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마지막으로 메일을 본 것은 닷새 전 정원에서였다. 그 이후로는 홍수처럼 덮친 업무에 발이 묶여 차마 외출하지 못했고, 외출하지 못했으니 당연히 메일 또한 볼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장인의 초상화보다 선명하게 메일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다. 언제 이 지경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지경이 됐다.
로하이덴은 한참을 이마를 짚은 채 아무것도 없는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메일의 모습은 허공이 아닌 책상에도 그려졌다. 미친 게 분명했다.
본인이 돌았다고 결론을 내린 황제는 곧 벌떡 몸을 일으켰다. 며칠 내내 잠도 줄여가며 일에 매진했으니 바른 순서를 따른다면 다 제치고 당장 침소에 들어야 옳다.
그러나 그는 잠자리에 드는 대신 연회장으로 가는 것을 택했다. 이 상태로 침상에 누워 봐야 어차피 잠은 오지 않을 것이 뻔했으니까.
그는 황제의 모습 그대로 집무실을 나섰다. 그가 가면을 챙기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가면을 쓴 채로 연회장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것은 퍽 위험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불문율을 어기고 그에게 아는 척을 한다면 어찌 되겠나. 로하이덴은 그런 식으로 메일에게 자신이 황제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목적지를 정한 그의 걸음이 바빴다. 그는 황제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만큼 메일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걸 생각은 없었다.
일단은 그냥, 다소 떨어진 곳에서 얼굴만 보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예고 없는 그의 행차에 사용인이 호들갑을 떨고 시종이 나자빠지고 몇 후보가 은근히 다가와 추파를 던지겠지만 그 정도는 감안하고 감내할 수 있다. 괜찮았다. 어쨌든 지금은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렇게 연회장에 도착한 로하이덴은 반쯤 열린 문 앞을 조금 앞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향한 곳은 황제 및 귀빈 전용이 아닌 연회 참가자 모두가 이용하는 공용 문이었다. 그 문 가까이에 붙어선 하녀 둘이 뭔가를 속닥거리고 있었다.
작은 목소리였으나 로하이덴은 남들보다 월등히 청력이 좋았다. 무시하기엔 수상한 대화가 속속들이 그의 귀에 박혀들었다.
“정말? 고작 음료수를 엎지르기만 하는데 그 돈을 준다고 했다고?”
“그렇다니까. 정확히는 음료수든 뭐든 옷이 더러워지게만 하면 된댔어. 별궁으로 드레스를 갈아입으러 가도록. 아, 어떻게든 혼자 나가게 하라고도 했네.”
“그래서 성공은 했고?”
“물론이지. 누가 봐도 실수처럼 보였을걸?”
“운 좋았네, 기집애. 그런데 누구였어? 누구한테 음료수를 쏟은 거야? 오늘 연회에 참석한 걸 보면 간택전에 참가한 후보일 텐데.”
“몰라. 암갈색 머리에 눈은 녹색이었다는 것밖에. 아아, 그 영애와 같이 연회장에 들어왔던 다른 사람은 알아. 내가 또 금발을 좋아하잖아. 어디 왕국에서 온 공주님이라고…….”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더 시간을 보내는 대신 얼른 몸을 돌려 뛰었다. 불안감이 속에서 섬뜩하게 솟아올랐다.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뭔가를 저지르는 사람이 좋은 의도였던 것을 그는 여태 목격해 본 적이 없었다. 심장이 기분 나쁘게 두근거렸다.
별궁은 멀지 않았다. 입구에 경비병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로하이덴은 절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라. 제발.
절박한 바람을 안고 뛰어든 궁의 복도는 어두웠다. 그는 어둠이 아니라 이 어둠 속에서 메일이 뭔가를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덜컥 두려움이 치밀었다.
그가 최근에 이리 뭔가를 간절하게 바라본 적이 있던가. 최근이 아니라 더 과거까지 거슬러 가도 없을 것이다. 그는 초조함을 내리누르며 어둠 속을 뛰었고, 곧 발견했다.
“커억!”
찰나의 기억이 없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 의식에도 남지 않았다. 그는 쓰러진 메일을 밟고 있던 남자를 걷어차 치워 버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늘어진 가는 몸을 부축하는 손이 다급함으로 떨렸다. 입술을 겨우 열어 이름을 불렀다. 메일.
황제의 모습으로 메일을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꽤나 부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이 상황에 그런 이성적인 사고가 될 리 없었다.
그의 팔에 몸을 기댄 메일은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안심한 듯 편안하게 숨을 내쉬었다. 더듬더듬 흘러나오는 잔뜩 쉰 목소리는 듣기가 괴로울 지경이라 그는 애원하듯 메일의 말을 막았다.
메일은 곧 그의 팔 안에서 혼절했다. 로하이덴은 그녀를 부축한 채로 사력을 다해 속에서 치솟는 화를 내리눌러야 했다. 지금 메일을 감싼 제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잠시 후 기사와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본궁에서부터 황제를 발견한 경비대가 숨이 턱에 닿도록 뒤따라 달려온 것이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황제의 안위를 묻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순서를 가리지 않고 튀어나왔다. 번잡한 소란에 로하이덴이 짧게 대답했다.
“짐은 괜찮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죄인을 이송해라. 치죄는 후에 직접 하겠다.”
황제의 시선이 닿은 곳엔 웬 천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기절한 듯 축 늘어져 있었다. 대강 이게 어떻게 된 판국인지 눈치챈 병사들이 얼른 다가가 남자를 포박했다.
로하이덴은 가까이 다가오는 기사들을 고갯짓으로 물린 뒤 손수 메일을 안아 들었다. 손길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이대로 곱게 죽어선 안 될 중죄인이다. 살려놓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남자는 피거품을 물고 있었다. 로하이덴이 그를 걷어찰 때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으니 가만히 놔두면 필시 오래지 않아 숨이 넘어갈 것이다. 그리 깔끔하게 죽일 수는 없지. 절대로.
“경.”
“하명하십시오.”
“연회는 중지다. 가서 전해. 그리고 오늘 연회장에 일손으로 참여했던 모든 하녀를 잡아다 본궁의 알현실에 세워놔.”
“당장 시행하겠습니다.”
허리를 깊숙이 숙인 기사가 곧 먼저 달려 나갔다. 로하이덴은 이어서 명령했다.
“별궁 경비를 맡은 병사들도 전부 잡아 대령해라. 한 놈도 빠짐없이.”
“시행하겠습니다!”
각기 맡은 일을 수행하려는 움직임들이 바빴다. 로하이덴은 이후 메일을 안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만인이 황금보다 찬연하다 칭송했던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딛는 발걸음에서마저 한기가 묻어나 뒤따르던 병사들이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폐하, 이게 무슨…….”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반테르가 아연한 낯을 했다. 그의 친우이자 상관이 그를 당황시키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지만 단연코 이번만큼 놀란 적은 처음이었다.
황제는 처소 안으로 들어서는 반테르를 보며 입술에 손가락을 하나 가져다댔다. 쉿. 제스처가 의미하는 바가 지나치게 명확해서 반테르는 그대로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괜찮은가?”
“큰 외상은 없습니다. 타박상은 약을 발라두면 금방 나을 겁니다. 아마 극도의 긴장에서 벗어나면서 탈진 증세가 온 것 같습니다만, 지금은 기절보다는 수면 상태에 가까우니 푹 자고 나면 문제없이 깨어나실 겁니다.”
메일을 진찰한 궁의가 침착하게 소견을 밝혔다. 그는 반테르보다 세 배는 급하게 불려왔는지 잠옷 차림이었다. 진찰 결과를 들은 황제가 그제야 사람다운 얼굴을 했다.
“다행이군.”
궁의는 마찬가지로 생각했다. 정말 다행이다. 처음 이곳에 불려왔을 때 마주한 황제의 용안은 다시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살벌하여 그는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만약 진찰한 영애가 괜찮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그는 멀쩡한 영애에게 마음 깊이 감사했다.
“수고했네. 그만 돌아가 쉬게.”
“망극합니다.”
“폐하.”
궁의가 물러나자 반테르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침상 옆에 선 황제와 침상에 누워 있는 영애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이 어딘가 형언하기 힘들 만큼 복잡해졌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대충 들었을 것 아닌가.”
“말 그대로 대충입니다.”
황제는 구태여 반테르에게 세세한 사정을 설명해 줄 용의는 없는 것 같았다. 로하이덴의 눈은 잠든 메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곡절을 듣는 것을 포기한 반테르가 질문을 바꿨다.
“좋습니다. 그건 대충이라도 들었으니 넘어간다치고, 저는 왜 부르신 겁니까?”
“여길 지켜.”
“……예?”
“이곳을 지키게, 경.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니, 어딜 다녀오시려고. 그러나 반테르의 의문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물을 겨를도 주지 않고 황제가 성큼성큼 처소를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로하이덴은 그리 복도로 나와 곧장 알현실로 향했다. 너른 공간으로 마련된 알현실에는 기사단에게 잡혀온 하녀들이 연유도 모르고 벌벌 떨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병사들이 나란히 무릎을 꿇고 있다. 도착한 황제는 차분하게 말했다.
“한 명씩.”
“……?”
“하녀들은 한 명씩 아무 말이나 이야기해라. 목소리를 듣기 위한 것이니 내용은 어떤 것이든 좋다.”
“들었느냐? 당장 명을 이행하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서로를 돌아보며 눈치만 보던 하녀들은 기사의 일갈에 화들짝 놀라 부랴부랴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 마치 자기소개 같던 짧은 말하기가 끝나자 황제는 곧바로 두 사람을 지목했다. 지목당한 두 하녀가 새파랗게 질려 끌려나왔다.
“나머지는 이만 돌려보내도 좋다.”
“알겠습니다.”
남겨진 하녀는 황제의 앞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궁 안의 허드렛일이나 담당하는 하녀의 입장에서 황제는 연심이나 선망보다는 두려움을 느끼기에 적합한 대상이었다.
그건 굳이 황제가 폭군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폭군이든 성군이든 손가락 하나로 그들을 죽일 수 있는 지위라는 건 같으니까.
물론 로하이덴은 그녀들을 죽이고자 남긴 것이 아니다. 지은 죄에 합당한 처벌은 내리겠지만.
질문은 평이한 어조로 흘러나왔다. 이미 짐작은 하고 있으나 온전한 확인을 위해서였다.
“사주를 받고 연회에서 음료수를 엎은 것이 어느 쪽이지?”
대답은 굳이 필요 없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닌 쪽이 옆을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오른쪽에 선 하녀는 숫제 울기 직전이었다. 확인을 마친 로하이덴이 이번엔 무릎 꿇은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본래라면 오늘 밤 별궁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어야 하는 병사는 이 중 누구인가. 이번에도 색출은 금방이었다. 두 병사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무리에서 쫓겨나듯 튀어나와 부복했다.
“그래.”
황제가 웃었다. 물론 즐거워서 웃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이야기를 듣지. 차례대로.”
하녀와 병사 둘. 도둑은 제발을 저리고 죄인은 신전에 들지 못한다. 세 사람 중 떨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