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려라 메일 (73)화 (73/144)

저러다 뚫어지겠네. 반테르는 생각만 하고 말로 꺼내진 않았다.

‘그나저나 보기 민망할 정도로 몰려드는군.’

얘가 거절당하면 쟤가, 쟤가 거절당하면 그 옆의 쟤가. 연회장 안의 남자들은 도통 메일과 로즈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과 계속 말을 섞으며 상대하는 건 메일이었으니 황제는 그에 심기가 불편해진 모양이지만, 실상 저 지경이 만들어진 원인은 리엘라였다. 그들은 줄을 지어 온통 리엘라에게 구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만큼인가?’

반테르는 약간 의아했다. 리엘라가 예쁘다는 건 물론 그도 눈이 있으니 알고 있었다. 저번 정원에서 봤을 때보다 오늘이 더 예쁘다는 것도 역시 보이니까 알았다.

그렇지만 그게 저 정도 낯부끄러운 광경을 연출할 정도인지는 여전히 조금 의문스러웠다.

‘취향의 차이인가?’

하기야. 반테르는 혼자 답을 내리고 납득했다. 이건 조금 다른 경우지만 그가 텔리야를 볼 때는 그저 눈, 코, 입 따로따로인 천방지축 선머슴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들이 그녀의 첫인상을 평가하는 단어는 ‘늘씬한 미녀’였다. 들을 때마다 기함하는 표현이었지만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르니 반테르는 요새는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그때 어떤 훤칠한 미남이 메일에게 말을 걸었다. 호수를 닮은 연푸른색눈동자에 이성을 많이 만나 본 듯 자신감 넘치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을 줄 아는 남자였다.

오, 잘생겼는데. 물론 폐하께는 댈 수 없지만. 반테르가 속으로 그렇게 평한 순간이었다. 메일이 깜짝 놀라며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켰다. 그러자 미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테르가 깜짝 놀랐다.

‘헉?’

대화는 들리지 않지만 분위기로 봐서 저 미남은 분명 노선이 달랐다. 앞선 남자들과 달리 리엘라가 아니라 메일을 목적으로 말을 걸었다. 반테르는 그 모습을 당황스럽게 쳐다보다가 얼른 옆을 돌아보았다.

‘음…….’

팔걸이 부서지겠다. 반테르는 황제의 손등에 선 힘줄을 보며 생각했다.

미남과 메일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위치 때문에 메일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미남이 퍽 적극적으로 들이대고 있다는 것은 대충 주시해도 알 수 있었다.

반테르는 속으로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혹시 황제가 이성을 잃고 저 미남을 죽이려고 들면 당장 몸을 던져 막는 거? 오, 그럴듯했다.

그때 황제가 입을 열었다.

“저 개…….”

‘개?’

“……영식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군.”

개에서 갑자기 영식으로 바뀌었다. 반테르는 알 것 같았다. 실제로는 개자식이라고 하고 싶었겠지. 황제의 말은 반테르의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번역되었다.

‘저 영식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군’ 이걸 번역하면 즉 ‘저 개자식은 뭐 하는 놈이야?’.

“흔한 생김새는 아니군요. 시종장이나 다아라 백작이라면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 부를까요?”

“…….”

곧장 그러라고 대답할 것 같았던 황제는 의외로 침묵했다.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물론 마음 같아선 당장 신상 명세는 물론이요, 온갖 은밀한 개인 정보에 과거사, 사돈의 팔촌까지 조사해서 알아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과는 달리 주저하는 이유를 반테르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격 때문인가.’

그건 도의적으로 보호될 권리가 있는 제국민의 신상을 멋대로 털어도 되냐 아니냐 같은 문제는 아니었다.

막말로 황제의 권력은 무소불위다. 잡음은 있겠지만 당장 이 자리에서 상대를 잡아다 공개적으로 터는 짓도 의향만 있으면 할 수 있었다. 그럼 뭐가 문제인가.

걸리는 것은 황제와 메일의 관계였다.

연애 방면 불세출의 둔치인 반테르라도 지금 황제의 심경 정도는 알았다. 질투 때문에 속에서 불기둥이 치솟고 활활 난리가 났겠지.

경험해 본 적은 없어도 들은 적은 있어서 안다. 애먼 팔걸이를 부서져라 잡고 있는 것을 보니 질투가 나도 보통 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과연 질투를 해도 되는가?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렇지. 이게 문제다. 여기서 바로 답이 없어진다. 반테르가 보기에 황제와 메일은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

황제가 보여준 태도로 보아 그녀를 마음에 둔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정작 상대는 그걸 모르는 눈치고-머리핀이 함 안에 들어 있었던 것도 몰랐으니-황제 또한 이렇다 할 행동은 하지 않는다. 뭐 하자는 건지 알 수 없는 구도였다.

‘짝사랑……?’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낸 반테르가 흠칫했다. 헉, 이거 충격적이지만 가능성은 있는데. 그런데 정말 너무 충격적이다.

그러는 사이 메일이 미남에게 뭐라뭐라 말했다. 그러자 직후 미남이 환해진 얼굴로 메일을 밖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 응? 둘이 함께 사라져?

반테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옆을 돌아보았다.

“…….”

황제의 상태야 말할 것도 없었다. 식은땀을 한 방울 흘린 반테르가 지나가던 시종을 불렀다. 그러곤 인상착의를 설명해 준 뒤 따라가서 몰래 주시하라 일렀다. 명령은 받지 않았지만 상관을 생각한 신하의 마음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시종이 회장 밖으로 사라지자 황제의 표정이 아주 조금 나아졌다. 물론 너무 조금이라 유의미하다기엔 민망할 정도이긴 했다.

반테르는 쟁반으로 음식을 나르던 하녀가 우연히 황제의 용안을 보곤 깜짝 놀라 발을 헛디디는 모습에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너무 살벌하십니다, 폐하.’

그렇지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메일이 미남을 따라 홀 밖으로 나가던 장면은 아무 상관없는 반테르에게도 상당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왜 가냐는 질문이 속에서 저절로 솟았다. 아니, 물론 연회에 참석한 두 미혼 남녀가 서로 눈이 맞아 자리를 이동하는 건 딱히 드문 일이 아니지만. 거기다 잘못도 아니지만. 알면서도 반테르는 괜히 따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왜 가시죠? 그 회색 머리 미남이 그렇게 마음에 드셨나요? 여기 더 미남이 있는데요?

‘잠깐, 그러고 보니 이쪽 미남한테는…….’

반테르는 불쑥 깨달았다. 아차. 이쪽 미남은 훨씬 잘생겼어도 하필 여자가 있네. 그걸 잊었다.

‘이런. 너무 큰 문제야.’

이젤린 텐고트를 떠올린 반테르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텔리야의 주장에 따르면)진짜 사랑은 못 해봤어도 순정남이었다.

동시에 두 여자를 옆에 두는 건 양심에 털이 난 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리고 그가 알기로 황제의 양심은 반들반들했다.

‘그래서 뭐 어쩌지는 못 하고 저렇게 속만 끓이시나.’

그리 생각하면 자업자득이었지만 그래도 가까운 이의 편을 들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반테르는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머리핀이나 간직하고 있었던 황제가 조금 안쓰럽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이젠 그마저도 없는데. 우리 폐하 앞으론 어떡하나. 자초한 거라지만 왠지 불쌍한 마음이 드는 건 상대가 내 월급을 책임지는 상관이어서겠지. 반테르가 그렇게 생각하며 보이지 않는 눈물을 찍어낼 때였다.

순간 뭔가를 떠올렸는지 황제가 크게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폐하?”

저게 뭐 하는 표정이지. 갑작스런 황제의 표정 변화에 반테르가 저도 모르게 황제를 불렀다.

황제의 낯은 놀란 것 같기도, 혹은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복잡한 낯빛에서 그나마 명확하게 읽히는 것은 바로 다급함이었다. 황제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반테르의 물음은 무시당했다. 사실 그도 별로 대답을 바라고 질문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들은 체 정도는 해주길 바랐는데 황제는 그마저도 않고 옥좌를 박차고 나갔다.

말려 볼 기회조차 없이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반테르가 어안이 벙벙하여 눈을 깜박였다.

“아니…….”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신 분?

반테르는 아연해져서 빈 옥좌를 바라보았다. 팔걸이를 부술 기세긴 했어도 잘 앉아 계시던 사람이 왜 갑자기 저렇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람.

그는 응시하던 빈자리에서 눈을 떼고 천장을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운 벽화와 샹들리에가 눈부셨다.

기사단 시절 함께 근무했던 동기가 툭하면 하늘을 쳐다보며 ‘늙는다’고 푸념을 하곤 했었는데. 반테르는 갑자기 그 동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튼은 희희낙락했다. 초반 상대의 예상치 못한 철벽에 당황하긴 했지만 어쨌든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연회에서 남녀가 단둘이 자리를 옮긴다는 건 곧 게임 끝이란 의미가 아닌가? 더구나 테라스도 아니고 인적 드문 정원이었다. 그는 성공을 예감했다.

‘그래. 닿을 수 없는 황제보단 눈앞의 미남인 내가 낫지.’

답 없는 착각에 빠져 거튼 멀그므는 홀로 성취감에 젖어들었다. 메일은 떨떠름하게 그런 상대를 바라봤다.

상대는 잘생김으로는 다섯 손가락 끄트머리에 겨우 드는 정도였지만 ‘얼굴이 아까운 인간’ 순위로는 당당히 1위였다.

‘앗, 아니지. 오르밀이 1위인가?’

그렇다면 남자 부문 1위로 정정하자. 그런 메일의 생각을 전혀 알 길 없는 거튼이 부드럽게-그러나 메일의 눈에는 느끼하게-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녁 공기가 시원하군요. 마치 우리의 만남을 축복하는 것처럼 말이죠.”

“전 추워요.”

“이런! 레이디, 연약하시군요. 아니면 혹시 바람이 영애의 아름다움을 질투한 걸까요?”

거튼의 개수작은 통하지 않았다. 메일은 호응은커녕 들은 척도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백작님께서 조금 전 연회장에서 하셨던 이야기가 궁금해요.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나요?”

“예? 제가 했던 이야기라면.”

“황제 폐하에 대한 것 말이에요.”

정확히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비에 관한 이야기. 메일의 직접적인 말에 거튼이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설마 자리를 옮기자고 한 이유가?”

“연회장 안은 이야기를 더 듣기에 적합하지 않은 공간이었으니까요. 짐작하셨을 줄 알았는데요.”

“아니…… 저는 영애께서 마음을 바꾸신 줄 알았죠. 제 설득을 듣고.”

“그게 설득이었나요?”

메일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처구니란 어처구니는 아까 연회장에서 다 소진한 줄 알았는데 아직 잃어버릴 것이 남아 있었다는 게 신기했다. 거튼은 그에 도리어 본인이 기가 차다는 듯 펄쩍 뛰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럼 뭐 하러 입 아프게 그런 얘기를 합니까, 제가.”

“호사가이신 줄 알았죠. 설득을 위해 황제 폐하의 돌아가신 대비 이야기를 꺼내다니 대단하네요.”

“그러니까 그건! 영애의 마음이 사랑이 아닐 거라는 말을 하다가 나오게 된 이야기죠. 사랑이 아니라 모성애일 거라고요.”

메일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피치 못하게 파생된 이야기치곤 그것이 본론이라도 되는 양 열심히 말하지 않았었나. 상대는 간택전과 국모를 운운하며 사족까지 붙였던 건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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