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려라 메일 (83)화 (83/144)

진한 회색 눈동자에 짧게 스쳐 지나간 이채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폐하의 정인이라.’

재미있는 일이었다. 묘하다고 해야 할까. 텔리야는 속으로 남몰래 교차하는 모양의 작대기를 그려 보았다. 리엘라를 모시는 메일은 황제와 황제를 모시는 반테르는 리엘라와. 호오, 저는 이거 찬성이요.

‘나만 찬성한다고 될 건 아니지만.’

텔리야는 반테르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폐하가 그녀에게 마음을 준 건 맞는데,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척애라고 했다. 즉 짝사랑. 사실상 황제는 차였으며 반테르가 오전부터 내내 대련으로 혹사당한 건 다 그것 때문이라는 거다.

‘정말일까?’

어쩌다 그 황제가 짝사랑을. 짧은 시간에 수척해진 낯을 보니 확실히 힘들어 하는 건 사실인 듯 보였지만 말이다. 텔리야가 찻잔을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아무튼 이렇게 다시 봬서 정말 좋아요. 천사님도 그렇지만 나무 여신님도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한다. 메일이 그에 다소 멋쩍게 웃었다.

텔리야는 이름 대신 리엘라는 천사님으로, 메일은 나무 요정이나 나무여신으로 불렀다. 메일의 경우는 리엘라가 메일이 나무를 닮았다는 걸 텔리야에게 이야기해 주면서 생겨난 호칭이었다.

나무 요정, 나무 여신이라니. 메일은 들을 때마다 과분한 칭호란 생각에 쑥스러워지곤 했다. 요정이나 여신 때문은 아니고 앞에 나무가 붙어서 그렇다.

“고마워요. 시클라민 후작 부인도 충분히 예쁘신걸요. 후작께선 좋으시겠어요.”

“호호! 제가 남편 얼굴을 보고 그를 보쌈하긴 했지만, 확실히 저도 한 미모 하죠. 남편은 저한테 걸려서 운이 좋은 거예요.”

텔리야가 입을 가리고도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메일은 전에 텔리야를 배웅하면서 잠깐 얼굴을 봤던 시클라민 후작을 떠올렸다. 선이 고우면서 눈에 띄는 미남이었지. 메일은 문득 둘의 연애담이 썩 범상치 않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시간이 되면 어떻게 보쌈했는지 들려드릴게요. 보통 기함하고 귀를 의심하긴 하지만.”

“역시…… 가 아니라, 네. 흥미로울 것 같네요.”

메일은 텔리야의 말에 호응하며 리엘라의 옆자리에 앉았다. 접시 위의 디저트에 닿기 직전인 리엘라의 머리카락을 능숙하게 정리해 주며 메일이 속으로 고민했다.

‘언제 이야기하지?’

그녀는 시클라민 후작저로 연락할 방법을 찾던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텔리야 본인이 알아서 면전에 나타나주었으니 기회도 이런 기회가 없다. 이 김에 반드시 용건을 꺼내야 할 텐데. 메일은 리엘라를 흘긋 쳐다보았다.

‘음…….’

갈등이 일었다. 그냥 여기서 말할까? 리엘라는 기본적으로 남의 행보에 무심한 인간이라 메일이 환락가에 다녀오겠다고 한들 구태여 목적을 캐묻지는 않을 것이다.

메일은 망설이다 로즈에게도 얼핏 시선을 주었다. 로즈라면 물어볼 것 같긴 하지만…….

그때 텔리야가 앉은 채로 눈을 반짝 빛냈다. 그녀는 조금 전부터 줄곧 메일만 주시하던 중이었다. 표정에 난감해하는 기색이 스미자마자 그것을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었다.

아무래도 할 말이 있는 낌새인데. 눈치 빠른 텔리야가 천연덕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도 곧 질 테고, 전 이만 가봐야겠어요. 짧은 만남이었지만 즐거웠답니다, 천사님.”

“잘 가.”

“나무 요정님이랑은 너무 금방 헤어져서 아쉬운데. 혹 실례가 안 된다면 별궁의 입구까지만 배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안 그래도 텔리야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내심 깜짝 놀랐던 메일이 냉큼 그러마 했다. 여기서 별궁 입구까지 가는 길은 가깝고 안전하다. 로즈는 굳이 따라 나오지 않았다.

입구까지 바래다 달라더니 텔리야는 대뜸 응접실로 향했다. 별궁의 복도는 경비가 삼엄해진 뒤로 사람이 없는 공간이 없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텔리야가 방긋 웃었다.

“저 잘했죠?”

“후작 부인.”

메일이 놀란 낯을 해보였다. 어쩜 이렇게. 완전 잘했다. 그녀가 박수를 쳤다.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걸.”

“제가 원래 미인의 마음을 읽는 재주가 탁월하거든요.”

텔리야가 치명적인 표정을 지으며 윙크했다. 이미 지난번에 십수 번은 더 본 것이라 메일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쨌든 고맙다고 인사한 뒤 텔리야에게 착석을 권했다. 두 사람은 곧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았다.

“그럼 말씀드릴게요.”

“가슴이 떨리네요. 저와 나무 요정님 둘만의 이야기라니, 뭘까요?”

“다름이 아니라 부탁이 있어서요.”

“부탁이요?”

텔리야는 이때 속으로 계산했다. 천사님이라면 심장까지 떼어줄 수 있고 나무 요정님이라면 간까지는 떼어줄 수 있겠다.

물론 메일이 원하는 건 그녀의 장기가 아니다. 메일의 말이 이어졌다.

“후작 부인의 시간을 하루만…… 아니, 한나절만 제게 주실 수 있을까요?”

목소리나 표정이 간곡했다. 잎사귀의 색을 옮겨놓은 듯 싱그러운 녹색 눈동자가 호소하듯 일렁인다. 텔리야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메일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냥 제 인생을 드리면 안 될까요?”

“네?”

“받아주세요.”

“아니요, 잠깐, 후작 부인.”

“부디 사양하지 마세요. 하루? 반나절? 너무 짧네요. 넉넉히 삼십 년쯤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텔리야는 농담을-농담이 맞길 바랄 뿐이다-진담처럼 하는 재주가 있었다.

메일은 그녀를 달래느라 한참이나 진땀을 뺐다. 30년이 길면 백번 양보해서 10년이라도 바치겠다고 외치는 텔리야를 겨우 진정시키고 메일이 숨을 돌렸다.

‘고민하느라 침묵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단순히 부탁하는 얼굴을 감상하는 시간이었던 걸까. 생각해 놓고 나니 정말 그런 것 같은데. 텔리야는 메일의 예상보다 더 독특한 인물이었다.

“시간은 하루만 받고, 음, 대신 후작 부인의 마음을 백년 치 받는 걸로 할게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그럼 언제쯤 제 시간이 필요하실까요?”

“어디에 쓸지는 안 물어보시나요?”

“후후, 어디든 나무 여신님과 함께할 거라고 생각하면 설레기만 하는걸요!”

“…….”

천재는 정말 괴짜였다. 메일의 깨달음은 깊었다.

“시간을 내어주시는 때는 빠를수록 좋아요. 가능하면 내일 당장에라도. 그리고 제가 그런 부탁을 드린 이유는…….”

메일은 장소에 대해선 숨길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작부와 말을 나누기 직전까진 함께해야 할 테니까. 목적만 감추고 그녀는 나머지를 솔직하게 입에 담았다.

“제도 동쪽의 환락가에 찾아갈 건데 동행인이 필요해서예요.”

“네? 환락가요?”

“그곳에 있는 엘리사라는 작부를 만나야 하거든요.”

“엘리사?”

시원하게 가로로 긴 텔리야의 눈이 깜박거렸다. 들은 것을 재차 인식하려드는 기색이 선연해서 메일은 얼굴에 열이 올랐다. 하지만 아직 설명이 끝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이 남았다. 귓가가 불그스름해진 채로도 메일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엘리사는 동쪽 환락가의 에이스라고 해요.”

“…….”

“…….”

메일로부터 핵심(?)을 전해 들은 텔리야가 침묵했다. 정적이 흘렀다. 조용하고 적막해진 공기. 창을 통해 미세하게 스며드는 풀벌레 소리까지 들릴 만한 고요였다. 텔리야는 눈을 잠깐 아래로 내리깔았다가, 이내 도로 치켜든 뒤 말했다.

“언제 출발할까요? 내일 아침?”

목소리와 눈빛에서 의욕이 넘쳤다. 환락가의 에이스라면 보통 대단한 미인이게 마련이다. 역시 신분도 출신도 따지지 않는군. 예상을 했으면서도 메일이 어색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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