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났군.’
반테르는 침음을 삼켰다. 거튼이 메일에게 적극적으로 들이대던 모습은 그의 뇌리에도 비교적 잘 남아 있었다. 아주 예사롭지 않았지. 메일이 말이 맞았다. 그는 필히 그녀를 찾으려들 것이다.
마침 때맞춰 또 뭐가 작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반테르는 돌아보는 대신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메일이 소리의 정체를 확인했다.
함에 이어 망가진 것은 펜대였다. 무슨 짓을 했는지 펜대는 부러지다 못해 산산이 조각나 있었다. 메일은 이번에도 얼른 황제의 손을 살폈다. 멀쩡한 것 같았다. 다행히.
‘왜 저래!’
앞서는 되도 않은 변명이라도 했던 황제가 이번에는 그저 굳은 낯으로 입만 다물고 있었다.
메일이 눈가를 찡그렸다. 안색이 피로하던 것도 그렇고, 아까부터 연달아 걱정만 끼쳐 대니 도무지 신경을 끌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진작 가서 대체 왜 이러냐고 등짝이라도 때렸을 것이다.
‘남 속도 모르고.’
좋아하는 사람을 한 공간에 두고 안 보이는 척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나. 갖은 애를 쓰고 있는데 자꾸만 쳐다보게 만드니 저절로 원망이 일었다. 그리 표정을 찌푸린 메일을 황제가 눈에 담았다. 그의 낯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
메일은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철렁 내려앉은 속이 쿵쿵 뛰었다. 정말 왜 저럴까. 진짜 왜. 걱정을 끼치는 것도 이 정도 수준이면 재주가 아닐까.
눈길은 거뒀지만 신경은 여전히 그리로 몰렸다. 그녀는 지금 맞은편에 앉은 반테르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리 내가 싫은가.”
“…….”
“짐에게 환멸을 느꼈나.”
“…….”
“그대를 속여서, 이젠, 눈을 마주하는 것도 싫고 얼굴을 보는 것조차 싫은가.”
메일은 시선을 탁자 모서리 어림에 고정했다. 뭐라도 응시하지 않으면 당연한 듯 상대를 쳐다보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렇게 억지로 시야를 유지하며 생각했다. 저게 무슨 말이지?
‘싫으냐니.’
그럴 리가. 애초에 이 난리를 쳐가며 백작을 다시 만나려고 하는 게 다 누구 때문인데.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메일은 거튼이 싫었다. 면전에서 저번처럼 또 물고기 취급을 당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친절히 욕으로 답해 주고 말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감수하고 만나려는 건 전부.
‘아.’
메일은 깨달았다. 황제의 오해를 납득했다. 그의 입장에서 그는 메일을 속이다가 들켰고, 들키자마자 그녀에게 작별의 말을 들었다.
그런 이후 그녀를 마주했는데 상대는 저를 쳐다보려 들지도 않고, 마지못해 눈길을 주더라도 금방 거둬버리느라 바쁘다.
‘그래서 싫어한다고…….’
그렇구나. 그래,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었다. 속았다는 사실에 대해 실망하고, 치를 떨고, 환멸을 느끼고, 그러해서 한순간에 마음이 식고 말았다고. 그렇게 믿고 있을지도.
그건 순전히 오해를 쌓아 만든 착각뿐인 믿음이었지만 메일은 어쩐지 선뜻 그것을 부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충동은 다른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이게 나을지도 몰라. 아니, 이게 나아.’
이미 끝을 다짐한 마당에 상대에게 제 마음이 남아 있다는 걸 알려서 뭘 어쩐단 말인가. 그건 어떤 측면에서든 좋을 것이 없었다.
작별을 고했으니 이대로 전부 끝난 것처럼 구는 게 맞다. 그녀는 앞으로도 한동안 황제를 위해 뛰어다닐 테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의 일이었다.
대답하지 않는 메일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황제가 웃었다. 웃었으나 웃지 않았다. 그는 마치 우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 그렇군. 그래.”
“…….”
“멀그므 백작을 만나도 좋다. 짐이 허하지. 모하임 경이 했던 말은 잊어도 좋아.”
“폐하.”
부름에 담긴 우려를 황제는 무시했다. 반테르는 걱정스럽게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단 그를 황궁 안으로 불러주지. 성 밖 제도까지 나가는 것은 위험하니 내성에서 얼굴을 보도록 해. 그 정도는 양보해 주었으면 좋겠군.”
“……황송합니다.”
메일이 눈을 들지 않은 채로 인사를 올렸다. 지척에서 반테르가 앓는 소리 비슷한 것을 냈다. 황제는 더 이상 메일에게 고개를 들 것을 명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