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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메일 (62)화 (62/144)

그가 부재하는 동안 정원은 매번 엄격하게 출입이 통제되었다. 마법사를 불러 입구에 결계를 깔거나 경비를 세워두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는 그 누구도 정원에 출입할 수 없었다. 아주 가끔 건기가 계속되는데 황제가 출타 중일 때에는 통신구로 허락을 받은 정원사 한 명만이 물을 주러 잠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었다.

‘출정을 서두르느라 미처 입구를 통제하는 것을 잊으신 건가?’

그랬다가 출발하기 바로 직전 뒤늦게 생각이 났고 말이다. 납득한 반테르가 그렇게 결론지었다. 평상시의 황제를 생각하면 꽤나 어울리지 않는 실수였지만 어쨌든 그도 사람이다. 사람이 어쩌다 평소답지 않게 실수 한 번쯤 하는 것이 뭐 대수라고.

“우선 가서 좀 둘러본 다음 병사를 세우던가 해야겠어.”

반테르는 본인의 추측을 철석같이 믿었으나 그래도 확인을 건너뛰지는 않았다. 눈치는 없지만 일 잘하고 신중한 남자 반테르가 몸을 일으켜 정원으로 향했다. 빠른 보폭으로 부지런히 걷자 도착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원 안으로 들어서며 그는 자신의 짐작에 확신을 더했다. 황제가 성을 떠났는데에도 정원의 입구엔 아무런 방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역시 까먹으신 게 맞군. ‘지켜’는 정원을 지키란 뜻이었어. 내부를 느긋하게 둘러보며 반테르가 속으로 경비를 세울 만한 인물을 골랐다.

별궁의 병사들은 오르밀 사건으로 황제에게 미운털이 박혔으니 본궁에서 불러들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적임자를 골라내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명예의 근무자를 대강 선출해 낸 반테르가 여유롭게 정원의 경치를 눈에 담았다.

‘근사하긴 하군.’

그는 눈치는 없어도 감수성은 살아 있었다. 긴장을 풀고 싱그러운 녹음을 구경하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머리카락 끝을 간질이는 연한 바람과 그 바람에 섞인 풀 내음은 이십 대 독신남을 점차 감성에 젖게 만들었다. 곧 반테르가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를 했다.

그는 그 상태로 누군가를 떠올렸다.

‘텔리야, 이 못된 것…….’

감수성이 차오르니 억울한 일이 가장 먼저 생각났다. 이 나쁜 기집애. 네가 뭔데 툭하면 오라버니를 구박해. 그러고도 여동생이냐.

최근에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텔리야에게 통신구로 연락을 걸었다가 오히려 그녀에게 혼만 잔뜩 난 반테르가 들리지 않을 소리로 항변했다.

황제 폐하를 둘러싼 사랑의 작대기가 심상치 않아 마음이 복잡하다고 상담했던 그날. 텔리야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으며 정말 심상치 않은 건 댁을 둘러싼 독거노인의 작대기라고 화답했다.

왜 갑자기 욕을 하냐고 억울해하는 반테르에게 텔리야는 욕이 아니라 현실을 일러준 거라고 단호히 못 박았다. 기껏 비싼 통신구를 사용한 반테르는 엄청 서러워졌다.

‘내가 결혼을 못하는 건 정말 일이 바쁜 탓이래도.’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반테르가 눈물이 차올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흐르지 못하게 또 살짝 웃으…… 려던 순간.

바작!

무언가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추정컨대 마른 나뭇가지 따위인 것 같았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딴 생각에 빠져 있다가 지척에서 그런 수상한 소리를 들은 반테르는 거의 반사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허리춤에서 검을 뽑고 그것을 수상한 이에게 가져다댄다.

그리고 곧 그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어라?”

정원으로 침입자가 숨어드는 건 전에 없던 일이 아니다. 특히 초보 침입자일수록 샛길이 보이면 무조건 뛰어드는 성향이 있어서 별궁 내부와 통한 정원의 입구는 한때 침입자들의 핫플레이스였다.

물론 입구 두 개를 양쪽에서 막아버리면 꼼짝없이 고립되는 공간이었기에 요새는 그런 자충수를 두는 침입자가 드물다. 그러나 한때 침입자와 열심히 씨름했던 반테르는 몸에 배인 대로 행동했다.

결과는 나빴다.

‘이런!’

반테르는 깜짝 놀라 급하게 검을 회수했다. 상대의 목을 겨누고 있던 잘 벼린 검신이 검집 안으로 순식간에 사라지듯 모습을 감췄다. 반테르의 목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하필…….’

이런 건 운이 없다는 말로 표현해도 된다. 확실히 그랬다. 침입자인 줄 알고 반사적으로 검을 겨눴는데 그 대상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그녀’일 것이 뭐란 말인가. 그러니까 자신의 그녀도 아니고 친구의 그녀도 아니고 무려 황제의 그녀.

메일 폰 비제아트. 얼마 전 조사했던 상대의 신상 명세를 떠올린 반테르가 겨우 침착한 척 말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십니까? 무단으로 침입한 수상한 자로 착각하여 그만 실례를 범했습니다.”

메일은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로서도 일단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리 담대한 성정이라도 목 끝에 검이 닿았는데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태연할 수는 없었다. 잠시 후 심경을 달랜 메일이 입을 열었다.

“다치지는 않았으니 괜찮습니다. 한데…… 누구시죠?”

정체를 묻는 목소리에서 경계와 의심이 묻어났다. 반테르는 그것을 듣고 깨달았다. 상대는 이 정원에 처음 방문한 것이 아니다. 최소한 친근한 장소라는 인식이 생길 만큼은 자주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마치 제 집에 나타난 낯선 방문자를 대하듯 굴고 있었다.

‘폐하께서 그럼, 혹시…….’

반테르의 사고가 회전했다. 간택전의 후보도 아닌 여인을 언제 어디서 만나 어떻게 마음을 주었나 했더니 이곳 정원이 있었다.

정원에서 계속 마주치고 인연을 쌓았던 건가.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렇다면 황제가 지키라고 한 것은 단순히 정원이 아닐 수도 있다. 정원보다는 오히려.

“……실례했습니다. 반테르 공작가의 차남, 반테르 폰 모하임입니다. 현재 황제 폐하를 곁에서 보좌하고 있습니다.”

자기소개가 정중한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메일은 그의 소개를 듣고 뭔가가 떠오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때 연회장에서 폐하의 우측에…….”

메일이 말한 ‘그때’는 간택전의 후보들이 처음으로 연회장에 모두 모였던 날을 이야기한다. 그날 옥좌에 앉아 있던 황제의 오른쪽 곁을 반테르가 지켰다. 대충 언제를 얘기하는 건지 알아들은 반테르가 얼른 아는 체를 했다.

“맞습니다. 공식 행사에서는 호위 기사직을 겸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전 벨티에 왕국에서 온 메일 폰 비제아트입니다. 현재 간택전의 후보이신 리엘라 공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메일의 목소리가 한결 편안했다. 수상한 놈인 줄 알았던 상대가 다행히 신원이 보증된 인물이라 안심이 된 것 같았다.

그녀가 공손하게 상체를 낮춰 인사하자 반테르 또한 정중하게 그에 마주 응했다. 그가 저지른 실수에 대한 노여움의 기색이 없어 반테르는 일단 마음을 놓았다.

반테르가 걱정했던 부분과 달리 지금 메일의 머릿속을 채운 건 그가 검을 겨눴던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동그란 머리 안은 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선배님이 아니었어.’

시야를 가린 나무 사이를 통과하던 순간 느꼈던 기대감이 생생하다. 나뭇가지를 밟던 순간까지도 그녀의 가슴은 기대에 화답해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마주친 현실은 다시 그녀를 정적으로 가라앉게 만들었다. 손끝에서부터 올라왔던 두근거리는 열기가 거짓말 같았다.

기대는 실망을 부른다. 반테르가 수상한 놈이 아닌 것에 대한 안도와는 별개로 상심이 메일을 짓눌렀다. 푹신한 잔디밭이 갑자기 딱딱한 자갈밭처럼 느껴졌다.

‘아, 혹시 어쩌면.’

불쑥 어떤 가능성을 발견한 메일이 눈을 밝게 빛냈다가 다시 주저했다. 상대는 황제를 아마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자연히 황제의 사람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가망이 높았다. 다시 말해 그건 황제와의 남다른 친분을 자랑해 왔던 선배님에 관해서도 알고 있을 거란 뜻이다.

‘물어볼까.’

충동은 강했다. 마음은 굴뚝같았다. 그간 수차례 마주치면서도 알 수 없었던 선배님에 대한 정보를 지금 어쩌면 질문 한번으로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의 풀네임도, 신분도, 하는 일도, 그 외 궁금한 전부를.

‘그렇지만…….’

결심은 쉽게 서지 않았다. 메일은 어쩔 수 없이 갈팡질팡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건 그녀가 상대를, 로하이덴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남의 입을 통해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눈을 마주 보고 직접 제게 이야기해 주기를 바란다. 유치한 욕심이더라도 별수 없었다. 사랑은 본래 자석처럼 그런 불가항력을 불러들였다.

메일의 망설임이 길어질 때였다. 리엘라가 대뜸 말했다.

“방금 어떻게 한 거야?”

“공주님?”

메일이 화들짝 놀랐다. 그럴 만했다. 그녀는 리엘라가 조금 전부터 줄곧 옆에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본의 아니게 옆 사람을 놀래킨 리엘라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칼이 갑자기 휙 사라졌잖아. 어떻게 했어?”

리엘라의 눈길은 메일이 아닌 반테르를 향했다. 반테르 또한 메일을 신경 쓰느라-정확히는 메일에게 저지른 실수를-리엘라의 존재를 뒤늦게 자각해서 다소 당황한 눈치였다. 먼저 평정을 찾은 메일이 어서 대답해 주려 운을 띄웠다.

“그건 말이죠, 공주님. 그냥 검집에 빠르게 검을…….”

“난 쟤한테 물어봤는데?”

콰르릉.

메일은 이 순간 환청을 들었다. 천둥이 치는 환청이었다. 물론 원인은 리엘라다.

초면에 하대로도 모자라 쟤.

제 아니고 쟤.

제국 공작가의 영식이자 황제의 측근에게 쟤!

“공주님!”

“왜 불러?”

“저어, 음, 그러니까 호칭과 말투를 약간만…….”

“뭐가? 쟤는 공작 아들이고 나는 공주인데?”

벨티에 왕국에서는 리엘라가 누구에게 말을 놓든 다들 그러려니 했다. 왕이 분신처럼 아끼는 금지옥엽이었으니 하대를 들어도 이것은 임금이 빙의하여 하는 하대이려니 하며 마음을 비우고 넘겼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왕국에서의 이야기였다. 제국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돌발 상황에 난처해진 메일이 이마를 짚었다. 여신님, 맙소사.

메일이 그리 난감해하는 사이 반테르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반말에 이어 ‘쟤’라는 파격적인 지칭어를 들었으나 그는 화가 나기보다는 그저 신기했다.

풍성한 금발에 천사 같은 외양을 해서는 입을 열 때마다 교양과 기품이 쾅쾅 바닥을 찍는다. 공주라는 신분을 지니고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성장 배경이 퍽 궁금해지는 일이었다.

아무튼 신기한 건 신기한 거고. 마침 잘된 노릇이다. 계산을 마친 반테르가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차분한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메일에게 향했다. 리엘라를 설득시킬 말을 두뇌 풀가동 상태로 찾고 있던 메일은 순간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깜박였다. 반테르가 재차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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