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려라 메일 (53)화 (53/144)

리엘라의 헛소리를 로즈가 정정했다. 메일은 어젯밤에 기절했다가 오늘 밤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시간으로 따지면 스무 시간을 더 넘겼다.

메일은 어쩐지 입도 텁텁하고 몸도 삐거덕거리던 것을 떠올리며 하루라는 기간에 납득했다.

“아, 범인은 어떻게 됐어요?”

중요한 걸 떠올린 메일이 퍼뜩 물었다. 그렇지, 범인을 잡아야 하는데. 무엇보다 그게 가장 급했다. 메일은 지금 당장에라도 증언을 하러 움직일 의사가 있었다.

눈에 새겨둔 인상착의, 신체적 특징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 속에서 선연했다. 조금이라도 흐려지기 전에 얼른 기록해 두는 편이 좋을 텐데.

“경비대를 부르거나, 아니지, 일단 종이와 펜이라도 먼저 주실래요? 제가 기억하고 있는 범인의 특징이 몇 가지 있거든요. 우선은…….”

“범인 잡혔는데?”

“짧은 다리…… 네?”

“범인 잡혔다고.”

널 이 꼴로 만들어 놓은 놈 말이야. 리엘라가 혀를 쯧쯧 차며 덧붙였다.

메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엘라까지 알고 있을 정도면 성 안에는 이미 소식이 파다한 상태라고 보는 편이 좋았다. 공개적으로 방을 붙이지는 않았을 테니 어지간히 요란하게 잡혔나 보다.

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메일은 쓸데없이 기억 저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범인의 특징들을 지워내려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잡혔네요? 어제 있었던 일인데.”

“목격담에 의하면 현행범으로 잡혀 들어갔다고 합니다.”

소식통에 가까운 로즈가 정보를 꺼내놓았다. 메일은 그 말을 듣고 기억을 더듬었다. 현행범이라, 그렇다면 현장에서 붙잡혔다는 말인데. 그리고 곧 그녀는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메일.’

“음…….”

폐하였지, 분명히. 메일은 상기된 기억을 꼼꼼히 더듬어가며 이상한 부분이 없는지 살폈다. 어두웠지만 몸을 받쳐 줄 정도로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았으니 그게 잘못 본 것일 리 없다. 어두운 와중에도 수려하던 그 이목구비는 필시 황제가 맞았다.

‘그럼 이름을 불렸다고 생각한 건 착각인가?’

당시엔 확실히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기절했다 깨어 보니 모호했다. 메일은 그 부분에선 쉽사리 확신을 할 수 없었다. 잘못 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는 뜻으로 ‘뭬야’라고 했는데 그걸 비몽사몽간에 메일이라고 들었을지도.

메일은 고민하듯 콧잔등을 조금 찡그렸다가 도로 풀었다. 혼자 생각한다고 답 안 나온다. 정 궁금하면 나중에 기회를 엿봐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폐하께서 범인을 잡으신 거예요?”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구나……. 아무튼 현행범이라니 참 잘됐네요. 범인인 게 명백해서 처벌이 빠를 테니까. 혹시 어떻게 됐대요?”

메일이 추정하기로 범인은 평민이었다. 내막이 어찌 되든 평민이 귀족에게 상해를 입혔으니 극형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현장에서 목이 잘렸을지도.

메일은 사주한 오르밀도 잡고 싶었기에 후자는 원하지 않았다. 리엘라가 당당하게 말했다.

“범인이니까 당연히 감옥에 갇혔겠지!”

그것도 모르냐는 어조였다. 로즈가 부연했다.

“현장에서 잡힌 범인은 물론이고 관계된 동조범들까지 줄줄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아가씨를 습격했던 직접적인 범인은 며칠 후면 목이 잘릴 거라고 하더군요. 어디까지나 하녀들끼리 수군거리는 이야기를 들은 거긴 합니다만, 잡혀 들어간 사람들 중에 하녀도 있다고 하니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닐 겁니다.”

“잠깐, 사람들? 감옥에 들어간 사람이 여럿이야?”

리엘라가 불쑥 그 부분을 짚었다. 로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둘은 아닙니다. 성별도 연령도 다양하다고.”

“그래? 그럼 그중에…….”

“파란 곰팡이 영애도 있습니다.”

척하면 척이다. 로즈는 리엘라의 유능한 심복이었다. 사실을 들은 리엘라가 양팔을 하늘로 뻗으며 기뻐했다. 와! 쌤통!

메일은 덩달아 정보를 얻곤 놀랐다. 오르밀도 벌써?

“그런데 왜? 오트밀은 왜 감옥에 들어갔는데?”

“역시 모르면서 물어보셨구나. 그건 제가 말씀드릴게요. 그러니까…….”

메일의 설명은 짧고 간결했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리엘라가 손뼉을 짝 쳤다.

“그러면 걔도 목 잘려?”

“글쎄요.”

오르밀 페튼의 죄는 귀족 상해 사주였다. 평민이라면 볼 것도 없이 극형이겠지만 문제는 그녀 또한 귀족이라는 것이다.

하극상이라는 죄목을 얹는다면 죗값이 커질지 모르나 둘의 왕국이 다르다 보니 그 또한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법은 반역에 관한 것 외에는 대체로 귀족에게 관대했다.

그나마 희망을 가질 만한 것이 있다면 오르밀이 일을 벌인 무대가 황궁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간 크게 남의 나라, 무려 제국의 황궁. 이걸 빌미로 온갖 괘씸죄를 갖다 붙인다면 오르밀이 중형을 받는 것도 꿈은 아니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황제의 의사에 달렸으니 현재 오르밀의 목줄은 황제가 쥐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궁의 하녀나 시녀들끼리는 내기를 걸기도 한 모양입니다. 곰팡이 영애의 처분에 대해.”

“내기?”

“네. 우선 곰팡이 영애를 가까이서 모셨던 이들은 대개 모가지가 잘리는 쪽에 걸었다는군요.”

“완전 좋은데? 그럼 나도 모가지에 걸을래.”

“공주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저도 그쪽으로 하겠습니다. 아무튼 그런 무리가 있는 반면, 외려 보여주기 식의 가벼운 처벌로 끝날 거라는 쪽에 건 사람들도 더러 있다고 합니다.”

“뭐? 왜?”

“예뻐서 그렇답니다. 자고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쁜 여자는 죽을죄를 지어도 살아남는다는 게 그들의 주장입니다.”

“……예뻐? 누가? 곰팡이가? 걔들 눈이 좀 이상한 거 아니야?”

“아마 곰팡이치곤 좀 봐줄 만하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참나, 그럼 난 지금 가서 폐하를 때려도 무죄겠네?”

“암살해도 무죄십니다.”

“그치? 까르륵~”

리엘라도 리엘라지만 로즈 역시 만만치 않다. 메일은 두 사람의 대화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참, 그런데 메일.”

“네?”

“너 아까 잠꼬대하더라.”

“잠꼬대요?”

메일은 앉은 채로 뻐근한 어깨나 목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리엘라의 말에 반응했다.

잠꼬대라고? 그야 꿈을 꾸었으니 몇 마디쯤은 했을 수도 있다. 욕을 했다면 문제겠지만 리엘라의 태도를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메일은 가볍게 물었다.

“뭐라고 하던가요? 혹시 거기 서라거나 기다리라고?”

“아니? 그건 또 뭐야.”

“그럼요?”

“보고 싶다고 하던데.”

“네?”

예상외의 말에 메일은 깜짝 놀랐다. 자기가 그렇게 서정적인 잠꼬대를 했을 줄은 몰랐다. 이제 와서 향수병이 찾아온 것도 아닐 텐데.

그 와중에 또 짚이는 것이 있는지 철렁 내려앉는 가슴 한편은 그녀를 배로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이건 왜 이래.

“……혹시…… 누가 보고 싶은지도 말했나요?”

리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입을 연다. 메일은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긴장이 그녀를 괴롭혔다.

“뭐더라…… 발레? 발레가 보고 싶다고 했는데.”

“발레가 아니라 바일렛이었습니다, 공주님.”

“그랬나? 아무튼 그거.”

“……바일렛이요? 제가 바일렛을 보고 싶다고 잠꼬대로 그랬다고요?”

“응. 그것도 두 번이나. 아주 애절하던데.”

메일의 표정이 황당해졌다. 그녀는 맥이 탁 풀렸다. 이유 모르게 찾아왔던 긴장이 씻은 듯 사라지자 허무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메일은 허탈한 낯으로 벽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침대의 줄을 당겼다. 곧 불려온 시녀에게 물수건을 부탁해서 그걸로 대강 세안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는다. 주섬주섬 준비하는 것이 누가 보아도 나갈 낌새라 리엘라가 구경하다가 말을 걸었다.

“나갈 거야?”

“애절하게 잠꼬대까지 했던 바일렛 좀 보고 오려구요.”

“지금?”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더구나 어젯밤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위험하게 외출하시는 건…….”

“괜찮아요. 몸 상태는 괜찮으니까.”

메일은 옷을 입으면서 혹시나 싶어 무릎을 매만져 봤다. 제자리에서 콩콩 뛰어도 봤다. 멀쩡했다. 비싼 약을 썼는지 얼굴이나 목에도 멍이 남지 않아서 그녀는 겉보기엔 마냥 말끔해 보였다.

삭신이 쑤신다는 것은 기분 탓이었는지 막상 일어나서 움직이자 몸이 좀 결리는 것 외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어제 그런 일이 있었으니 오늘은 특히 안전할 거예요. 경비가 엄청 삼엄할 거라서. 그럼 금방 다녀올게요.”

“그러든가. 아, 로즈 빌려줘?”

“마음만 받을게요.”

곧 메일이 처소를 나섰다. 무심한 듯 관대한 리엘라는 닫히는 문에다 대고 손을 흔들어주는 인심을 써주었다. 잠시 후 문이 완전히 닫히자 리엘라가 앉은 채로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난 이제 뭐 하지?”

“혈액순환에 좋은 족욕…… 발 목욕을 추천 드립니다.”

“그거 좋다. 아, 그런데 로즈.”

“네.”

“이제 생각났는데. 메일 아까 잠꼬대로 발레 말고 뭐 다른 것도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뭐더라, 선생님?”

“선생님이 아니라 선배님이었습니다.”

“맞아, 그랬지.”

뒤늦게 잊고 있던 사실을 기억해 냈지만 말해줄 사람은 이미 자리에 없다. 리엘라는 나중에 메일이 돌아오면 전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름 기특한 생각이었다. 물론 그때까지 까먹지 않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