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버니, 내가 원래는 입이 참 무거운 사람인데 말이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궁의 복도는 워낙 넓어 초로는 빛을 밝히기가 어렵다. 횃불을 통해 시야가 확보된 복도를 반테르가 성큼성큼 걸었다.
‘이거 무려 하루씩이나 고민하고 연락하는 거다?’
조금 전 거처에 둔 통신구가 울렸다. 텔리야였다. 통신구는 대체로 가격이 같은 무게의 금을 호가할 정도로 비싼 데다, 사용할 때마다 구체의 마나가 닳는 소모성 물품이었다.
처음 반테르는 요란하게 울리는 통신구의 연락을 수신하며 혀를 찼다. 얘가 할 말이 있으면 편지나 보낼 것이지 낭비는. 그러나 그 핀잔-본인의 행동을 돌아보지 않는-은 곧 통신구에서 흘러나온 용건을 듣자마자 말끔하게 사라졌다.
‘여신님과의 의리를 저버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아프긴 한데, 그래도 폐하께서 워낙 초췌한 얼굴이셨으니…… 사실 미인이기로 따지면 폐하가 제일이잖아. 그 얼굴이 더 초췌해지면 큰일이니까 말해주는 거야.’
‘텔리야, 고맙다!’
반테르는 속으로 그리 외치며 거처의 문을 열었다. 그의 방은 아니고 황제의 처소였다. 침의를 입은 황제는 들이닥친 반테르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경, 미쳤나? 미리 출근하고 싶으면 여기 말고 집무실로 가.”
“무례는 사과드리겠습니다. 급한 일입니다.”
“이 야심한 시각 침소에서 경의 얼굴을 마주해야 할 정도로 급한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비제아트 영애와 관련된 일입니다.”
황제가 멈칫했다.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가 이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뭐라 응수하지 않고 입을 닫았다. 침묵이 뜻하는 건 최소 축객령은 아니었다.
반테르는 고개를 숙였다 든 뒤 입을 열었다.
“여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비제아트 영애에게 부탁을 받아 둘이 함께 어딜 다녀오기로 했다더군요. 그런데 그곳이…….”
“…….”
“제도 동쪽의 환락가랍니다.”
“뭐?”
황제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그의 침묵이 깨졌다. 반테르가 이어서 말했다.
“둘만 다녀오기로 했고 비밀 유지를 부탁받았답니다. 작부를 만나러 간다는 모양인데 그 이유까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왜…….”
왜 그런 곳에. 황제의 미간에 골이 패였다. 환락가는 그야말로 온갖 인간이 다 모이는 장소였다. 특히 동쪽 환락가라면 이름난 윤락의 거리가 있는 곳이다.
황제의 눈에 메일은 세상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한 미인이라 그런 장소에 들어갔다간 얼마나 위험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반테르는 전달을 끝내고 입을 닫았다. 제 사족은 불필요했다. 그는 잠자코 침묵을 지키며 황제의 결정을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렇게 오래 지나지는 않았다. 황제가 입술을 열었다.
“출발이 언제지?”
“내일 오후랍니다.”
“……일을 가지고 와.”
“예?”
“내일까지 처리하지 않으면 부서관들이 흰 띠를 두르고 넘어갈 만한 급한 업무부터 모조리 가지고 오게, 경.”
명령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반테르는 곧 상체를 숙여 그러겠노라 답한 뒤 돌아섰다. 황제의 처소에 켜진 불빛은 지금부터 오랫동안 꺼지지 않을 것이다. 동이 터서 더 이상 등이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
복도로 나오자 횃불이 일렁였다. 제 몸을 살피지 않을 정도로 사랑에 빠진다는 건 과연 어떤 기분일까. 길게 늘어선 그림자와 함께 걸으며 반테르는 스치듯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