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택전의 후보라는 방패는 미혼 귀족들의 춤 신청을 막는 것에 별반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들도 실상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택전이 원하는 것은 사랑받고 권력을 쥐는 진짜 황후가 아니라 단지 대신들의 불만을 잠재울 일시적인 병풍 황후라는 것을.
그러니 후보 관리에 눈에 불을 켜지도 않을 것이며, 어차피 탈락할 몇 후보가 중간에 다른 노선으로 갈아탄다 한들 구태여 막아서지도 않을 것이다.
젊은 귀족들에게 지금 이 연회는 빼어난 타국 미녀와 불타는 인연을 만들 수 있는 기회의 장이나 다름없었다.
메일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대단히 드문 확률로 어쩌면 혹시 만에 하나 리엘라의 마음에 드는 인물일 수도 있으니, 일단은 얼굴을 보고 나서 거절해야 했다.
물론 리엘라의 눈은 하늘에 달려 있었으므로-황제 이하 못생김-여태 그런 경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전 거튼 멀그므 백작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말을 건 사람은 훤칠한 젊은 귀족이었다. 짙은 회색의 머리카락을 깔끔히 빗어 넘기고 그에 맞춘 옅은 회색의 연미복을 큰 키에 맞게 잘 차려입었다. 호수를 연상시키는 연푸른색 눈동자는 색이 맑아 그런지 나름 깊이가 있어 보였다.
메일은 상대를 마주하고 내심 놀랐다. 거튼 멀그므 백작이라 저를 소개한 그는 여태 리엘라에게 흑심을 보인 남자 중에 가장 잘생긴 인물이었다.
아니, 구태여 집단을 한정 지을 필요도 없다. 그는 외모로만 따지면 지금껏 메일이 본 이성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혹시?’
메일이 아주 잠깐 고민했다. 이 정도라면 공주님도 마음에 들어 할까? 리엘라는 지금 바로 뒤에서 로즈가 가져다준 크림브륄레를 먹고 있었다. 갈등하던 메일이 이내 금방 고개를 저어냈다.
미남이기로 따지면 반테르 또한 만만치 않다. 탄탄한 몸에 훤칠한 키, 깊고 맑은 물처럼 선명한 남청색 눈동자는 뭇 여성들의 비명을 자아내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그런 반테르를 제 운명의 상대라고 착각했을 때 리엘라가 보였던 반응을 떠올려 보자. 그녀는 하늘이 쪼개진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역시 당치도 않았다.
‘내가 공주님을 너무 예쁘게 꾸며드려서 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이 실패의 쓴잔을 마시는구나. 적당히 할걸. 죄 많은 나.’
“죄송하지만 지금 공주님께선 춤을 추실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시라…….”
“이런, 제가 오해를 드렸나요? 그럴 여지는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네?”
“저는 공주님이 아니라 영애에 관한 것이 궁금합니다. 아름다운 레이디, 부디 제게 시간을 내어주시겠습니까?”
“……네?”
메일은 당황한 나머지 두 번이나 반문했다. 반문한 다음 리엘라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남자를 쳐다보았다가, 이내 손가락 하나를 세워 저를 가리켰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눈엔 이 연회장의 어느 분보다 영애께서 아름답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정말 감사…… 가 아니라, 실례지만 왜 저인가요?”
메일이 진심을 담아 물었다. 그건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금 본인이 어떤 차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온 질문이었다.
장신구란 장신구는 죄 생략하고 드레스는 무려 민무늬 고동색. 차림새에 성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차라리 저번처럼 밑단만 비취색인 흰 엠파이어 드레스를 입고 있었을 때라면 모를까.
‘아, 쓸데없는 기억이 생각났어.’
어두워지는 메일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남자가 진지하게 말했다.
“저는 화려한 것을 아름답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실 화려하여 아름답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진실로 아름다운 것은 수수함 속에서 피어난다 생각합니다. 가령 제 앞에 계신 영애처럼.”
“…….”
아하. 메일은 상대가 주장하고 싶은 바를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자긴 꾸며서 예쁜 여자는 됐고 꾸미지 않아도 예쁜 여자가 좋다는 말 아닌가.
‘눈이 높으시네.’
상대가 제게 접근한 마당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조금 부끄럽기는 했지만 하여튼 그랬다. 물론 눈이 높은 걸로 뭐라고 할 의향은 없다.
본인도 어디 가서 꿇리지 않을 만큼 잘생겼으니 어디선가 원하는 이상형을 만나 깨를 볶고 잘 사시겠지. 다만 메일에겐 그 깨를 볶아줄 마음이 없었다.
메일은 차분히 거절의 말을 꺼냈다.
“관심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이성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요.”
“예?”
남자는 제가 거절당할 거라곤 생각을 못 했는지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다 표정을 추스르곤 입을 연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제 입으로 이야기하긴 그렇지만 저는 제 자신이 꽤나 이성에게 호감을 주는 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작님 탓이 아닙니다. 그저 제가…….”
“폐하 때문입니까?”
남자의 말이 기습적으로 메일을 찔렀다. 그는 메일을 간택전의 후보라고 생각하여 한 말이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건 메일이 속을 들킨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게 만들었다. 그에 제 생각을 확신한 남자가 말을 이었다.
“이런 말씀 드리고 싶지 않지만 헛된 기대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미약한 확률을 뚫고 황후가 된다고 한들 폐하께서 마음을 내어주시진 않을 겁니다.”
“백작님, 저는…….”
“폐하께는 오랜 정인이 있습니다. 벌써 삼 년이 넘었습니다. 폐하께서 얼마나 그 정인을 끔찍이 위하시는지 아십니까?”
메일이 숨을 멈췄다. 남자의 말은 송곳처럼 메일을 파고들었다. 안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무려 직접 듣기까지 했다.
정인을 너무 아끼고 아껴서, 혹시 풍파에 아파할 새라 황후의 자리에 올리지 않고 그녀를 위해 다른 희생양을 뽑는 중이라고.
알지만 억지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남자는 배려 없이 메일을 난도질했다.
여태 황제가 있는 방향으론 눈길조차 주지 않고 다른 것에 집중하면서 겨우 지켜온 마음을 기어이 끄집어내어 송곳으로 찔렀다. 얼음으로 된 송곳은 상처만 잔뜩 낸 뒤 도로 녹아버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말이야 내뱉고 나면 그만. 하지만 이미 다친 사람은 어떻게 하나. 드러나지 않게 주먹을 쥔 메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백작님께 들을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더욱이.”
“저는 어디까지나 영애를 생각해서.”
“제가 바라지 않아요. 그만해 주세요.”
“영애.”
언제 보았다고 남자는 끈질기기도 했다. 메일은 이제껏 누굴 거절할 때보다 머리가 아팠다.
그녀는 상대가 저러는 이유가 제가 그만큼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오기 때문일 거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존심이라도 상했나. 하지만 이럴수록 회복은커녕 더 상할 뿐일 텐데.
“심한 말로 백작님을 거절하고 싶지 않습니다. 헤아려 주셨으면 해요.”
“영애께서는 폐하를 마음에 품으신 겁니까?”
메일은 말문이 막혔다. 이번엔 속내를 찔려서가 아니라 어처구니가 없어서. 남자는 놀라울 정도로 자기 할 말만 했다. 귀는 들으라고 있는 걸 텐데 왜 쓰지를 않는지.
메일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리엘라는 언제 거리를 벌렸는지 다소 떨어진 곳에서 디저트를 빵빵한 볼 안에 밀어 넣고 있었다. 보아하니 로즈가 진작 그녀를 데리고 눈치껏 자리를 피해 준 모양이었다.
의도는 달랐겠지만 어쨌든 다행인 일이다. 황제 운운하는 남자의 말을 둘에게 고스란히 들려주었다면 퍽 난감할 뻔했으니까.
시선을 회수한 메일이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백작님과 말을 나누지 않겠습니다. 사람을 부르기 전에 가주세요.”
“영애만 다치는 일입니다. 어차피 안 될 마음이에요.”
“……제국에서까지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저기, 미안하지만 여기 경비병을 좀.”
“혹 모성애와 착각하신 건 아닙니까? 종종 그런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모친의 부재에 안타까워하며 결핍을 채워주고 싶은 마음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가급적 빨리 와 달라…… 네?”
메일이 멈칫했다. 시종에게 경비병 호출을 부탁하던 와중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남자에게 눈을 고정한 메일이 다시 물었다.
“뭐라고 하셨나요?”
“그러니까 이게 드문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제국에 온 뒤 폐하를 몇 번이나 뵈셨습니까? 먼발치서 본 것만으로 사랑에 빠지기에는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모친의 부재라뇨?”
“예?”
남자는 눈을 몇 번 껌벅이다 이내 아, 하곤 대답해 주었다.
“대비께서 안 계시지 않습니까.”
“대비…… 요?”
메일이 들은 것을 되묻듯 입에 담았다. 대비는 선황의 비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후비. 만약 황제의 생모가 황후였다면 그녀는 살았든 죽었든 대비라고 불리지 않는다.
황제는 후실의 소생이었다.
“그래서 사실 이번 간택전이 한편으론 떠들썩했습니다. 폐하의 어머니가 안 계시니 제국의 국모 자리가 내내 공석이었으니까요. 황후를 맞이하면 어쨌든 국모의 자리가 채워지긴 하니까.”
“그럼 언제부터…… 아니.”
입을 다문 메일이 주변을 살폈다. 황제의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이곳에서 들을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메일은 자문했다.
알고 싶나?
알고 싶었다. 왜? 그의 이야기니까. 그러나 또 섣불리 결단이 서지 않았다. 당사자에게 듣는 것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알아도 되는 걸까.
그때 메일과 눈이 마주친 남자가 거의 반사적으로 웃었다. 딴에는 매력적인 미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물론 얼굴이 잘났으니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았으나 남자는 이미 메일에게 밉보인 상태였다.
순간 메일의 속에서 울컥 뭔가가 치밀었다.
‘쟤도 아는데.’
자존심이 상했다. 이걸 자존심이 상한다고 표현하는 게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속이 답답하고 억울함 비슷한 기분이 드는 것이 마음을 충동질하기엔 충분했다. 결국 메일이 입을 열었다.
“자리를 옮겨도 괜찮을까요?”
남자는 반색했다. 그는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지나가는 길에 붙잡혔던 시종은 그런 남자와 메일을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번갈아 쳐다보다가, 경비병을 부르는 것을 일단 보류했다.
잘생긴 남자는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어도 잘생겼다. 그걸 몸소 실천으로 알려주는 황제를 보며 반테르가 한마디 했다.
“기분이 안 좋으면 먼저 들어가시죠.”
“아니.”
즉답이 튀어나왔다. 빠르기도 해라.
반테르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눈길을 좇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황제는 아까부터 우직하게 한곳만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 끝에 위치한 걸 확인한 반테르가 속으로 혀를 찼다.
리엘라와 메일, 그리고 로즈의 조합은 눈에 띄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리엘라를 가운데 두고 메일과 로즈가 철벽을 치듯 남자들의 접근을 방어하고 있는 모습은 멀리서 보기에도 장관이었다.
물론 황제가 그걸 장관이라서 보고 있는 것은 아닐 테다. 황제의 눈길은 집요하게 한 사람에게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