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려라 메일 (79)화 (79/144)

로하이덴은 묵직하게 내려앉는 가슴의 통증을 느꼈다가 이내 그것을 비웃었다. 무슨 자격으로 아프다 토로할까. 대체 무슨 염치로.

그는 이미 보다 전에 끝을 결심했던 때가 있었다. 그것도 이보다 훨씬 비겁하게. 차마 눈을 마주하고 헤어짐을 입에 올릴 용기가 없어 거짓말쟁이가 되어가면서.

그래놓고 이제 와 상대의 선언에 아파하는 건 얼마나 이기적이고 모순적인지. 그는 스스로를 실컷 비웃은 뒤 창가에서 눈을 돌렸다. 눈 밑이 피로하여 거뭇했다.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제발 처소에서 눈이나 좀 붙이십시오!”

황제의 존안을 마주한 반테르가 기어이 성을 냈다. 이 양반이 왜 이러는지 반테르는 이제 이유를 알았다.

어제 연회장에서 그런 일이 있었고 오늘 황제가 이 지경인데 원인을 유추하지 못한다면 그냥 머리를 떼서 반납하는 편이 낫다.

반테르는 생각했다. 이 미친 사랑의 힘. 생전 안 그러던 사람이 어떻게 저 지경이 되나. 그는 텔리야가 그리 열변을 토했던 진짜 사랑에 대해 아주 약간 알 것 같았다.

“경.”

“드디어 말하는 법을 되찾으셨군요. 축하드립니다.”

“경이 보기엔 어떻지?”

“폐하의 용안 말입니까? 심각하게 안 좋습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내가 왜 이젤린을.”

“처소에…… 예?”

“왜 그녀를 곁에 둘까.”

“…….”

“어떻게 생각하나?”

반테르는 말문이 턱 막혔다. 잠도 안 자고 한참이나 궁상을 떨던 사람이 난데없이 뱉어놓은 질문은 시점이 갑작스러움은 둘째 치고 내용 자체가 퍽 어처구니없었다.

왜 이젤린을 곁에 두냐니. 이젤린 텐고트는 황제의 정인이지 그의 정인이 아니었다. 제가 어찌 아나.

“……외람되지만 신이 답할 수 없는 부분 같습니다. 텐코트 영애의 어떤 부분이 폐하의 마음에 드셨는지는.”

“그런 게 아니야.”

“예?”

“나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 믿었어. 이유는 몰라도 지켜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니 이게 연정인가 보다 했다. 그랬는데.”

“…….”

“그게 아니야.”

황제는 단호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부정을 들으며 반테르는 과거 어느 순간을 떠올렸다.

‘내가 궁금한 건 한 가지야. 폐하, 혹시 그 영애한테 빚지셨어?’

언제였나, 아마도 후작저에서였다. 의문스럽다는 듯 끝이 올라가던 텔리야의 목소리가 아득히 환청처럼 울렸다.

맙소사. 반테르는 드러나지 않게 기함했다. 제 여동생이 전부터 눈치가 빠른 편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그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니었다니.

“우습지만 그건 연정이 아니었어. 대단히 늦게도 알았지. 하면 나는 왜 그녀를 지키고 싶은 걸까.”

“…….”

“왜 의무처럼, 그게 이리도 나를 옭아매는가.”

“…….”

“내게 과연 그 이유를 알려줄 이가 있을까? 경, 어찌 생각하지?”

“……글쎄요, 영애 본인이라면…….”

반테르는 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대답하다가 멈칫했다. 답을 하다 말고 그는 돌연 반문했다.

“폐하, 그럼 그것이 연정이 아니라는 걸 깨달으신 지는 얼마나 되신 겁니까?”

“의혹이 든 지는 꽤 됐지.”

로하이덴이 처음으로 제 마음을 의심하기 시작한 건 후계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였다.

회의석에 앉은 귀족은 이른 후사 문제를 안건으로 올리며 이젤린의 건강을 지적했다. 과연 그 병약하고 마른 몸으로 탈 없이 황실의 씨를 출산할 수 있겠냐는 것이 문제의 요지였다.

그리고 그때 황제는 무의식중에 이젤린과 저의 아이를 상상했다가 치미는 거부감에 입을 틀어막았다.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아직 상대와 잠자리를 갖지 않은 것은 핑계를 대기에 따라 사랑해서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에 대한 거부감이라니? 그건 도저히 무엇으로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이젤린을 황후에 올리지 않은 건 한편으론 그래서였다. 옥체 강녕한 젊은 황제와 황후의 사이에 다년간 아이가 없으면 그것은 결국 황후의 흠이 된다. 실상이야 어떻든 석녀라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붙게 될 가망이 높았다.

거부감 탓에 아이는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젤린을 오점이 있는 여자로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만들 수도 없다. 그래서 그녀는 황후나 비가 되지는 못 하고 그저 황제의 곁에서 비호만 받았다. 어정쩡한 위치는 적통 문제를 들먹여 후사를 피하기에는 오히려 용이했다.

참고로 황제가 과거 정원에서 메일에게 답해 주지 못했던 ‘왜 황제가 정인을 황후로 들이지 않는가’에 대한 남은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때까진 막연한 의심에 그쳤을 뿐이었다. 어렴풋이 불가해에 대한 옅은 의문만 품을 뿐 차마 사랑이 아니다 확언하지는 못 했다. 누굴 좋아해 본 적이 없어 비교가 불가능했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확신을 한 것은 최근이지만.”

“그럼…… 주제넘은 질문이라면 미리 죄송합니다. 폐하, 텐코트 영애를 곁에 두시는 이유 말입니다. 그것이 알고 싶어지신 까닭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반테르의 의문은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이랬다. 이유를 알고 나면 과연 이젤린 텐고트를 놓을 수 있겠냐는 거다.

황제는 그녀를 지켜야 할 것 같은 감정이 의무처럼 저를 옭아맨다는 표현을 썼다. 의무의 이유를 알게 되면 그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나?

황제는 그를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뭘 묻고 싶은지 알겠다. 실은 저도 그에 대해 내내 고민했던 것이 불과 최근이니까. 황제의 답은 침묵이 한 바퀴쯤 둘을 휘감고 지나간 이후에 흘러나왔다.

“억울하니까.”

“…….”

“이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간절히 원하는 것을 놓쳐야 한다고 생각하니 속이 뒤틀릴 만큼 억울해서.”

“…….”

“차라리 이유라도 알면 덜 억울할까, 그리해서.”

그는 낙관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자마자 자연스레 이젤린을 끊어내고 메일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붙잡는다고 그녀가 순순히 붙잡혀 줄 거라 염치없이 믿는 것 또한 아니다. 어쩌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 생각하면서도 그는 알고 싶었다. 이유가 궁금했다. 궁금함에 절박함이 깃들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이번에 처음 배웠다. 이대로 무지한 채 가만히 있다가는 속이 뒤틀리다 종내 짓이겨지고 말 것 같았다.

차라리 알면. 이유라도 알면 그렇게 속이 문드러져 죽지는 않겠지.

“……알겠습니다.”

반테르는 여러 번의 실연을 겪었으나 그 때문에 아파해 본 경험은 전무했다. 그래서 황제의 고통에 제 것처럼 공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친우이자 신하로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신을 마음껏 부려주시죠. 성심껏 돕겠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이유인지 저도 좀 압시다.”

신하라기엔 말투가 불충하여 누가 들어도 친우로서였다. 황제는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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