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버가 실종되고 납치되었다는 소문이 돈 날, 엑트라 자작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야만족이 지난 십 년간의 공생을 그렇게 갑자기 깨뜨릴 리 없었다.
자작은 병사들을 시켜 목격자를 잡아들이고 그들의 집을 샅샅이 조사했다. 자기 가족이 납치된 평민들이 앙심을 품거나 꾀를 내어 클리버를 가두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의 집을 뒤져도, 더 나아가 영지 안을 쥐 잡듯이 뒤집어엎어도 클리버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막내딸은 정말로 실종된 상태였다.
자작은 그제야 야먄족이 딸을 납치해갔다는 말을 믿었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을의 모든 집을 뒤져도 클리버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어디를 찾아도 흔적이 없으니 유일하게 남은 가능성인 야만족에게로 당연히 화살이 돌아갔다. 은혜도 모르는 야만족이 배신했다고 생각한 자작은 눈이 뒤집혀 당장 수도로 토벌대를 요청했다.
그랬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좀 해주겠니, 클리버?”
더듬지는 않았으나 충분히 떨리는 목소리로 자작 부인이 물었다. 클리버는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이게 최선이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클리버는 야만족에게 납치되지 않았다. 애초에 실종 자체가 거짓이었다. 그녀는 단지 숨어 있었던 것뿐이다. 제 집 안에.
그날 클리버는 저택을 빠져나왔다. 몰래 나오는 척했으나 일부러 티가 나게 움직여 다수의 사람들이 제가 외출한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그러고는 근처에 숨어 있다가 심부름꾼들이 이용하는 쪽문을 통해 다시 몰래 저택으로 숨어들었다. 이번에는 정말 몰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딜리의 가족이 소문을 내도록 한 것은 미리 부탁해 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딜리를 구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런 뒤 클리버는 실종을 가장하여 저택 내 2층의 서재에 숨어서 지냈다. 아버지의 개인 서재였다.
전말을 들은 자작은 거의 쓰러질 뻔하다가 하인의 부축을 받고 겨우 바로 섰다.
“믿을 수가 없구나.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이게 전부, 야만족을 토벌하기 위해서…… 그걸 위해서 이런 짓을 벌인 것이냐?”
“네. 맞아요.”
“어떻게…… 아니, 그래, 전부 그럴 수 있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간 서재에서는 어떻게 지냈느냐? 식사를 비롯해 너의 편의를 몰래 봐줄 사람이 필요했을 텐데.”
물론 그렇다. 아무리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새벽에 몰래 움직인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클리버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나왔다.
“제가 도왔습니다.”
자작은 눈을 부릅떴다.
“집사! 자네가 어떻게!”
“참고로 계획은 전부 아가씨께서 혼자 세우신 일입니다. 저는 그저 소모적인 도움을 조금 드렸을 뿐.”
“왜…… 왜 그랬나? 내가 자네를 얼마나 믿는지, 자네도 잘 알지 않나. 그런데 왜.”
“큰 이유는 아닙니다. 단지 아가씨께서 어디까지 하실 수 있나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훗날 제가 모시게 될 수도 있는 분이니까요.”
자작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리다 안락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입에서는 자조 섞인 한숨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그는 그렇게 충격이 옅어지길 기다리듯 가만히 침묵하다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클리버.”
“……네, 아버지.”
“한 가지 더 물어보마. 다른 곳도 아니고 왜 하필 2층 서재에 숨어 있었던 게냐?”
“그건…….”
클리버는 조금 머뭇거렸다. 그러나 대답은 곧 명확한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2층 서재는 아버지만 출입하시잖아요. 그리고 아버지는 굉장히 기분이 좋으실 때나 굳이 2층까지 올라와서 일을 보시죠. 제가 납치되었는데 아버지께서 그렇게 기분이 좋으실 일은 절대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어 덧붙인다.
“아버지는 영지민들은 그처럼 하찮게 여기셔도…… 저는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시니까요.”
답을 들은 자작은 허허, 숨소리나 다름없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만약 이것이 전투라면 자작은 꼼짝없이 막내딸에게 졌다. 그는 패자다. 승자는 클리버였다.
클리버는 하고 싶은 말이 남았던 듯 재차 입술을 뗐다. 그녀는 마치 호소하듯 말했다.
“아버지, 제발 알아주세요. 우리가 공생해야 할 대상은 야만족이 아니에요. 우리는 야만족이 아닌 영지민과 공생해야 해요. 그게…….”
열두 살 아이의 목소리가 간절했다.
“그게 정답이에요.”
좌중은 침묵했다. 모인 사람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이 순간 자기보다 한참 어린 소녀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저 말을 결국 이곳에서 가장 어린아이가 내뱉게 했다는 사실이 뭇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들은 여태 각각의 사정으로 나서지 못했지만 연장자로서 최소한 부끄러움 정도는 느낄 줄 알았다.
그때 그것을 전부 지켜보고 있던 황제가 움직였다. 아이는 아이인지 말을 뱉은 뒤 울먹이던 클리버는 제 위로 지는 그림자를 한발 늦게 지각하곤 깜짝 놀랐다. 이내 그녀의 작은 머리 위를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내리눌렀다.
“고생했다.”
“…….”
“이 자리의 누구보다 네가 용감하구나. 짐을 포함해서 말이야.”
사실 따지자면 완전 범죄나 다름없던 클리버의 계획을 이렇게 도중에 밝혀지도록 만든 건 바로 황제다. 그가 아니었다면 클리버는 야만족 소탕이 끝날 때까지 서재에 숨어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았을 것이다.
제가 무산시켜 놓고 저리 칭찬하는 것이 어찌 보면 참 우스운 모양새였지만, 클리버는 발끈하거나 황당해하는 대신 울컥 치미는 눈물을 참았다. 머리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따뜻했다.
잠시 후 손을 거둔 황제가 말했다.
“앞으로는 영지에서 야만족을 구경도 할 수 없을 테니 마음 놓거라. 소탕은 오늘 안에 마무리될 거다.”
“아, 화, 황송…….”
“인사할 필요 없다. 그러려고 온 거니까.”
클리버는 조심스레 시야를 들었다. 황제의 용안은 어린 그녀가 보기에도 충분히 눈이 부셨다. 물론 그렇다고 왕자님처럼 느껴지기에는 아직 소녀가 너무 어리다.
황제는 클리버의 생기 있는 녹색 눈동자에 지나가듯 짧게 시선을 주었다. 이후 눈길을 옮겨 자작을 응시한다.
“엑트라 자작.”
“예, 예. 폐하.”
“확인한다 생각하고 다시 묻지. 곧 진행될 야만족의 토벌에 이견이 있나?”
막내딸을 찾기 전 아침에도 들었던 말이다. 이제는 그때와 달리 질문의 의미를 알았다. 그러나 대답이 어떻게 바뀔 수 있을 것인가. 자작은 쓰게 웃었다.
“없습니다.”
십 년을 이어온 비틀린 공생이 마침내 완전히 끊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