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하셨어요.”
“치하를 듣게 될 줄은 몰랐군.”
“그럼 뭐라고 해요. 팔은 괜찮으시냐고?”
“본인이 무거웠을 거라는 주장은 쭉 고수하는 건가?”
“그야…….”
“원한다면 응해 주지. 실은 지금도 감각이 없어. 평소 식사는 납덩이로 하나?”
“……네, 뭐. 추천해 드리자면 납덩이 케이크, 납덩이 푸딩, 납덩이 타르트 순으로 맛있어요. 참고하세요.”
“굳이 하나를 꼽자면?”
“선배님 전용으로는 납덩이 펀치.”
메일의 응수에 로하이덴이 큭큭 웃었다. 웃고 난 그는 화제를 다시 처음으로 돌렸다.
“그래, 몸은 정말 괜찮나?”
“괜찮아요. 정말로.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제 체력이 더 좋은가 봐요.”
메일은 원래 체력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애초 정원을 가꾸는 것이 체력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녀 주변의 대표 저질 체력을 꼽자면 아마 리엘라일 텐데, 메일은 리엘라 다섯 명과 릴레이 달리기를 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다고 평소 생각하곤 했다.
“다행이군.”
로하이덴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는 지금 진심으로 안도하는 중이었다. 그건 굳이 메일에게 외상이 없어서만은 아니다.
그는 혹여 메일이 후유증에 시달리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여자의 몸으로 저보다 힘도 체격도 월등한 상대의 폭력을 견디는 건 확실히 힘겨운 일이었을 테니까. 상기한 로하이덴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대체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메일이 조막만 한 머리를 흔들거나 갸웃거릴 때마다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나부꼈다. 키가 큰 편이지만 옷 바깥으로 드러난 손목이나 목은 분명 이견의 여지없이 가늘다. 안아 올렸을 때 가벼웠다는 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메일은 튼튼한 편이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병든 닭 같은 영애들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지, 그녀가 겉보기에 한눈에 잡초처럼 질겨 보인다는 뜻은 아니다.
안아 드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이 몸을, 감히 어떻게.
‘손가락을 하나씩 전부 잘라놓을 것을 그랬군.’
로하이덴은 뒤늦게 조금 후회했다. 자신이 너무 물렀다. 고작 발목을 자르고 무릎을 망가뜨리는 것 정도로는 모자랐는데. 무슨 정신으로 그리 자비를 베풀었을까? 있어도 보지 못하는 눈을 뽑고 앞으론 필요하지도 않을 혀는 뿌리부터 도려낼 것을.
그렇게 잔인한 속내와 달리 메일에게 말을 건네는 로하이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상처도 전혀 남지 않았나?”
“말끔해요.”
메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뺨이나 목은 보이는 부위니 바로 치료했다 쳐도 팔꿈치나 어깨 같은 곳에는 멍이 좀 남아 있지 않을까 했는데, 옷을 갈아입히면서 전부 처치했는지 흔적 비슷한 것도 없이 멀쩡했다. 로즈의 솜씨였지만 메일은 그것까진 알지 못했다.
고개를 끄덕이다 메일이 문득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다만 어릴 적 산을 타다 얻은 영광의 흉터라면 있어요.”
“흉터?”
“네. 작은 흉터이긴 한데 여기쯤…….”
메일은 저도 모르게 보여주려고 손을 올렸다가 머쓱하게 웃었다. 흉터는 어깨에 있었다. 그녀는 대강 옷 위로 위치만 짚었다.
“어쩌다 흉터를 얻게 된 거지? 산에서 구르기라도 했나?”
“정답. 다람쥐였나, 새였나? 아무튼 작은 동물을 잡으려고 사방팔방 뛰다가 그만 급경사에 발을 잘못 디딘 거예요. 균형 잡기에 실패한 어린애는 그대로 데굴데굴…….”
메일이 실감나게 손동작까지 이용해 묘사했다. 여섯 살이던 그녀는 그날 아주 무자비하게 구르다가 천운으로 나뭇가지에 옷이 걸려 목숨을 건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부터 나무와는 이런 사이(?)가 될 운명이었는지도.
그렇게 덧붙이는 메일은 도저히 죽을 뻔했던 경험을 얘기하는 사람 같지 않아서 로하이덴은 잠깐 제가 잘못 들었나 했다.
“생각보다 흉터를 얻게 된 경위가 강한데?”
“이 정도쯤 되니까 영광의 흉터죠. 그날 호위 기사도 곁에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가 바닥에서 뭘 줍는 사이 제가 굴러 떨어져서……. 주운 것도 알고 보니 제 물건이었거든요. 그때 전부 본인의 불민함 탓이라며 호위 기사가 한동안 저만 보면 엉엉 울었는데, 아직도 그건 그한테 미안해요.”
호위 기사는 덕분에 이후로 한참 동안 이름 대신 울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분명이 우르보였으니 사실상 별반 차이는 없던 걸지도 모르지만. 지나서 생각하니 다 추억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여섯 살짜리는 세상의 쓴맛을 배우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흉터는 왜 지우지 않았지?”
로하이덴이 정말 궁금하다는 투로 물었다. 크게 다치면 흉터가 남는 것은 일견 당연하게 보이지만 실은 여기에도 자본주의의 힘이 작용한다. 돈을 쏟아붓는다면 뭔들 못 할까. 귀족 영애의 몸에 흉터를 남겨두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버지께서 지우지 못하게 하셨거든요.”
“왜?”
“반성과 배움을 통한 예방을 위해서래요. 씻거나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흉터를 보면서 늘 되새기라고 하셨어요. 목숨은 소중하다. 그러니 앞으론 조심조심 주의해서 행동하자.”
“효과는?”
“한 달 정도?”
짧기도 하다. 로하이덴이 피식 웃었다.
“참, 아버지께서 흉터에 관해 해주신 얘기 중에 다른 것도 있어요. 이건 제가 좀 크고 나서 들은 건데요.”
“또 혼이 났나?”
“아니요. 이건 결혼에 대한 거였는데……. 나중에 배우자가 제 어깨의 흉터를 보고 레이디의 몸이 어쩌고를 운운하거든 당장 그놈을 걷어차고 나오라고 하셨어요. 기사의 흉터는 훈장으로 취급하면서 레이디의 흉터는 오점으로 치부하는 편협한 인간은 제 남편이 될 자격이 없다고요. 참고로 어딜 걷어차든 아버지가 책임져 주시겠대요.”
“멋진 아버지시군.”
로하이덴은 메일의 어깨 부근을 짧게 응시했다. 확실히 저라면 흉터를 보며 오점이라는 생각 따위는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대견하거나 사랑스러울지도. 흉터라는 건 결국 상처가 다 나은 뒤 생기는 흔적이니까.
“사실 워낙 작은 흉터라 눈에 잘 띄지도 않지만요. 저도 가끔은 잊어버리거든요. 그러고 보니 전 역시 튼튼한 체질인가 봐요!”
“왜 갑자기?”
“어릴 때 그렇게 구르고도 작은 흉터 하나밖에 안 남았잖아요. 타고난 거죠.”
가끔은 튼튼 정도가 아니라 무쇠 체질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며 메일이 덧붙였다. 그건 즉 그간 자기 몸을 그만큼 시험했다는 거고 흉터를 지우지 않은 공작의 큰 뜻은 결국 금방 빛을 바랬다는 소리다.
메일은 공작이 알면 뒤로 넘어갈 천방지축 같은 말을 해놓고선 하하 해맑게 웃었다.
로하이덴은 그런 메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시종일관 부드러웠지만 종종 스쳐 가듯 괴로움을 닮은 혼란스러움이 머물기도 했다.
그의 가슴은 갓 고동을 시작한 것처럼 기분 좋고 빠르게 뛰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콱 막혀서 내려앉기라도 한 듯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메일은 본인을 무쇠 체질에 비유하며 웃었다. 그러나 그것이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더라도 로하이덴은 그녀를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메일이 튼튼한지 아닌지의 여부나, 그녀의 체형이 마르고 마르지 않았고 따위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메일이 어느 날 깨달음을 얻어 진짜 금강불괴가 되더라도 로하이덴은 그녀를 걱정하고 살필 수밖에 없다. 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메일이라서.
“선배님.”
“……얘기해라.”
“그냥 불러봤어요.”
말갛게 웃는다는 건 뭘까. 이런 웃음을 두고 하는 말인가. 로하이덴은 물끄러미 메일과 눈을 맞췄다. 그러다 곧 괴로운 듯 잠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처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어느 순간을 떠올렸다. 그 순간 속에서 자신은 오만하게 웃고 있었다.
며칠간의 유희거리가 생겼다며 가벼운 기분으로 즐거워했다. 정해진 기간이 끝나고 나면 없었던 일처럼 끊어낼 수 있을 거라고 미련하게 자신했다.
결국 이 지경이 될 줄도 모르고.
로하이덴은 손을 들어 제 가면을 매만졌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것을 벗고 싶었다. 가면을 내려놓고 황제의 모습으로 메일을 마주하고 싶었다. 지금 받는 시선을, 말을, 표정을, 가면을 쓴 누군가가 아닌 온전한 자신으로서 얻기를 원했다.
하나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항상 합치하지는 않는다. 애석하게도.
“메일.”
“……네?”
이름을 부르고 잠시간 입을 다문다. 침묵은 짧았다. 그러나 그사이 한 사람 속을 맴돌고 사라진 생각과 감정은 길었다. 길고 짙었다. 짙어서 그는 고통스러웠다.
“난…….”
“……?”
“나는 앞으로 이곳에…….”
가면 속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머릿속으로는 수번도 정리하고 배열한 말이 입 밖으로 쉬이 나오지 않았다. 뭐가 그리 어려운 말이라고. 뭐 얼마나 힘든 이야기라고.
죄를 고백하는 신자보다도 더욱 힘들게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한 마디, 한 마디를 밀어내듯 내뱉었다.
“여기에…….”
여기에.
“……올 거다.”
오지 않을 거다.
“……올 거야.”
오지 않는다.
“……계속.”
계속.
“……응? 당연한 얘길 뭐 그렇게 무게 있게 이야기하고 그래요? 언제는 안 왔었던 것처럼. 선배님은 정원의 지박령이잖아요.”
메일이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심각한 어조로 목소리를 깔기에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드나 했더니. 그녀는 상대가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웃다가 문득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며칠간 선배님이 보이지 않기는 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엇갈린 거려니 짐작했었는데 정말로 그동안 정원에 오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이 지박령이 이제 보니 잠깐이지만 파업을 했었네? 메일이 짐짓 장난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앗, 설마 앞으로는 정말 여기서 살겠다는 선언을 한 거예요? 그동안 안 나타난 건 혹시 이삿짐을 싸느라? 어쩜 그런 파격적인 결심을.”
농담조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밝고 경쾌하다. 메일은 눈을 반달로 접어 미소를 지었다. 달은 밝고, 바람은 차갑지만 시원하고, 메일의 미소는 예쁘고.
로하이덴은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바일렛의 잎은 흔들리지 않았다. 거짓말쟁이는 축하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