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려라 메일 (57)화 (57/144)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래?’

살다 살다 꿈을 원망하게 될 줄은 몰랐다. 메일은 애꿎은 실내화를 발로 구겼다. 꿈은 보통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하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그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대체 저의 무의식에 뭐가 들었기에 이런 악몽을 연달아 꾼단 말인가. 그것도 끝 장면을 자꾸 추가로 갖다 붙이면서.

‘……꿈이 나한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메일의 생각은 하다하다 그곳까지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개꿈 같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두 번째에는 역시 개꿈 같지만 만에 하나 모르니까, 세 번째에는…… 이거 개꿈 맞나? 혹시 뭔가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나만 모르는.

‘하지만 정말 모르겠는걸. 대체 뭘 말해주려는 거야? 설마 제국에서 더 노닥거릴 생각 말고 얼른 짐이나 싸라는 경고인가?’

마지막 가정에 메일이 다시 어젯밤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래. 그땐 그랬다.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마치 꿈에서 천국을 만났을 때처럼 기분이 좋아서 ‘조금만 더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냥 바일렛이 아니라 그가 심은 바일렛이라서, 단순히 예쁜 정원이 아니라 그가 가꾼 정원이라서, 그저 시원한 바람이 아니라 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바람이라서.

그래서 두고 가고 싶지가 않았다. 더 오래 보고 싶었다. 그만큼 이곳에 남아서.

‘……그런 불경한 생각을 했었다고 이러는 거야? 정말? 악몽 너 이러기니?’

악몽은 상도덕도 없었다. 일 년 이 년 눌러앉겠다는 것도 아니고 고작 잠깐 더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메일은 본인의 가정에 본인이 황당해하다가 이내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더 생각하고 따져 봐야 나만 손해지. 악몽은 말도 못 하는데.

‘반납이나 하자.’

구겼던 실내화에 발을 밀어 넣은 메일이 협탁 위의 책을 들어 올렸다.

사랑의 조건. 머리를 비울 목적으로 빌렸는데 공교롭게도 지뢰였다. 차라리 리엘라처럼 ‘공주님’이 들어가는 이야기책이나 고를걸.

메일은 머리를 비워주기는커녕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준 지뢰를 얼른 치워 버릴 요량으로 바삐 거처를 나섰다.

오전이라 그런지 도서관은 제법 한산했다. 메일은 책을 반납한 뒤 산책이라도 하듯 책장 사이를 거닐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책들은 딱 보기에도 정갈하여 사서의 성미를 짐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메일은 그렇게 책장 사이를 건너다가 깜짝 놀랐다.

“로즈?”

“아가씨.”

우연찮게 뵙는군요. 로즈가 예의 강직한 표정으로 정중하게 인사했다. 메일은 그런 로즈를 벙벙하게 쳐다보다가 곧 본인이 놀란 이유를 깨닫곤 조금 미안해졌다.

무의식중에 로즈라면 여가 시간을 도서관보다는 연병장 같은 곳에서 보내지 않을까 짐작했던 것이다. 아무리 로즈라도 매일매일 근육 단련만 하라는 법은 없는데. 스스로의 편견에 머쓱해진 메일이 부러 더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공주님 없이 여기에서 마주치는 건 처음이네요. 로즈도 독서를 좋아하나 봐요?”

“아니요. 독서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응?”

“하지만 책은 좋아합니다.”

그 둘이 뭐가 다른데? 솟아오른 메일의 의문은 속에서만 끝났다. 물어보기도 전에 로즈가 먼저 답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책을 잔뜩 뽑아 탑을 쌓더니 그것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위아래로 팔을 운동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육이 역동적으로 꿈틀거렸다.

“책은 참 유용한 물질입니다.”

“…….”

편견이 아니었나. 메일은 로즈에 대한 제 파악이 부족했음을 인정했다.

“아가씨께선 책을 대출하러 오신 겁니까?”

“고민 중이에요. 사실 뭘 빌리면 좋을지도 잘 모르겠고.”

“좋은 책은 거의 사서가 알고 있습니다. 사서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응? 잠깐…….”

로즈는 만류를 듣지도 않고 바람처럼 멀어져 갔다. 얼마나 빠른지 붙잡으려던 메일이 허망하게 헛손질을 했을 정도였다.

바람처럼 사라진 로즈는 이어 바람처럼 사서를 데리고 돌아왔는데, 사서는 반쯤 끌려온 것 같은 모습을 하고도 외려 본인이 더 의욕을 불태웠다. 책을 추천해 주는 것도 사서의 주 업무라고 한다. 메일은 결국 예정에 없던 책 추천을 받기로 했다.

“이곳에는 정말 다양한 서적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없는 도서가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죠. 지식을 얻기 좋은 책도 있고, 흥미 위주의 책도 있고, 지식과 흥미를 한 번에 잡을 수 있는 두 마리 토끼 같은 책도 있으니 원하는 쪽을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 실례지만 잠시 끼어들어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이야기하시지요.”

“두 마리 토끼를 들으니 떠오른 것이 있습니다. 최근 제 고민에 대한 건데……. 저는 파워와 민첩함을 동시에 기르고 싶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대화를 들으면서 걸음을 옮기던 메일은 발을 헛디딜 뻔했다. 왜 그런 질문을 사서에게? 그러나 놀랍게도 사서는 답을 주었다.

“쉽지 않은 일이겠군요. 하지만 가능합니다.”

“정말입니까?”

“관련된 책을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책은 모든 지식의 집합체이니까요. 우선은 ‘힘의 역사’와 ‘들리나요, 근육의 소리’를……. 아, 이분께 먼저 책을 골라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영애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이내 사서는 전문적인 솜씨를 마음껏 뽐내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유약한 인상이지만 책을 고를 때에는 눈빛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메일이 그런 사서의 프로페셔널한 모습과 기대감으로 꿈틀거리는 로즈의 근육을 번갈아 구경하듯 쳐다봤을 때였다.

쿵!

“……쿵?”

묵직하고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뭔가가 떨어진 것 같기도 하고, 혹은 공중에서 부딪친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일상적인 소리는 아닌데. 메일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사서가 외쳤다.

“조, 조심해요!”

“어?”

책장이 기울고 있었다. 책을 찾느라 그들이 등지고 있던 단면 책장이었다. 책장은 보통 크고 무겁다. 이곳은 공간이 넓어 표준보다 크기가 큰 책장을 주로 두었기에 더 그랬다.

왜 쟤가 기울고 있는지는 둘째 치고 깔리기라도 한다면 무사함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크, 큰일 났다. 사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도망치라고 소리쳐야 했는데 너무 늦었다. 그가 눈을 감기 직전 책장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천국에도 도서관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사서가 곧 닥쳐 올 고통에 대비해 이를 악물었을 때였다.

“……다들 괜찮습니까?”

“멀쩡해요. 사서도 괜찮은 것 같고. 고마워요, 로즈.”

“별말씀을.”

“……?”

예상했던 고통 대신 다른 것이 찾아왔다. 말을 나누는 목소리는 평화로웠다. 뭐지? 설마 과정을 생략하고 천국으로 바로 이동했나? 사서는 꾹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

순간 사서는 눈을 의심했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태산이었다.

그것도 굳건한 태산.

넘어지는 책장을 힘으로 받친 로즈가 대수롭지 않은 낯으로 입을 열었다.

“바로 세워야겠군요. 잠깐 물러나주시겠습니까? 다치실까 봐.”

“그래요. 이 정도면 될까요?”

“충분합니다. 그럼……. 흡!”

쿵.

책장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 바로 섰다. 반동으로 반대편의 책이 몇 권 떨어졌는지 바닥에 부딪치면서 둔탁한 소리를 냈다. 언제 기울었었냐는 듯 책장을 되돌린 로즈가 가볍게 손을 탁탁 털었다.

“오랜만에 이렇게 힘을 써보는군요. 적수를 잃은 뒤로는 처음인데, 반가운 느낌입니다.”

“근육이 기뻐하겠네요.”

“맞습니다.”

“아무튼 고마워요. 덕분에 이렇게 무사하고. 음, 그런데…… 사서 씨?”

메일이 사서를 돌아보며 그를 불렀다. 그때까지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사서는 뒤늦게 허둥지둥 코끝까지 흘러내린 안경을 올리며 대답했다.

“마, 마론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좋아요, 마론 씨.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원래 이런 깜짝 이벤트가 종종 일어나는 편인가요?”

물론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 한 말이었다. 사서가 당연히 손사래를 쳤다.

“결코 아닙니다. 애초 넘어뜨리려고 작정해도 넘어갈 만한 무게가 아닌데…….”

“확실히 무겁긴 하네요.”

메일은 로즈가 되돌린 책장을 시험 삼아 한번 밀어보았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밀어서 넘어뜨리려면 분명 어지간한 힘으론 어려울 것이다.

“그럼, 이런 식으로 미는 게 아니라 몸으로 부딪쳐도 힘들까요?”

“몸으로요? 아, 그런 방법이라면…….”

잠시 생각해 보던 사서가 성인의 체구 정도라면 가능할 것 같다고 긍정했다. 즉, 아무나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메일은 몇 발 옆으로 물러나 도서관 안쪽을 둘러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선을 주는 영애 한둘과 사용인 몇. 으음, 저 중에 목격자가 있을까. 그때 로즈가 바닥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아가씨.”

“응?”

“여기 책이 떨어져 있는데, 멀쩡하지가 않습니다.”

“멀쩡하지 않다고요?”

“자국이…….”

책을 주워들고 로즈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말마따나 책에는 부자연스러운 자국이 남아 있었다. 마치 어딘가에 깔려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메일은 그걸 확인하자마자 침음을 흘렸다. 깜짝 책장 이벤트가 실수도 우발도 아닌 계획적 일이었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오르밀이 탈옥이라도 했나…….”

“예?”

“아니에요. 아무튼 범인이 미리 준비를 했었나 보네요. 이거 아마 책장 바닥 모서리에 깔려 있던 거 같은데.”

“네? 그 말은…….”

“약간이라도 사전에 기울여놓는 게 넘어뜨리기 쉬울 테니까요. 어쩐지 힘껏 부딪쳤다기엔 작은 소리라 했더니.”

“하, 하지만 어제 퇴근 전에 점검했을 때는 분명.”

“오늘 아침이겠죠. 책 정리를 도우러왔던 하녀나 하인 생김새 기억해요?”

“……여럿이라 잘…….”

“아쉽게 됐네요.”

메일은 표지에 자국이 남은 책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이내 사서에게 넘겼다. 얼결에 건네받은 사서가 책을 든 채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지나치게 긴장하기에 메일이 안심하라는 듯 한 소리를 했다.

“증거로 보관하라는 건 아니에요. 원한다면 그렇게 해도 되지만.”

“예? 아, 예.”

“모국도 아니라서 범인 잡는다고 설치기가 좀 그러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메일이 이마를 좀 긁적였다. 목격자를 찾고, 사용인을 불러다 심문하고. 용의자를 특정하고 나면 또 배후를 캐고. 못 할 일은 아니지만 번거로움과 소란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누가 다치기라도 했다면 또 모르지만 로즈의 활약으로 다들 멀쩡한 마당이니. 메일은 갈등하다가 결정했다.

‘오르밀의 망령이려니 생각하자.’

오르밀은 아직 죽지 않았지만 일단은 그렇게 넘기기로 했다. 기껏 시간을 들여 범인을 잡았는데 배후가 끈을 끊어버리면 그 또한 답답해지는 일이다. 왜 이런 짓을 했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그런데 아가씨. 범인은 저희가 이 위치로 올 줄은 어떻게 알았던 걸까요?”

“음, 내가 생각하기엔 책을 이 책장에만 깔아 두진 않았을 것 같아요. 아마 찾아보면 곳곳에 몇 개 더 나오지 않을까. 그리고 정 우리가 원하는 위치로 오지 않아도 어차피 책장을 넘어뜨릴 수는 있으니까.”

“그렇군요. 범인은 잡으실 겁니까?”

“로즈는 잡고 싶어요?”

“아가씨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나는 솔직히 회의적이에요. 일단 목격자를 찾아야 하는데, 그 목격자가 정말 목격자인지 범인인지 아니면 범인의 조력자인지도 확인을 거쳐야 하니까요. 꽤나 까다로울 거예요.”

더구나 귀족 중에는 사건이든 사고든 남의 일에 관계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도 수두룩했다. 그렇다고 강제로 진술을 요구할 수도 없었다. 메일의 말을 들은 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 일은 간만에 저를 위해 일어난 이벤트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실제로 근육이 오랜만에 상쾌했다고 제게 속삭이는 것이 들리는군요.”

로즈의 말은 어딘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메일이 어색하게 웃을 때였다. 사서가 갑자기 로즈를 불렀다.

“저…….”

“……?”

“로, 로즈 양.”

메일은 깜짝 놀랐다. 그가 로즈의 이름을 부른 것은 둘째 치고, 그 이름 뒤에 붙은 한 글자가 어째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정작 로즈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말씀하시죠.”

“그, 로즈 양 덕분에 제가 다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저어.”

말을 이어나가는 사서의 얼굴이 붉었다. 원래 피부가 빨간 사람인가? 아니, 그럴 리가. 메일의 놀란 표정이 한층 격해졌다.

“괜찮다면 감사의 의미로 시,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요.”

“…….”

“오늘…… 저녁 식사 어떠십니까?”

모태솔로 메일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알았다. 사서와 로즈의 주변으로 꽃이 피어났다. 묘한 기류가 흘렀다. 메일은 그 광경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눈을 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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