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려라 메일 (69)화 (69/144)

야만부족 세브족은 에드지 영지의 공식 무법자다. 아니, 무법자였다.

현재형이 과거형이 되었다는 걸 모르는 그들이 본거지에서 좋다고 술을 퍼마셨다.

“이 구역의 진짜 무법자는 우리야!”

“케케케!”

“술맛 좋다!”

민가를 약탈하여 빼앗은 술은 꿀맛이었다. 고된 노동은 영지민이 하고 꿀은 그들이 빠는 작태는 누가 보아도 불합리했지만, 세브족에겐 그저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취기가 오른 그들이 들썩들썩 어깨춤을 추며 즐거워했다.

“저번 약탈 때 너무 많이 쓸어왔나? 아무리 먹고 마셔도 남네.”

“터는 거 적당히 조절 좀 하자. 우리가 정기적으로, 어? 자주 바깥으로 나가줘야 영지민들이 우릴 안 까먹고 벌벌 떨지.”

“옳으신 말씀! 푸하하!”

“멋지고 늠름한 우리는 공포의 대상~ 그 이름하야 최강의 세브족! 낄낄…… 응?”

일상에 이변에 생긴 건 그때쯤이었다. 야비한 얼굴로 야비하게 웃던 한 야만족이 웃음을 뚝 멈췄다. 뭔가를 자세히 보려는 듯 눈가에 주름을 잡은 그가 이내 옆 사람을 툭툭 쳤다.

“건두리쥐 마~”

“그만 처마시고, 야, 저게 뭐인 것 같냐?”

“엉?”

“저거 사람 아냐?”

그들은 산속 깊은 곳에 터전을 잡고 산다. 워낙 험한 지형이라 십 년을 넘게 살아온 그들 외에는 아무도 이곳까지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멀찍이 입구 부근에서 아른거리는 인영에 술을 입으로 가져가던 남자가 대충 대답했다.

“싸러 나갔던 놈이 돌아오나 보지~”

“잠깐, 야, 미친놈아. 자세히 좀 봐봐.”

“왜 이래?”

“저거 우리 부족 놈 아닌데?”

멀리 있던 인영은 조금씩 가까워졌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흐릿하던 상대의 형상이 자세히 보였다.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환한 백금발에 차려입은 옷은 별다른 무늬가 없음에도 알아서 귀태가 났다. 술잔을 든 채로 멈칫한 남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게?”

“전에 우연히 봤던 여기 영주도 저렇게 재수 없을 만큼 귀태가 줄줄 흐르진 않았거든? 저놈 뭐지?”

“어디 돈 많은 집 자식인가? 엥, 그런데 그런 놈이 여길 왜 와?”

그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의아해하는 사이, 낯설고 귀태 흐르는 인물은 한층 가까이 다가왔다. 간격이 좁아지자 이제 생김새도 눈에 들어온다. 한 야만족이 분노했다.

“뭐야! 저 쓸데없이 잘생긴 놈은! 누가 저런 거 들여보내래?”

“계집애들이 꺅꺅대게 생기긴 했군. 하지만 진짜 사내다운 얼굴은 우리처럼 늠름한…….”

“이 정신 나간 놈들아!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냐? 침입자라고!”

개중 가장 술을 덜 마신 야만족이 답답함에 제 가슴을 쾅쾅 쳤다. 그제야 나머지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차, 그렇지. 낯선 인물은 귀태가 흐르고 잘생긴 것이 다가 아니었다.

침입자는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세브족이 들고 있던 술잔들을 집어 던졌다.

“술잔 버리고 도끼 들어라, 얘들아.”

“이미 들었수다.”

“오냐, 그럼 겁도 없이 이리로 쳐들어온 곱상한 놈 심문 좀 할까? 거기 얼굴 뺀질뺀질한 형씨! 뭐 호위 기사 같은 거 주렁주렁 달고 다니게 생겨서는 어쩐 일로 이런 데를 혼자 왔을까?”

세브족은 십년이 넘게 영지에서 자작과 공생했다. 아이였던 이들이 자라 성인이 되면서 무리의 전력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었다.

무장한 부대가 들이닥친대도 상대할 자신이 있는 판에 검을 들었다한들 고작 한 놈은 그들에게 장난감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다수의 야만족과 대치하고도 침입자의 얼굴엔 동요가 없었다. 적당한 거리를 띄우고 멈춰 선 그가 입을 열었다.

“아이는 어디 있지?”

“뭐? 방금 저놈이 뭐라고 했냐?”

“애새끼가 어디 있냐고 묻는데요.”

“애? 애가 어딨는 줄 우리가 어떻게 알아. 어이, 애는 모르겠고 애송이가 어디 있는지는 알려주마. 애송이는 바로 우리 앞에 있지! 하하하!”

“크하하!”

좋다고 웃는 야만족에게서 침입자가 시선을 거뒀다. 그의 눈이 세브족의 터전 안을 구석구석 훑었다. 곧 눈길이 한군데에서 멈춘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노예처럼 허드렛일을 담당한 듯 부르튼 손으로 천막 근처에 쓰러져 있었다. 지쳐 잠든 것인지 기절한 것인지 모호했다.

침입자가 차분히 말했다.

“아이를 챙겨.”

누구한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야만족이 표정을 찌푸리는 순간 나무 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야만족 무리가 흠칫 놀라고, 바닥으로 조용히 내려앉은 사람은 쏜살같이 튀어나가 아이를 품에 안고 돌아왔다. 야만족이 막기는커녕 뭘 어떻게 해보려고 시도조차 할 새도 없던 속도였다.

아이를 안은 채로 친위병이 고개를 숙였다.

“나머지는 명령하신 대로 조금 떨어진 곳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말씀만 내리시면 바로 소탕을 시작하겠습니다.”

“됐다. 아이를 데리고 물러서라.”

친위병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순간 ‘예?’ 하고 되물을 뻔했다. 그야 그럴 만한 것이, 그의 주인이 대단히 답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지금 야만족을 손수 토벌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그러나 그는 익히 알았다. 지고하신 그의 주인은 제 몸에 피가 튀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곁에서 보필한 세월이 일이 년이 아니었으니 그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일 리 없다. 그런데 어째서?

“명을 받들겠습니다.”

하나 친위병에게 감히 다른 대답을 한다는 선택지는 없다. 그들은 충성심으로는 누구도 댈 자가 없는 집단이었다. 명은 이행하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내용이든.

친위병이 물러서자 로하이덴이 눈을 돌렸다. 그는 야만족을 응시하며 천천히 검을 뽑았다. 친위병이 보여준 신위에 잔뜩 당황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상대를 비웃지 않았다. 긴장한 세브족 무리가 저마다 손에 든 무기를 있는 힘껏 쥐었다.

“하, 한 놈인데 뭐.”

“그래, 한 놈이잖아.”

“애를 안은 쪽은 안 나설 것 같은데?”

그러나 그들이 깨달았어야 하는 것이 있다. 나서지 않는다는 것은 즉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는 것을.

세브족은 그날 제국의 하늘 아래에서 사라졌다. 그들의 터전은 더 이상 지도 위에 존재하지 않았다.

클리버는 얌전히 1층에서 황제를 기다렸다. 조금 전에 돌아온 토벌대를 보고 식구들은 전부 겁에 질린 기색을 보였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황제는 피 칠갑을 하고 있어도 사신이 아니라 소녀의 구세주였다.

영민한 클리버는 은혜를 모른 척하는 것이 싫었다. 뭐라도 도움이 되어서 받은 것을 갚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은 소녀가 황제에게 대체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답을 모르면서도 그냥 무작정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왜 들어가지 않고.”

얼마나 있었을까. 간편한 차림새를 한 황제가 1층으로 나왔다. 클리버는 꾸벅 절을 올려 인사를 한 뒤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황제는 녹색 눈동자가 저를 쳐다보는 것을 막지 않았다.

“폐하.”

“이야기 상대가 필요해서 그러느냐?”

“아니요. 제가 이야기 상대가 되어드리고 싶어서요.”

클리버는 영민하고, 그만큼 눈치가 빨랐다. 어린 소녀의 눈에 비친 황제는 가슴에 무언가 커다란 것을 얹고 있는 어른이었다.

아이와 달리 어른은 간혹 괴로워도 괴롭다고 토로하지 않는다. 그것이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소녀의 요청에 황제는 침묵했다. 이어 말한다.

“후원으로 나갈 생각이다. 원한다면 따라와도 좋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나란히 후원에 섰다. 자작저의 후원은 경치가 썩 빼어나지는 않아도 바람이 잘 들어 선선했다. 클리버는 자기 키만 한 초목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아카데미에 있을 때는요.”

“…….”

“친구들이 저를 종종 ‘오늘의 이야기님’이라고 불렀어요. 고민이나 그런 것들을 정말 잘 들어준다고요.”

“…….”

“다들 속에 있는 걸 꺼내놓고 나면 후련해진다고 했어요. 그게 무슨 이야기든.”

황제는 소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건 결국 그를 웃게 만들었다. 그의 심복도 그에게 묻지 않았던 걸 이런 어린아이에게 들키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그러나 구태여 감추고자 했던 것은 아니니 상관없을까.

황제의 이야기는 클리버가 초목을 다 구경하고 시선을 땅으로 내렸을 때쯤 흘러나왔다.

“짐이…… 모르는 것이 있는데.”

“…….”

“그것이 짐을 많이 괴롭게 한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모르는 것을 알게 되면 더는 괴롭지 않게 되나요?”

“글쎄. 아마도. 괴롭지 않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 시도할 수는 있겠지.”

“음…….”

클리버는 골몰했다. 땅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초목을 쳐다보았다가, 그런 다음 입을 열었다.

“그것은 폐하도 모르시는 건가요, 아니면 폐하만 모르시는 건가요?”

“뭐?”

“폐하만 모르시는 거라면…… 누군가 아는 사람이 있지도 않을까요?”

클리버는 그렇게 말한 다음 도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만요. 도움이 못 되어서 죄송해요. 덧붙이는 클리버의 머리를 큰 손이 꾹꾹 쓰다듬었다. 아니, 괜찮다.

도움이 되었어.

그리 답하는 황제의 표정은 조금 전과는 어딘지 미세하게 달라져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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