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이야 있겠어.’
리엘라는 붙고 모르아도 공주는 떨어졌다. 그러나 합격자는 무려 마흔 명이 넘었다. 그중 두셋쯤 골라 시비를 건다 해도 그녀가 리엘라에게 수작을 걸어올 확률은 1할 이하로 떨어진다.
메일은 수학적인 추산을 믿었다. 설마 그날 연회장에서 모르아도 공주가 경고를 날린 게 리엘라 한 명뿐이겠어?
그러나 설마의 취미는 사람 잡기다. 메일은 그걸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부탁드려요. 이 자리의 모두가 증인이 되어주세요!”
메일은 어안이 벙벙했다. 모여든 후보들과 사용인이 수군거렸다. 모르아도 공주가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솔직히 이런 불미스러운 일을 입에 올리는 것이 내키지 않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요?”
그녀가 말을 할 때마다 풍성한 분홍색 머리카락이 솜사탕처럼 부드럽게 흔들렸다. 공주는 저녁 하늘 같은 다홍색 눈동자를 깜박이며 말을 이었다.
“다른 것도 아닌 황궁의 명예가 걸린 일인걸요.”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메일은 조금 전을 회상했다. 오늘은 저녁부터 본궁에서 연회가 열렸다. 간택전의 책임자로 새로 취임한 으리다 백작의 소개 및 인사 자리 겸, 탈락한 후보들을 위한 위로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탈락한 후보에겐 위로연이지만 붙은 후보에겐 축하연이다. 메일은 거처에 남을까 하다가 으리다 백작이 어떤 사람인지 아주 약간 궁금하기도 해서 리엘라와 함께 연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곳에서 갑자기 모르아도 영애가, 아니, 그녀의 측근이 손을 들고 물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백작님.’
‘무엇입니까?’
‘도둑질은 죄인가요?’
‘질문의 뜻을 모르겠습니다만, 표면 그대로 대답해 드리자면 도둑질은 죄가 맞습니다.’
‘그럼 도둑질을 한 자는 죄인이지요?’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죄인은 간택전의 후보 자격을 유지할 수 있나요?’
이때 연회장은 크게 술렁였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이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리엘라는 로즈가 말해줘서 알았다.
모르아도 공주의 측근은 주장했다.
이곳에 도둑질을 저지른 후보가 있다.
이미 탈락한 후보라면 자격 유지를 운운할 필요가 없으니 합격한 후보들 중에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후보들은 저마다 제 일행을 돌아보며 수군거렸다. 웅성거림을 잠재운 것은 으리다 백작이었다.
‘주장을 확실히 하겠습니다. 영애께서는 이곳에 모인 1차 합격자분들 중에 도둑질을 저지른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맙소사!’
‘세상에, 대체 누구지?’
기껏 잠재운 소란은 한층 크기를 키워 일어났다. 이번엔 백작 또한 완전히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만큼 충격적인 주제였다. 그때 모르아도 공주가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세요. 노메러 왕국의 모르아도 드 노메러입니다. 여러분께 이런 이야길 전하게 되어 심히 유감입니다.’
왕족의 기품이 깃든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좌중이 알아서 집중했다. 공주가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죄인이 있습니다. 누구인지는 제가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곧 한 사람을 지목했다. 지목을 당한 이는…….
‘부디 순순히 죄를 인정하셨으면 좋겠어요. 리엘라 드 벨티에 공주.’
바로 리엘라였다.
그렇게 되어 지금이다. 메일은 한 치의 거짓 없이 진실만을 말하듯 당당한 모르아도 공주의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 이곳의 누구도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감히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의 가장은 빼어났다.
‘내 연기력은 아무것도 아니었어.’
메일이 이상한 것에 패배감을 느끼는 사이 모르아도 공주가 이어 주장했다.
“저도 사실 조금 전에 안 사실이에요.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한 한 하녀가 제게 제보를 해준 덕분이죠. 내내 안절부절못하기에 이상하게 여겨 연유를 물었더니 바로 털어놓더군요.”
리엘라는 실시간으로 범인으로 몰리고 있으면서도 별반 동요 없이 태연했다. 자기가 하지 않은 짓에 대해 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개념이 애초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반면 로즈의 표정은 무섭게 굳었다. 주인이 누명을 쓰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메일은 모르아도 공주의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건 확률의 높고 낮음을 떠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체 뭘 훔쳤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게 뭐든 리엘라에게는 몰래 도둑질을 할 만한 잔머리나 은밀함이 없었다. 능력 밖이란 소리다.
물론 실정을 모르는 구경꾼들은 쉽게 흔들렸다.
“궁금하네요. 공주가 뭘 훔친 거죠?”
“지금부터 말씀드릴게요. 리엘라 공주께서 훔친 물건은…… 후우, 저도 쉽게 믿기지 않네요. 그건 바로…… 황제 폐하의 물건이랍니다.”
“세상에!”
“어쩜 그럴 수가!”
지금까지 중에 가장 큰 반응이 나왔다. 회장 전체가 크게 들썩였다. 나름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며 지켜보고 있던 으리다 백작도 이번엔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메일 또한 함께 놀랐다.
‘황제의 물건?’
모르아도 공주는 배짱이 대단했다. 박수를 받아도 좋을 정도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명을 씌우면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를 팔 수는 없는 일이다. 그가 무슨 동네 개도 아니고.
‘으음…… 하기야, 그 정도는 되어야 이런 자리에서 공론화를 시킬 만하겠지.’
그렇대도 용감하긴 하다. 메일은 속으로 상대의 배짱을 인정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설계해놓은 상황을 전부 알아야 어떻게 빠져나갈 구멍을 찾든 말든 할 테니까. 모르아도 공주는 술렁임이 조금 진정되길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하녀는 제게 이야기했어요. 리엘라 공주의 거처를 정돈하던 도중, 그곳에서 몹시 익숙한 물건을 보았다고요. 처음에는 잘못 보았나 생각했다고 해요.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건…… 폐하의 집무실에 있었던 물건이라고 하더군요.”
“어머나……. 대체 어떤 물건이기에?”
“그건 저도 잘 몰라요. 다만 보석 따위가 들어갈 만한 작은 함이었다고 해요. 백금으로 된 표면에 상단과 측면엔 각각 황금색과 은색 용이 새겨져 있는.”
“물건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하녀는 그것을 발견하기만 했지 손을 대지는 않았다고 했어요. 그녀의 고백이 사실이라면 그 함은 여전히 리엘라 공주의 거처에 있겠죠. 저는 이 자리에서 사람을 보내 찾아보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로즈가 굳은 표정으로 메일에게 속삭였다.
“제가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메일은 그에 고개를 저었다.
로즈는 모르아도 공주에게 매수된 사람이 리엘라의 거처에서 찾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물건을 다른 곳에서 가져올 거라 의심하는 눈치였지만, 메일은 공주의 수를 그보다 높게 평가했다.
오르밀도 아닌 모르아도 공주가 그리 허술할 리 없었다. 아마 진작 거처에 물건을 숨겨둔 상태일 것이다. 로즈가 동행해 봤자 은폐를 목적으로 따라붙는다고 의혹의 눈초리나 받을 것이 뻔했다.
메일은 우선 순순히 동의했다.
“그러세요. 저희 공주님께서도 그러는 편이 좋겠다고 하시네요.”
“내가 언…….”
“언질도 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공주님의 뜻을 알았는지 궁금하시죠? 척하면 척이랍니다. 공주님의 시비잖아요.”
임기응변으로 리엘라의 항의를 막은 메일이 생긋 웃었다. 자, 어서 다녀오시죠.
모르아도 공주는 메일이 그렇게 나오자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뭘 믿고 저러지? 그녀는 리엘라 측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수색을 거부하는 꼴을 기대한 것 같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모르아도 공주가 백작에게 청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수색은 공정하고 투명해야죠. 백작님께서 사람들을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궁의 시녀와 병사들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 백작의 명령 아래 리엘라의 거처를 구석구석 조사한 사람들이 돌아왔다. 그들의 손엔 정말로 작은 함이 들려 있었다.
“어머, 저것 좀 봐요!”
“모르아도 공주가 이야기한 모양과 똑같잖아?”
“사실이었어.”
아기의 주먹만 한 크기의 함은 공주가 묘사했던 것처럼 백금으로 된 표면에 은색, 황금색 용이 새겨져 있었다. 문양의 위치도 동일했다.
으리다 백작이 눈에 띄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정말 황제의 물건이라면 이건 단순히 범인의 후보 자격을 박탈하는 것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출정 중인 황제에게 연락을 취해야 할 정도의 중대사였다.
“그런데 저게 황제 폐하의 물건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확인하죠? 하녀 한 명의 말만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에 대해선 제게 생각이 있어요.”
모르아도 공주가 다시 나섰다.
“증인을 신청하고자 해요. 폐하의 집무실에서 수발을 든 시종, 페하께서 집무실에서 외출하실 때 매무새 정돈을 맡은 시녀 등. 그들이라면 집무실에서 저 함을 한 번쯤은 보지 않았겠어요?”
“호오, 그러네요.”
“괜찮은 방법이에요.”
모르아도 공주의 의견이 호응을 얻었다. 메일은 별말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머리를 바삐 굴리는 중이었다.
이걸 어쩐다. 확인이 끝나보아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느낌상 저건 황제의 물건이 맞는 것 같다. 모르아도 공주는 진정 배짱이 넘치는 여자였다. 누명을 씌우기 위해 정말로 황제의 물건을 훔치다니. 오르밀의 상위 호환이다.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네.’
이래저래 잔머리로 소소한 위기를 격파해 온 메일이었으나 이번엔 확실히 쉽지 않았다. 모르아도 공주는 작정하고 덤볐다. 그건 무뇌가 나름대로 함정을 파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건 메일의 추측이지만 아마 공주는 가짜 자백을 맡을 하녀도 한 명쯤 준비해 두었을 것이다. 리엘라 공주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물건을 훔쳤다고 털어놓을 하녀 말이다.
모르아도 공주 정도의 배경이라면 협박이든 회유든 하녀 몇을 완전히 매수하는 것 정도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을 끄는 것밖에 답이 없나?’
사람을 쓰는 경우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꼭 흔적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매수당한 사람의 신의라는 게 그렇게 대단치 않기 때문이다.
이걸 어떻게든 재판으로 돌려 증인인 하녀를 황제의 앞에서 몇 번씩 증언하게 만들면 그때 분명 그녀의 거짓말에 틈이 생길 것이다. 그걸 노려야 했다.
다만 그때까지는 꽤나 지지부진한 결백 주장만을 반복해야 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후우, 생판 처음 디디는 제국에 왜 이렇게 적이 많담.’
속으로 푸념을 뱉은 메일이 로즈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가 섰다. 혹시라도 화가 난 로즈가 이성을 잃고 적을 공격하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랬다간 그건 다른 종류의 엄청난 대참사다.
그러는 사이 백금으로 된 함이 황제의 물건임이 증명되었다. 확인은 시종장이 맡았다.
“이건…… 맞습니다. 제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며칠 전 폐하께서 제게 장신구를 넣어둘 만한 작은 함을 요구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 구해드린 함이 바로 이것입니다.”
“답이 나왔네요. 더 확인이 필요할까요?”
모르아도 공주가 눈부시게 웃었다. 그녀는 오르밀이나 리엘라와 비교해 썩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눈가를 곱게 접어 달처럼 환한 미소를 지을 줄 알았다.
저게 어떻게 뒷공작으로 무고한 이에게 누명을 씌우는 사람의 웃음인지. 메일이 혀를 내둘렀다.
‘저런 왕족을 모시느니 차라리 우리 공주님이 낫다.’
로즈도 비슷하게 생각하는 듯 곁에서 크흥 야생의 콧김을 뿜었다.
으리다 백작은 함 안의 물건이 혹시 없어지진 않았는지 확인해 보자고 했다. 함만 그대로 두고 내용물만 빼돌렸다면 그게 더 큰 문제니까. 시종장이 그에 동의하여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레 함을 열었다.
연락을 받은 반테르가 허겁지겁 달려온 것은 그쯤이었다.
‘야단났네!’
반테르에게는 황제가 내린 임무가 하나 있었다. 바로 지키는 것. 무엇을? 처음에는 정원을 이야기하는 줄 알았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메일 폰 비제아트 영애를 뜻하는 것 같았다. 그리 전환하자 훨씬 그럴듯했다.
그러나 반테르는 조금 전까지 의문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대체 뭐로부터 그녀를 지키라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모를 침입자? 제2의 무시크? 하나 사건 이후로 더없이 삼엄해진 별궁의 경비는 요새도 마찬가지였다.
별궁의 복도는 밤에도 낮처럼 밝았고 곳곳에선 병사들이 부리부리한 감시의 눈을 뜨고 있었다. 반테르까지 나서지 않더라도 영애는 충분히 안전했다.
라고 생각하자마자! 그녀가 누명을 썼다! 정확히는 메일이 아닌 리엘라가 함정에 빠진 거지만 둘의 관계를 감안하면 함께 위기에 처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반테르는 연회장으로 달리면서 피눈물을 흘렸다. 죄송합니다, 폐하. 소신이 부족하여. 설마 궁 안에 이런 음모와 술수가 난무할 줄은.
물론 황제가 이런 것을 예견하고 명령을 남긴 것은 아닐 것이다. 황제라고 예언자는 아니었으니까.
하나 그렇대도 지키라고 했는데 저리 죄인의 누명을 쓰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건 대단히 면목이 없어지는 일이다. 반테르는 현장에 뛰어들면서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권력의 힘을 동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응?’
그러나 막 나서려던 반테르는 멈칫했다. 시야에 들어온 메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언가에 크게 놀란 것 같았다. 그건 아무리 봐도 단지 누명을 썼다는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리엘라가 눈을 반짝 뜨며 말했다.
“어? 저거 내 건데?”
백금으로 된 작은 함이 열렸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누가 보더라도 여성의 것인 머리 장식이었다. 정중앙에 새빨간 루비가 박힌 반달 모양의 핀.
바로 메일이 제국에 도착한 첫날 잃어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