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 것은 전날 일이다. 벌써 하루가 지났다. 그러나 로즈와 리엘라는 여전히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로즈는 그렇다 치고 리엘라가 얼마나 당황했느냐 하면, 그녀는 메일이 운다는 것을 깨달은 뒤 놀랍게도 무려 메일의 눈치를 봤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봐도 좋은 일이었다.
리엘라는 황제의 앞에서도 존댓말만 썼을 뿐 눈치를 보지는 않았다. 충격적이게도 이번이 최초였다.
덕분에 메일은 본의 아니게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 재고하는 시간을 가져 볼 수 있었다. 혹시 나 외로워도 슬퍼도 절대 울지 않는 강철의 여인 이미지였던 걸까. 별로 그렇지 않은데.
“공주님, 저도 원래 잘 울어요. 아프거나 슬프면 울어야죠. 사람인데.”
“알아.”
안다고 대답한 것치고 리엘라는 여전히 뻣뻣한 표정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그 덕에 메일은 조금 정신을 차렸다.
평소답지 않게 남을 신경 쓰는 리엘라를 보는 건 황당하고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론 미안한 일이었다. 마치 아이에게 걱정을 끼친 못난 어른이 된 기분이라고 할까.
메일은 씩씩한 척 웃었다.
“오늘 연회가 엄청 성대하다면서요? 제가 공주님을 연회장에서 가장 예쁘게 꾸며드릴게요.”
리엘라는 여태 메일의 만류 및 조언 아래 1목 1목걸이, 1머리 1머리 장식 정도는 지키고 있었지만 드레스나 장갑이 눈 아프게 휘황찬란한 것은 여전했다.
메일은 이번에야말로 리엘라의 드레스에도 손을 뻗치겠노라 다짐했다. 나풀거림이 적은 흰 드레스를 잘 골라 입혀놓으면 리엘라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구름 위에서 내려온 천사 같을 것이다.
지금껏 드레스에 대해선 타협을 불허해 왔던 리엘라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슬금슬금 메일을 살피고 있던-지금은 울지 않는지-리엘라는 메일이 웃으면서 말하자 일단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용은 뒷전이라 뒤늦게 치장을 다 마친 뒤 ‘이게 아닌데’ 하고 당황할지는 모르지만 그거야 나중 일이었다. 메일은 옳다구나 치장에 들어갔다.
리엘라는 그렇게 한참 단장을 받다가 말했다.
“너는 안 꾸며?”
“꾸민 거예요.”
“안 예쁘잖아. 반짝반짝하지도 않고.”
“왜요? 나무 같은데.”
메일은 그렇게 둘러댔지만 사실 이번 대화에서는 리엘라의 말이 맞다.
메일은 별다른 장신구 없이 가지런히 빗어 내리기만 한 머리에 무늬가 없는 고동색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었다. 사람에 따라 수수한 걸 넘어 연회에 부적절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법한 차림이었다.
그러나 메일은 이 이상 밝거나 화려하게 치장하고 싶지가 않았다. 옷차림은 그날의 심경을 대변하기도 한다. 지금 같은 기분으로 발랄한 드레스를 입어보았자 내키지 않은 음식을 먹어 체한 듯 답답하기만 할 것이다.
리엘라는 메일의 나무 같다는 말에는 또 반박할 말을 찾기 어려웠던 모양인지 그냥 고개를 잠깐 갸웃하고 말았다. 화분이 없는 나무는 어쨌든 잎을 빼고 온통 갈색이긴 했으니까.
“다 됐습니다.”
“어머나, 너무 아름다우시네요.”
시간이 흘러 리엘라의 치장이 끝났다. 마무리를 마친 시녀들은 평소와는 달리 아끼지 않고 감탄을 쏟아냈다. 다른 때처럼 묵묵히 인사만 남기고 퇴장하기에는 단장을 마친 리엘라가 너무 예뻤던 탓이다.
풍성한 금발을 반은 묶고 반은 늘어뜨렸다. 진주 가루가 뿌려진 새하얀 드레스는 상체를 따라 굴곡을 드러내다가 엉덩이 중반쯤에 이르러 나풀거리며 퍼졌다.
나풀거리며 원을 그리는 천은 여러 겹으로 되어 있었는데 가장 바깥 천이 얇은 베일처럼 투명했다. 그리 투명한 천 하단에는 비취 가루가 은하수처럼 수놓아져 있었다.
귀걸이는 분홍빛이 아주 살짝 감도는 진주를, 머리 장식은 잎사귀를 닮은 작고 앙증맞은 것을 꽂았다. 목걸이는 일부러 생략하고 화장은 새하얀 피부를 더욱 생기 있어 보이도록 하는 것에 주력했다.
리엘라가 그 모습으로 황금색 눈동자를 깜박거렸다. 그녀는 마치 실수로 인간 세계에 떨어진 천사 같기도, 혹은 그런 천사들의 사랑을 받는 미의 여신 같기도 했다.
메일이 솔직하게 경탄했다.
“예상은 했지만…….”
“드레스가 너무 가벼운 것 같아. 목도 허전하고.”
“아니에요, 공주님. 완벽해요.”
메일은 지금의 리엘라라면 오르밀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한때 오르밀의 미모는 리엘라보다 약간 위로 평가되었지만 그건 리엘라가 과한 치장으로 외려 제 외모를 죽이고 다녀서 그렇다. 한껏 타고난 아름다움을 드러낸 리엘라는 이 순간 누구와 비교하더라도 견줄 사람이 없었다.
“로즈가 봐도 분명 완벽하다고 할 거예요. 어느 때보다 제일이요.”
로즈는 지금 사서 마론과 썸을 타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다. 그런 것을 용인해 주는 점에서 리엘라는 마음이 넓은 주인이었다.
“그래? 그렇게 예뻐?”
“그럼요.”
“그렇다면 뭐.”
화려한 장신구와 프릴의 부재로 허전해하던 리엘라는 연이은 칭찬에 금방 콧대를 세웠다. 시녀들이 마침 박수까지 치며 호응해 주자 허전함에서 오던 어색함도 잊고 한층 의기양양 기뻐한다.
메일은 리엘라가 보여주는 리엘라다운 모습에 피식 웃음을 삼켰다.
축하연에는 꽤나 많은 귀족이 참석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정말 야만족 토벌 성공을 축하해서는 아니고 그보다는 실상 궁금해서였다.
각국에서 내로라하는 미녀들만 뽑아 보냈다는 간택전의 후보들은 과연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1차 간택을 통해 이미 그 수가 반으로 줄었다지만 그래도 뭇 사내들의 호기심에 불을 지피기에는 충분했다.
그들은 기꺼이 일이나 놀 거리를 미루고 마차를 달려 황궁으로 향했다. 거튼 멀그므 백작 또한 그중 한 명이었다.
거튼은 고작 이십 대의 나이로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은 젊은 백작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작위는 없이 단지 백작가의 영식이었던 그가 하루아침에 백작이 된 데에는 치정 싸움에 휘말린 아버지가 갑자기 삶에 염증을 느껴 가주직을 때려치우고 대뜸 귀농을 해버렸다는 황당한 배경이 있다.
말릴 새도 없었다. 외아들 거튼 멀그므는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백작이 되었다.
“백작이고 뭐고. 나는 아직 창창하다 이겁니다.”
중얼거린 거튼이 멀끔하게 차려입은 채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스물넷이었고, 미혼이었으며 여전히 일보다는 노는 것이 훨씬 좋았다.
멀그므 백작가가 쌓아놓은 재산이 워낙 많아 거튼 한 명쯤 대충 살아도 별반 문제가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거튼은 곧 본궁의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이야.”
너른 연회장은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용인과 갖가지 술과 음식, 그리고 한껏 차려입은 사람들로 정신이 없었다.
후보들은 따로 참석을 권유하는 첩장을 받지 않았음에도 다들 빠짐없이 참석한 듯 곳곳에 눈에 띄는 미녀가 가득했다. 미녀 구경이 목적이라면 그야말로 눈이 즐거워지는 풍경이었다.
술을 집어 들고 한 모금 마신 거튼이 감상을 뱉었다.
“눈이 부시는데.”
그러나 말과는 달리 그는 별달리 감흥이 인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눈에 들어오는 광경을 죽 훑으면서 생각했다.
‘다들 너무 꾸몄어.’
거튼의 취향은 수수한 미인이었다. 그러니까 수수한데 미인. 꾸며서 미인보다 배는 찾기 힘든 까다로운 취향이었지만 그는 스스로의 눈이 별로 높지 않은 편이라고 믿었다.
그때 연회장의 음악이 멈췄다. 그리고 북과 나팔이 울렸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황제의 등장이다. 회장 안을 둘러보던 것을 멈추고 거튼이 시선을 집중했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역시 잘생기셨군.’
황제는 오늘도 빛났다. 백금발을 깔끔하게 넘기고 검정색 연미복을 차려입은 그는 등장하자마자 당연한 듯 이곳의 주인공이 되었다.
부러움이나 질투는커녕 경외심이 드는 외모에 거튼이 혀를 내둘렀다. 그는 내심 제가 오늘 검정색 연미복을 선택하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반테르 폰 모하임 공자도 참석했군.’
거튼은 황제의 옆을 응시했다. 황제의 공식적인 오른팔 반테르는 황제를 보필하듯 곁에 서서 함께 입장했으나 기사의 복장이 아닌 깔끔한 연회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오늘의 연회에는 호위 기사가 아닌 한 명의 귀공자로서 참석하겠다는 의미일 테지. 거튼이 흠, 신음을 흘렸다.
그는 반테르를 은근히 (외모)라이벌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낭패감 따위가 일지는 않았다. 상대와 저는 각자 원하는 이성관이 썩 다르다.
거튼은 반테르가 선호하는 얌전하고 정숙한 여성은 취향이 아니었다. 오늘 이곳에서 파트너 문제로 충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조금 더 구경하다가 골라볼까.’
거튼은 그렇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회장 안을 돌아다녔다. 그의 눈에 이채가 인 것은 얼마 후였다.
살다 보면 때때로 의도하지 않은 일이 뜻밖의 도움을 주곤 한다.
“부디 제게 아름다운 레이디와 한 곡 출 수 있는 영광을…….”
“공주님께서 지금 몸이 안 좋으셔서요.”
열다섯 번째 춤 신청을 거절하면서 메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메일은 제 안목을 십분 발휘해 리엘라를 연회장 제일의 미녀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건 부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여파를 낳았다. 연회에 참석한 미혼이란 미혼 귀족은 죄다 리엘라에게 춤 신청을 하면서 들러붙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웃으면서 돌려보냈던 메일은 횟수가 거듭되자 땀을 닦았다.
“이건 예상보다 더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메일과 함께 리엘라를 지키는 데 일조한 로즈가 동의했다.
그렇다면 이 난처한 상황은 메일에게 대체 무슨 도움이 되었나? 그건 바로 그녀에게서 여유를 앗아갔다는 점이다.
메일은 리엘라에게 접근하는 놈팡이를 구분하고 쳐내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것은 즉 그녀가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도록 해주었다.
황제가 입장한 뒤 메일은 일부러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쳐다보았을 때 가슴이 내려앉을 것이 두려웠고, 눈을 떼지 못할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의도적인 노력은 곧 강제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한숨 돌렸다 하면 새로운 인간이 나타나 리엘라에게 말을 걸어대는 통에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메일은 귀족들의 연이은 치근거림 덕에 황제를 보며 마음 아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애매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젠 좀 쉬었으면 좋겠는데…….”
“아름다운 레이디,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