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려라 메일 (80)화 (80/144)

걸음을 옮기는 내내 메일의 시선은 바닥을 향했다. 물론 황제의 얼굴을 빤히 보며 입장할 수는 없으니 의도가 무엇이든 그건 예법에 맞는 행위였다.

메일은 순간 웃지 못할 생각을 했다. 이래서야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잘하면 땅바닥만 보다가 나가게 될 수도 있겠다.

“존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거리를 가늠하여 멈춰 선 그녀가 공손히 읍했다. 아래로 내리깐 시야에 아마도 반테르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이 들어왔다.

메일은 아주 잠깐, 이 상황이 그의 탓이 아님을 알면서도 내심 상대를 원망했다. 왜 하필 이곳에서 근무해서.

‘진정하자.’

메일은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요란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적막한 가운데 귓가에 선연히 울렸다. 아직 얼굴은 보지도 않았다. 고작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을 인식했을 뿐인데 심장은 혼자 앞서나가며 그녀의 의사를 무시했다. 제멋대로였다.

“……고개를 들어도 좋다.”

아마 과거에도 몇 번쯤은 들었던 말이 메일의 위로 떨어졌다. 황제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혹은 약간 쉰 것 같기도 했다. 메일은 순간 전날 밤을 떠올렸다.

그동안 감사했다고, 그렇게 인사를 건넨 뒤 돌아섰지.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나 그녀는 그 전부터도 하얗게 핏기가 가시던 황제의 얼굴을 기억했다. 그는 놀라고, 당황하고, 어쩌면 상처받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동작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굳어서는 그리 그녀만을 응시했다.

‘목소리가…….’

왜 아픈 사람의 것처럼 들리지. 메일은 가슴께가 아릿했다. 간밤에 혹시 앓았을까. 혹 잠을 못 잤나. 갖은 걱정이 뒤죽박죽 떠올라서 머릿속을 채웠다. 그녀는 쓸데없는 소리를 내뱉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황송하오나 감히 폐하의 용안을 마주 뵙기에는 소녀의 용기가 따르지 않습니다.”

“계속…… 그리 고개를 숙이고 있겠다는 뜻인가.”

“허락하여 주신다면.”

황제를 대함에 있어 담이 작은 자가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일은 흔하다. 메일은 차라리 이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구태여 얼굴을 봐서 뭐 하겠나. 어제 눈을 마주한 채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도 그리 고역이었는데.

아마 상대도 비슷하겠지. 엄밀히 말하면 어제 그는 그녀에게 차였다. 차여놓고 얼굴을 마주 보고 싶지는 않을…….

“허락 못 한다.”

“……네?”

“허락 못 해. 바닥을 보는 것을 불허한다. 영애는 고개를 들어.”

……줄 알았는데.

메일은 당황했다.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그대로 얼굴을 들 뻔했다. 의중이 궁금해서 상대의 표정을 들여다보려다 겨우 참았다. 그녀는 목소리에 제 당황한 심경을 담아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명입니다. 따르지 않으면 저를 벌하시렵니까?”

“아니.”

“…….”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일부러 묻는 건가.”

심장이 크게 박동했다. 메일은 제 것임이 분명한 고동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떴다. 황제의 말은 너무나 노골적이라 지나가던 멍청이가 들어도 그가 메일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대체 왜 이러나.

비록 듣는 이가 몇 없긴 해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메일은 결국 눈을 들었다. 저렇게까지 나오는데 더 버티고 있기도 어려웠다. 녹색 눈이 바닥이 아닌 앞을 담았다. 미동도 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의 얼굴이 다른 모든 전경을 내버리고 거짓말처럼 시야를 채웠다.

속이 울렁였다.

‘눈 밑이……. 피곤해 보이네.’

앓은 것은 아니고 잠을 자지 못했나 보다. 설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잠자리에 들지 않은 걸까. 잠이 너무 부족하면 열이 오르기도 하던데.

이마에 손을 대보고 싶다. 메일의 손이 드러나지 않게 움찔했다. 물론 그럴 수는 없었다.

메일은 황제를 위해 제국에 남기로 결심했지만 동시에 그를 보지 않을 결심 또한 마쳤다. 제 마음이 얼마나 깊든, 혹은 생각보다는 얕든 오래된 정인으로부터 그를 빼앗을 수는 없다. 그건 너무 당연해서 고려조차 해보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이기적일 수는 없었다.

황제는 그런 메일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한숨처럼 웃었다.

“내 망상은 아니었군.”

“네?”

“자리에 앉게. 반테르…… 모하임 경에게 용무가 있다고 했으니 그의 시간을 내어주지.”

집무실 한편에는 손님을 접대할 수 있는 간단한 소파와 테이블이 있었다. 황제는 그리 앉을 것을 권했다. 메일은 망설이다가 순순히 감사하다 인사하고 소파에 착석했다. 맞은편에는 반테르가 앉았다.

반테르는 뭐라 형언하기 대단히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공자님.”

“편하게 경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경, 부탁드릴 게 있어요.”

부탁. 이때 반테르의 속을 스친 감응이 있다면 당황스러움이다. 그는 곁눈질로 황제를 빠르게 담았다가 다시 상대를 마주 보았다. 예의상 입가는 미소를 그렸으나 속에선 땀이 흘렀다.

‘부탁씩이나.’

명령을 내려도 아니꼬우실 텐데. 황제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그를 뒤로하고 제가 메일의 부탁을 듣는 상황은 썩 속 편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설마 리엘라의 일인가 했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고.

대체 상대가 제게 개인적으로 할 만한 부탁이란 게 뭘까. 부디 사소하고 별것 아닌 것이기를 바라며 반테르가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거튼 멀그므 백작님을 만나고 싶어서요. 그분이 내성에서 근무하지 않는다는 건 확인했어요. 백작저의 위치를 알 수 있을까요?”

“예?”

반테르는 반문했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 나왔다. 이어서 그는 머릿속의 명단을 열심히 뒤졌다. 거튼 멀그므. 멀그므 백작. 아, 있다.

인상착의 같은 세세한 사항은 기억이 안 나도 최근 백작위를 승계받은 젊은 가주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그는 분명 젊은데다…….

남자였다.

“안 됩니다.”

“네?”

대답이 너무 단호히 나와서 메일이 놀랐다. 반테르는 저도 모르게 일단 거절부터 뱉어놓고 뒤늦게 이유를 찾아 허둥지둥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건…….”

‘알려준다고 하면 폐하께서 날 죽일 것 같기 때문이지.’

“……아무튼 곤란합니다. 혹 백작을 만나시려는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 흐르자 반테르의 기억은 더 명확해졌다. 거튼 멀그므는 작위를 승계받은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았으며 미혼이었다. 이제 보니 사교계에서도 그의 이름을 들은 기억이 난다. 그는 제법 유명 인사였다.

‘좋은 쪽은 아니지.’

반테르는 한때 사교계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던 일화를 기억했다. 양다리도 아니고 무려 네 다리를 걸치다가 걸린 한 영식은 그러고도 당당하여 많은 이의 공분을 샀다. 네 다리라니, 팔이라고 달고 다니던 것이 실은 앞다리였냐며 갖은 욕이 쏟아졌었지.

그때 그가 바로 거튼 멀그므였다. 당시엔 아직 백작이 아니었지만.

‘그런 인간을 왜 만나시려고.’

연이 닿아서 좋을 것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만약 상대가 제국민이었다면 혹시 친구를 위한 피의 복수를 하려는 것인가 생각했겠지만 그마저도 아니니. 그러한 반테르의 혼란에 메일은 해답을 주지 않았다.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었다.

“개인적인 용무라서요. 꼭 이유를 말씀드려야만 하나요?”

그놈이 황제에 대해 떠들었던 비사를 마저 캐물으러 간다고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반테르와 마찬가지로 메일의 낯에 곤란한 기색이 어렸다. 반테르는 한층 난감해져서 눈을 굴렸다.

“거창한 일을 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잠깐 만나서 대화만 나누었으면 싶은데. 물론 상대의 동의는 구할 거예요.

“그 난봉꾼이야 당연히 좋다고 동의하겠…… 아니, 아닙니다. 아무튼 그를 꼭 만나셔야만 하는 겁니까?”

“네.”

반드시, 라고 메일이 덧붙이자 반테르의 낯빛이 즉각 어두워졌다. 정말 안 되는데. 건실한 청년이더라도 남자라는 시점에서 이미 탈락이건만, 거기에 사생활이 난잡하기까지. 되짚고 되짚어도 최악의 인물이었다.

“조심스레 말씀드리자면 거튼 멀그므 백작은 영애께서 가까이 하셔서 좋을 인사가 못 됩니다. 사감이 아니라…….”

“알아요. 안면이 있으니까.”

“아, 그러시군요. 예?”

“연회에서 우연히 만나 얘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견실한 분은 아니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와 친분을…….”

쌓으려는 게 아니라.

그때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대단히 크지는 않아도 선명했다. 놀란 메일이 시선을 돌리고 그보다 빠르게 반테르가 소리의 정체를 확인했다.

“아, 뭘 좀 떨어뜨려서.”

황제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의 옆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변한 무언가가 있었다. 크기와 색으로 추정컨대 펜 따위를 꽂아두던 원형함인 것 같았다.

‘저거 나무도 아니고 돌로 만든 것 아니었나.’

반테르의 목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눈이 아니라 코로 봐도 저건 떨어뜨려서 만들어진 형상이 아니었다. 첨탑 위에서 지상으로 던졌다면 모를까. 궁색하다고 하기에도 민망한 황제의 성의 없는 변명에 메일이 미간을 살 좁혔다.

‘왜 갑자기 돌덩이를 박살 내고 난리야.’

그녀의 눈이 빠르게 황제의 손을 훑었다.

‘안 다쳤을까.’

메일의 속내를 모르는 반테르는 그녀의 찌푸려진 미간을 다르게 해석했다. 그는 일부러 과장된 어조로 주의를 끌었다.

“아하, 만나신 적이 있군요! 그러시군요! 네, 음, 용건이 있으시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정 안 된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래요, 어쩔 수 없죠.”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나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만나 봐야…….”

“그럼 상대편에서 저를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시간 낭비…… 예?”

“제가 움직이는 편이 좀 더 빠를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메일은 확신했다. 거튼 멀그므는 어젯밤 마치 성공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굴었다. 태도나 표정에서 이쪽을 다잡은 물고기라고 여기고 있던 것이 대놓고 티가 났다.

그런 와중에 황제가 나타나 예기치 않게 도망쳐야 했으니 당연히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을 것이다.

거튼은 한눈에도 아쉬움을 혼자서 삭일 만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하겠나. 당연히 놓친 것을 다시 잡으려 움직이겠지.

메일이 알면서도 기다리지 않은 건, 말한 것처럼 기다리느니 이쪽에서 행동하는 편이 더 빠를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반테르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곧 깨달았다. 머리를 후려치듯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녀가 찾고 있는 거튼 멀그므가 누굴 뜻하는지. 그의 자각은 황제에 비해선 한발 늦었다.

‘어젯밤에 바로 그…… 이런.’

반테르의 깨달음이 늦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지난밤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 중 그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남은 건 메일이 거튼과 나란히 사라지던 장면이 아니다. 그는 황제와 달리 리엘라에 대한 기억이 제일 선명했다. 그래서 늦은 것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