가는 유흥의 거리라는 이름답게 퇴폐적이면서 화려한 느낌의 가게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라 메일은 어떤 의미에선 감탄했다.

“전부 장사가 된다는 거네요. 이렇게나 많은데.”

“나무 요정님, 그거 알고 계세요?”

“뭘요?”

“지금 가게마다 등이 보이죠? 그중에서 색이 없는 등은 술 시중만 드는 작부가 있는 술집을 의미하고, 색이 있는 등불은 밤 시중도 드는 작부가 있는 가게를 의미한대요.”

“어머.”

메일이 신기한 듯 눈을 깜박였다. 그런 구분법이.

“어떻게 아셨어요?”

“우연히 들은 거예요. 예전에 저잣거리를 놀러 다니다가.”

“더 자세히는, 등의 색이 붉은색이면 여자를 살 수 있고, 파란색이면 남자를 살 수 있는 집을 뜻합니다. 둘 다 살 수 있는 가게는 등에 색을 입히지 않고 위에 조화를 꽂아둡니다.”

메일과 텔리야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거튼은 설명해 놓고 저도 좀 민망한 듯 헛기침을 더했다.

“청산유수네요. 뭐랄까, 여행 안내원이 함께하는 느낌이에요.”

“그러게요.”

“말씀드리지만 저도 어디까지나 들은 겁니다. 저야 딱히 작부를 살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

“아, 네.”

“잠깐, 그런데 남자를 살 수도 있다고요? 그럼 환락가를 찾는 손님 중에 여성들도 있다는 건가요?”

“당연하죠. 다만 꼭 붉은색 등이 켜진 가게를 남자 손님만, 파란색 등이 켜진 가게를 여성 손님만 찾는 건 아닙니다.”

헉. 메일은 편견 하나를 깼다.

“그럼 안내원님, 저건 왜 그런 건가요? 등이 여러 개인데.”

“저건…….”

텔리야는 내친김이다 싶었는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어느새 백작대신 안내원이 된 거튼은 호칭이 아깝지 않게도 굉장히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것도 지식이라 쳐준다면 그는 이 순간 만물박사였다. 거튼에게 새로운 쓰임새가 생겼다.

“내가 동반하자고 한 거지만 이럴 줄은 또 몰랐네.”

“저도 제가 이렇게나 유식할 줄은 몰랐습니다.”

“유식……?”

“뭐, 나름 재미있고 좋은걸요. 안내원님, 그런데 이곳 치안은 괜찮은 건가요? 아무리 등이 켜져 있다지만 해가 진 이후인데 말이에요.”

“어, 그건 저도 궁금해요.”

텔리야의 질문에 메일이 숟가락을 얹었다. 둘의 의문은 타당했다. 제도의 치안이 좋은 편이라지만 그건 낮의 얘기고 밤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저잣거리의 가게는 보통 해가 지면 문을 닫는데 이곳은 정반대였으니 과연 공안이 유지될지.

거튼은 그것 또한 막힘없이 대답했다.

“아주 안전하다고는 말 못 해도 생각하시는 것보단 좋은 편입니다. 여기 늘어선 가게들은 작부를 사든 사지 않든 값이 비싸서 부유한 치들만 손님으로 드나들거든요. 유명한 가게는 귀족을 단골로 두고 있기도 하고. 그래서 범죄자들이 길에서 함부로 사람을 못 덮칩니다. 그랬다가 귀족이면 인생 종치는 거니까.”

“아하.”

메일은 다시 창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좁은 길이었지만 그런 길에도 군데군데 마차가 눈에 띄었다. 허름한 것은 거의 없고 문양은 가렸어도 귀족의 소유임을 할 수 있을 만한 것이 대다수였다.

“이런 곳에서 에이스라니, 엘리사도 대단하네요.”

“……뭐.”

“그나저나 말이 나온 김에 슬슬 엘리사를 찾아볼까요? 그녀가 어느 가게에서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명하니까 물어보면 알려주겠죠.”

마차는 조금 더 가서 외관이 번듯한 가게 앞에 멈춰 섰다. 메일은 마차의 문을 열고 내리려다 멈칫했다.

“이런, 베일을 가져올 걸 그랬어요.”

메일의 낯에 곤란한 기색이 서렸다. 어떻게 그걸 잊었지. 얼굴을 가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만 깜박했다.

물론 맨얼굴을 드러낸다고 꼭 일이 생긴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그래도 불필요한 시선과 관심은 되도록 차단하는 편이 좋았다. 메일은 미인이었고 본인 또한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에 텔리야가 빙긋 웃으며 짐을 꺼냈다.

“후후, 그러실까 봐 제가 챙겨왔죠!”

“후작 부인.”

“나무 요정님께 어울릴 만한 예쁜 걸로 준비했어요.”

“저기,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나무 요정? 여신? 그게 뭡니까?”

메일이 베일 달린 모자를 건네받는 사이 거튼이 끼어들었다. 그는 줄곧 궁금했다는 표정이었다.

텔리야가 그의 질문을 무시해서 거튼은 어쩔 수 없이 메일을 쳐다봤다. 상대를 두 번이나 협박한 것이 약간 미안하기도 했던 메일이 선선히 알려주었다.

“제 애칭 같은 거예요.”

“……요정, 여신이요?”

“불만이라도?”

텔리야가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살벌했다. 거튼이 강아지처럼 꼬리를 말고 고개를 붕붕 저었다. 세상 그 어떤 표현보다도 완벽한 애칭입니다.

“그럼 가 볼까요?”

모자를 고정한 메일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짙은 올리브색 모자에 장식처럼 달린 검정 베일은 화려한 문양의 망사로 되어 있었다.

허리를 잡아주어 몸매를 드러낸 메일의 어두운 암갈색 드레스와 은근히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낸다. 텔리야는 속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자찬했다.

문을 열자 가게의 직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에스코트를 위해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메일은 장갑을 낀 채 직원의 손을 잡고 최소한의 부축만 받으며 내렸다. 바닥에 발을 디딜 때 베일이 살랑거렸다.

뒤이어 내린 텔리야는 아예 부축을 받지 않았다. 평소에도 종종 그러는 듯 드레스의 펄럭임을 최소화하며 뛰어내리는 폼이 능숙했다. 둘은 곧 가게 안으로 향했다.

“반갑습니다, 부인.”

화려한 문을 통과하자 지배인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메일은 저를 맞이하는 상대의 자연스런 태도에서 환락가 손님의 일부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하긴, 향락은 남녀를 가리는 게 아니니까. 메일은 눈짓으로 인사를 받았다.

“물어볼 것이 있어서 들렀어요.”

“그러십니까? 말씀하시지요.”

“엘리사라는 작부를 만나고 싶어요. 어디로 가야 하죠?”

엘리사는 거튼의 말처럼 에이스가 맞는 모양이었다. 흔한 이름임에도 중년인은 그게 누구냐고 되묻지 않았다. 그는 한편으론 이런 질문이 익숙한 듯 보였다.

“부인께서도 엘리사를 사러 오신 겁니까?”

익숙한 것이 맞았다. 심지어 성별도 가리지 않는다. 메일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편견을 깬 지 얼마나 되었다고 눈앞에 이렇게 현실 예제가.

메일은 구태여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다. 엘리사에게 캐낼 것이 있어서 왔다고 하는 것보단 차라리 손님으로 비치는 편이 훨씬 덜 수상할 테니까. 침묵을 시인으로 받아들인 중년인이 이어서 말했다.

“엘리사는 저희 가게 소속이 아닙니다. 그녀가 일을 하는 가게는 이곳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길을 알려줄 수 있을까요?”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혹시 예약을 하실 겁니까?”

“예약이요?”

“처음 방문하신 듯한데, 엘리사는 당일에 지명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워낙 수요가 많다 보니.”

이런. 메일이 당황했다. 이건 생각지 못한 난관이었다. 메일은 장애물에 곤란해하다가 이내 진정을 찾았다. 대상을 사려는 게 아니다. 대화만 몇 마디 나누면 된다. 내내 손님을 받지는 않을 테니 값을 지불한다면 중간에 잠깐 정도는 시간을 내어줄 것이다.

“그래요. 그럼 그 가게에 가서 예약을 하고 돌아가겠어요. 다른 사람으로 대신할 수는 없으니까.”

메일은 그렇게 둘러대고 중년인으로부터 약도를 받았다. 그녀는 환락가의 지도를 보는 것에 서툴렀지만 마부라면 알아서 잘 찾아가 줄 것이다.

가게를 나온 메일은 에스코트를 받아 도로 마차에 올랐다. 오르면서 아까부터 저를 진득한 시선으로 훑듯이 바라보던 한 직원을 실수인 척 걷어차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차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메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사의 인기를 예상하지 못했네요.”

“뭐랍니까?”

“그녀를 만나려면 예약을 해야 할 거래요. 그렇게 아름답나요?”

메일이 순전히 궁금해서 물었다. 중년인은 그녀에게 약도를 건네주며 당장 예약을 하더라도 최소 보름쯤은 기다려야 할 거라고 덧붙였다. 그 정도면 대체 얼마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는 건가. 거튼이 그에 머리를 긁적였다.

“예쁘긴 한데, 영애보다는 아니고…….”

“비교는 됐어요.”

“실례했습니다. 음, 예쁘기도 예쁘지만 그보다는 성격 때문에 더 유명합니다.”

“성격이요?”

“콧대가 대단하거든요. 우선 제 마음에 안 들면 천만금을 쥐어줘도 절대 손님을 받지 않고, 받더라도 밤 시중은 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답니다. 돈이 아닌 뭔가 다른 것으로 그녀를 흔들어야 함께 밤을 보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환락가에선 유명하죠.”

“그게 인기의 요인이 된다고요?”

“정복욕을 자극하는 거죠.”

정복욕 자극. 쉽고 저렴하게 표현하면 비싸게 군다는 말이다. 그녀 나름의 장사 수완인 건지 타고난 성정이 정말 그런 건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어쨌든 그건 엘리사를 환락가 에이스의 자리에 올려놓은 일등공신이었다.

메일은 어쩐지 조금 거부감이 드는 단어에 눈살을 찡그렸다.

“그렇군요. 이해는 되지만 별로 유쾌하지는 않네요. 상대와 잠자리를 갖는 걸 정복한다고 생각하다니.”

“……뭐…… 일단 이곳에서는 돈을 내고 상대를 사니까요.”

비슷한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거튼이 찔려서 눈을 피했다. 텔리야는 흥미로운 기색을 보였다. 설명을 들고 엘리사에 대한 호기심이 외려 더 깊어진 것 같았다.

마차는 그로부터 십오 분쯤 더 달려서 두 번째 목적지에 도달했다. 길이 좁아 거의 걷듯이 이동한 것치고는 빠른 도착이었다. 이번에는 텔리야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부축은 제가 해드릴게요. 아까 다른 사람이 감히 나무 요정님의 손을 잡는 걸 보곤 질투가 났었거든요.”

“고마워요.”

메일이 웃었다. 하얀색 베일을 쓴 귀부인이 검정 베일을 쓴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장면은 썩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에스코트를 하러 나왔다가 할 일을 빼앗긴 직원들이 서로를 보며 그저 당황스러워했다.

“자, 백작님도 내리시고.”

“예에, 뭐.”

환락가에 드나들다 걸리면 강제로 귀농이라더니, 입구를 통과한 시점부터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는지 거튼이 체념한 낯으로 순순히 마차 밖으로 나왔다.

남자 하나에 여자 둘. 행색을 보아 어느 한쪽이 수행원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곳에 혼성으로 오는 경우는 드물었기에-아예 없지는 않았다-직원은 그들에게 다소 길게 시선을 주며 가게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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