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려라 메일 (76)화 (76/144)

“예?”

“그게 무슨…….”

반테르는 이 자리에 모인 귀족 중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 인사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가 내뱉은 뜬금없는 자기소개는 누구도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노란 머리 영식을 포함한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혼란스러워했다.

그때 먼저 눈치를 챈 것은 로즈였다. 그녀의 전사(?)로서의 감은 아군을 감지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화색이 된 로즈가 입을 열었다.

“네, 그렇습니다. 사실 저는 첫 번째 관문에 불과했습니다.”

로즈의 눈치는 메일과 비등했다. 본래 빠른 편이던 것이 리엘라를 모시면서 더 빨라진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능청스럽게 반테르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로 이분께서, 저를 넘은 다음 또 넘어야 하는 두 번째 관문이십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린가!”

귀족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슬슬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번 발화자인 로즈가 만만해서이기도 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그들의 아름다운 습성을 알고 있는 반테르가 한발 움직여 로즈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선 입을 연다.

“아름다운 공주님의 곁에 시녀만 있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시녀와 기사. 한 묶음입니다.”

“예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아, 아니. 그럼 그 말은 공자께서 저 공주님의 기사다, 이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반테르는 시원하게 긍정했다. 리엘라는 반테르가 갑자기 제 기사가 되는 광경을 새로 받은 초코푸딩을 들고 멀뚱히 바라보았다. 혹시 그녀가 초를 칠까 봐 로즈가 얼른 리엘라에게 속삭였다.

“공주님의 장갑을 버리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이곳에서만 잠시 공주님의 기사가 되어주실 겁니다.”

“응. 나 쟤랑 아는 사이야.”

“아, 그러십니까?”

로즈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원군이 반갑기는 했지만 낯선 인물이라 걱정했는데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라니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이 도움은 흑심이 섞이지 않은 단순한 호의일 수도 있겠다.

로즈가 그렇게 안심하는 사이, 노란 머리 영식이 항의에 들어갔다.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가, 갑자기 나타나셔서 그러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영식은 이 자리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록 편법을 썼다지만 태산 같은 관문을 무찌르고 이제 달콤한 과실이 눈앞이었다. 그랬는데 그걸 두 눈 멀쩡히 뜨고 놓치게 생겼으니 그의 입장에선 청천벽력일 만도 했다. 반테르는 미소를 유지하며 대꾸했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아, 아무리 그래도…….”

“그래서 영식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뭐라고 하셔도 저를 넘지 않고는 공주님께 접근하실 수 없습니다. 정 억울하시다면 제가 핸디캡정도는 지도록 하지요.”

“예? 핸디캡이라면…… 어떤?”

“절 넘으시려거든 대련을 통해 꺾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대련에서 저는 왼손만 쓰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반테르는 오른손잡이다. 그건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의 위치만 봐도 쉬이 알 수 있다. 반테르가 내건 핸디캡에 영식이 고민하듯 조용히 눈을 굴렸다. 솔깃한 낌새였다.

“……크흠, 머슬 경. 어때? 경의 주 영역은 팔씨름이 아니라 실은 검술이 아닌가. 할 수 있지…… 않을까?”

로즈의 앞에서 그리 당당하게 편법을 썼던 영식은 이번에는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는지 언성을 슬그머니 낮췄다.

하나 곁눈질로 살핀 반테르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다. 영식이 그에 히죽거리는데 머슬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뭐? 왜?”

“도련님께서도 한때 검을 쥐셨으니 아실 게 아닙니까? 모하임 공자께선 이미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신 분입니다.”

마스터. 그게 무엇이냐 하니 바로 검에 흰 빛무리를 씌울 수 있는 수준을 말한다.

초반에는 별다른 명칭이 없었는데 누군가가 검에 통달했다는 뜻으로 마스터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그게 공식적인 이름이 됐다. 영식은 눈을 껌벅이다가 이내 이마를 긁적였다.

“알긴 하는데…… 그게 그렇게 대단해?”

“도련님.”

머슬이 표정으로 기함했다. 제 주인이 멍청한 건 진작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눈치가 없어서 그 불경한 낯을 알아먹지 못한 영식이 연이어 고개만 갸웃했다.

“경도 실력자이지 않나. 왼손만 쓰겠다는데. 정말 안 돼?”

“호위 때려치울까…….”

“좋습니다.”

그때 불쑥 반테르가 입을 열었다. 조르듯 굴던 영식도, 제 처지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던 머슬도 그에 눈길을 주었다. 반테르는 둘을 번갈아 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왼손만 사용하고, 더해서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나가던 하인을 붙잡았다. 하인은 식기를 옮기던 중이었다. 그 중에서 나이프를 하나 집어 든 반테르가 말을 이었다.

“제 무기는 이걸로 하겠습니다.”

“뭐? 푸하하하! ……하하.”

혼자 빵 터졌던 노란 머리 영식이 주변의 눈총에 얌전히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리 상대의 행동이 허무맹랑해도 소리 내 비웃기엔 그의 신분이 너무 높았다. 대다수는 비웃는 대신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 진심이십니까?”

“아무리 공자님이시라지만, 그건.”

“지나치게 불공정한 핸디캡이 아닐지…….”

“아, 아니! 다들 무슨 소리십니까?”

이러다 무산되기라도 할까 봐 당황한 영식이 얼른 다수를 가로막으며 나섰다. 그는 반테르가 비교적 가벼운 핸디캡만 걸었을 때도 승산이 있다고 믿은 인물이다.

그런 와중에 핸디캡이 왕창 추가되었으니 영식에게 이건 결코 놓칠 수 없는 황금 같은 기회나 다름없었다. 그는 소리 높여 피력했다.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닙니다. 공자께서 먼저 제안하신 게 아닙니까?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해 드려야지요!”

“아니 뭐, 그야…….”

“모하임 공자님, 그렇지 않습니까? 핸디캡에 변동은 없는 거지요?”

영식이 기대 서린 얼굴로 확인하듯 물었다. 반테르는 그의 낯에서 절박함을 읽고는 순간 튀어나올 뻔한 웃음을 삼켰다. 그렇게나 공주에게 말을 걸고 싶을까. 한편으론 대단했다.

‘나름 마성의 공주님이군.’

정작 인기의 중심에 선 본인은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리엘라는 그새 푸딩을 다 먹고 바닐라 에클레어를 포크로 자르고 있었다.

저렇게 보면 얼굴은 예뻐도 역시 영락없이 애 같은데. 이성으로 보이는 게 신기하군. 반테르는 그렇게 생각하며 영식의 물음에 답했다.

“물론입니다.”

“좋습니다! 하하! 그렇다면 저는, 어흠. 저의 충성스러운 기사인 머슬 경을 도전자로 세우겠습니다.”

머슬 경의 의사는 묵살되었다. 강제로 떠밀린 머슬이 설핏 미간을 구겼다.

그의 주인인 노란 머리 영식은 이미 승리를 따놓은 것처럼 희희낙락했지만 그는 조금도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기사들에게 있어 마스터란 신과 같다. 솔직히 어떤 유리한 조건을 쥐더라도 맞서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어쩔 수 없지.’

머슬은 이것을 요행으로 얻은 앞선 승리에 대한 대가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앞으로 나서는 그의 표정이 비장했다. 긴장해서 진지해진 그의 기세를 자신감으로 받아들인 영식이 뒤에서 좋다고 응원을 날렸다.

판이 깔리자 귀족들은 알아서 뒤로 물러났다. 몇 걸음씩만 서로 걸음을 물리자 간격은 금세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생겨났다. 그 원 가운데 반테르와 머슬이 마주 보고 섰다.

반테르는 여전히 본래 서 있던 그 자리에 있었다. 리엘라는 로즈가 데리고 물러섰다. 머슬이 꿀꺽 침을 삼켰다.

“……진검으로 합니까?”

“편한 대로.”

오른손은 쓰지 못하며,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 하고, 무기는 한 뼘짜리 나이프를 든 반테르의 목소리는 외려 사지가 자유롭고 장검을 든 머슬보다 훨씬 평온했다.

머슬의 음성은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몸담은 가문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연봉 협상을 시도하겠노라 결심했다.

“후후, 그럼 시작…… 아, 혹시 심판이 필요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모호하게 결판나지는 않을 테니까.”

반테르가 차분히 못 박았다. 그에 영식은 내심 이죽거렸다. 나이프를 쥐고서는 뭔 개폼이람. 그러나 정작 대치한 머슬은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잔뜩 긴장했다. 이를 악문 그가 이내 자세를 잡았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상대는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으니 그가 덤벼드는 게 당연하다. 기합을 내뱉은 머슬이 이어 바닥을 박찼다.

근육 때문에 둔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그의 속도는 꽤나 빨랐다. 근육과 스피드의 동시 단련에 관심이 깊은 로즈가 반짝 눈을 빛냈다.

순식간에 상대의 지척으로 다다른 머슬의 검이 반테르를 덮쳤다. 막중한 힘이 실린 장검은 핸디캡 탓에 무력해진 한 사람을 그대로 쓰러뜨릴 것처럼 보였다. 그때 반테르가 슬쩍 왼손을 움직였다.

챙!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나이프에 가로막힌 검이 반테르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멈춰 섰다. 그리 막아낸 검신을 옆으로 흘린 반테르가 나이프의 손잡이로 번개처럼 머슬의 손등을 찍었다.

안 그래도 상대가 검을 흘리면서 자세가 무너졌던 머슬이 그에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쥐고 있던 검을 놓쳤다.

챙그랑.

이어 무기를 잃은 머슬의 목에 나이프가 닿았다.

끝이었다.

“…….”

사위는 침묵했다. 구경꾼은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도 눈이 있으니 결판이 났다는 건 안다. 공방의 여지없이 깔끔하게 끝났다. 그러나 이건 빨라도 너무 빨랐다.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조용해진 관중에다 대고 반테르가 담담히 선언했다.

“끝났습니다. 뒤이어 도전하실 분은 지금 나오시면 됩니다.”

“이, 이게 무슨!”

노란 머리 영식이 버럭 외쳤다. 눈을 부릅뜬 그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계속해서 반테르와 머슬을 번갈아 응시했다. 하얗게 변한 그의 낯을 가득 채운 건 경악이었다.

반테르가 나이프를 내리자 자세를 수습한 머슬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지도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머슬은 전에 알던 사실에 다시 한 번 감탄하는 중이었다. 몸으로 부딪히고 새삼 깨달았다. 마스터는 역시 하늘 위의 경지였다.

머슬이 깊은 존경을 표하고 물러나자 영식이 그런 머슬을 뭔가 굉장히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실제로 무어라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그가 아무리 멍청하고 눈치가 없어도 이게 일방적인 패배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제, 제길.”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얼굴이군요. 원한다면 직접 도전해도 좋습니다. 영식께도 동일한 핸디캡을 적용시켜 드릴 테니.”

“……아닙니다.”

영식은 억울하여 씩씩거렸으나 금방 꼬리를 말았다. 좀 전의 그 대련을 보고도 덤비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게 정신 나간 인간이다.

실상 그가 억울해할 것도 없었다. 말을 나눌 권리를 얻는다고 해서 그게 리엘라를 어떻게 해볼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마치 다 얻은 제 여자를 빼앗긴 듯 구는 영식의 태도는 남들이 보기엔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결국 두 번째 관문은 너무나 막강하여 이후 아무도 덤비지 않았다. 머슬이 패배하자 곧바로 쭉정이가 된 영식을 포함해 도전자는 없었다. 리엘라를 노리던 귀족들은 그렇게 불가능해진 목적을 포기하고 너도나도 자리에서 퇴장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