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려라 메일 (46)화 (46/144)

리엘라는 낮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메일의 모습을 하고 있는 동상을 봤다.

“우응, 뭐 해? 그거 노는 거야?”

아니, 실은 메일이 맞았다. 다만 뭘 생각하는지 한쪽에 심각한 자세로 앉아서는 미동도 않기에 동상처럼 보였을 뿐이다.

메일은 리엘라의 말을 한번 씹었다. 본의 아닌 무시에 리엘라가 이번엔 몸소 가서 상대를 건드렸다.

“메일.”

“헉! 네?”

“움직이지 않기 놀이를 하는 거야? 잠깐 멈췄다가 다시 해. 나 배고파.”

메일이 움직이지 않았던 건 놀이가 아니었고 배가 고프면 침대맡의 줄만 간단히 당기면 된다.

메일은 그것들을 설명하는 대신 가만히 눈만 깜박이다가 이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엘라가 이상하게 볼 정도로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녀 자신도 몰랐다.

“어, 뭐로 드실래요? 어제처럼 오믈렛에 샐러드를 주문할까요?”

“아니.”

“달리 드시고 싶은 거라도…….”

“가서 고를래.”

“네?”

“식당이 있을 거 아니야? 가자.”

리엘라는 그렇게 말하곤 선 채로 기지개를 켰다. 입을 벌려 하품도 했다. 왕족의 품위는 없지만 예쁜 얼굴로 저러니 참 귀엽…… 다가 아니라. 메일이 조금 놀라서 들은 것을 되물었다.

“식당으로 가시겠다구요?”

“응. 멀어?”

“멀진 않아요.”

“로즈도 배가 고프겠지?”

“로즈와 함께 식당에 갈 순 있지만 공주님과 겸상, 그러니까 같이 먹는 건 못할 거예요. 아니, 그보다 웬일로 나가서 식사할 생각을 하셨어요?”

리엘라는 때에 따라 게으르기도 하고 부지런해지기도 했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전자가 압도적으로 비율이 높았다. 그녀가 밥을 먹기 위해 외출을 택한 건 제국에 온 이후로 이번이 처음이었다.

공주님은 메일의 질문에 대충 대답했다.

‘그냥.’

평소와 다른 결정을 내린 이유가 단순 변덕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게 해주는 답이었다.

“그래요. 그럼 함께 나가요. 채비는 간단히 하실 거죠?”

“가면 뭘 먹을까?”

불친절한 응수나 동문서답은 익숙하다. 메일은 시녀를 불러 리엘라의 머리나 옷차림을 도로 정돈시켰다. 자고 일어난 마당이니 양치질도 권했다. 상쾌하고 깔끔한 상태로 거처를 나선 리엘라는 식당까지 가는 동안 큰 의미는 없는 말들을 재잘거렸다.

리엘라가 자의적으로 내놓은 본인의 꿈 해석에-개꿈이었다-메일이 맞장구를 몇 번 쳤을 때쯤 둘은 식당에 도착했다.

메일은 과거 아침부터 식당 안에 후보들이 바글거렸던 광경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오늘은 그때보단 훨씬 보이는 인원수가 적었다.

식당에 상주하며 수발을 드는 사용인이 의자를 빼주자 리엘라가 냉큼 가서 앉았다. 메일도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빈 잔에 새로 따른 물을 한 모금 홀짝인 리엘라가 입을 열었다.

“뭐 먹을래?”

마찬가지로 목을 축인 메일이 눈을 들어 리엘라를 마주했다. 도서관에 같이 가자고 했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제 보니 공주님은 은근히 남 챙기기를 잘했다.

어디까지나 제 사람에 한정되는 거겠지만 그래서 더 의미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 시비에서 어느새 리엘라의 사람이 된 메일이 빙긋 웃었다.

“공주님 드시는 걸로요.”

“내가 뭘 먹을 것 같아?”

“글쎄요?”

“나도 몰라.”

“고르기 어렵다는 말씀이시군요. 보통 식당엔 그날그날 주방장이 내놓는 회심의 메뉴 같은 것이 있어요. 특별히 원하시는 요리가 없으면 그걸로 해도 괜찮을 거예요.”

“응, 그럼 그럴래. 나 회심의 메뉴.”

알겠어요. 웃으면서 대답한 메일이 근처에 서 있던 사용인을 불러 음식을 주문했다. 시키고 나서 도로 리엘라를 쳐다보다가 메일은 문득 말을 꺼냈다.

“공주님.”

“응?”

“저 이름 한 번만 불러주세요.”

부탁이 뜬금없었다. 그러나 아주 근본 없이 튀어나온 것은 아니었다.

리엘라는 몰랐으나 그건 아까 처소에서 메일이 멍하니 앉아 있었던 이유와 관련이 있었다. 리엘라는 갑작스런 청에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기는 했으나 선선히 그것을 들어주었다.

“메일.”

그리고 이름을 불린 메일은 생각했다. 아무렇지 않은데.

“한 번만 더요.”

“메일.”

“역시 괜찮은데.”

“뭐가?”

“공주님.”

“왜?”

“공주님도 종종 남에게 이름으로 불릴 때가 있잖아요. 불릴 때 보통 어떤 기분이 드세요?”

“이름을 불리는 기분.”

“음…….”

얼핏 무성의한 대답 같지만 어떻게 보면 현답이었다. 이름을 불릴 때 달리 들 만한 특별한 기분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걸 이쪽도 알기는 아는데. 복잡한 심경에 메일이 잠깐 턱을 괴었다가 얼른 도로 풀었다. 식사 예절에 턱 괴기는 없었다.

‘메일.’

메일은 지나간 목소리를 떠올렸다. 오래되지는 않았고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그때 바람이 불었던가? 그런 사소한 것까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선명하고 명확한 것은 이름을 들었을 때 자신이 보였던 반응이었다.

상대는 기습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이제 와 되새기니 기습적이라는 표현이 참 옳다. 메일은 정말로 예기치 않게 공격을 당한 기분이었다. 예고도 없이, 그렇게 갑자기 불린 이름은 그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심장이 뛰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조금은 철렁, 하고 내려앉는 것 같기도 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긴장이 되고 열이 올랐다. 동시에 공연히 상대의 눈을 제대로 마주 보기가 힘들었다.

왜 그랬을까.

“그런데 공주님한테는 백번을 불려도 그런 기분이 안 들 것 같아요.”

“어, 물 안에 꽃잎 있다.”

종종 남의 말을 귓등이나 발등으로 듣는 리엘라의 특기가 이럴 땐 도움이 되었다. 저도 모르게 흘러나간 혼잣말을 메일이 수습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메일은 고개를 짧게 흔들 듯 내저은 다음 리엘라의 꽃잎 탐구에 손을 보탰다.

더 오래, 깊게 생각한다면 어쩌면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태여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본인조차 이유를 모르는 무의식적인 제제였다.

마침 주문한 요리가 나와 메일은 주의를 그리로 옮길 수 있었다. 그녀는 먹으면서 동시에 생각도 하고 말도 할 수 있는 멀티 능력자였지만 이번엔 일부러 능력을 봉인했다.

메일은 최대한 먹는 행위에만 집중하려 노력했다. 덕분에 메일의 식사는 매우 경건한 양상이 되었다.

그렇게 메일이 재료 하나하나의 맛을 음미하며 때아닌 미식가의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막 식당 안으로 들어선 누군가가 앉을 생각은 않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내부를 훑었다. 마치 뭔가를 찾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식당 전체를 시선으로 샅샅이 뒤진 누군가가 곧 눈길을 한군데에 고정했다.

‘찾았다. 이년.’

양 눈썹 사이를 찡그렸다 편 오르밀이 입가를 늘려 웃었다.

‘에이미 이것이 아주 간만에 쓸모 있는 짓을 했어.’

에나 일행이 주머니를 받으며 에이미에게 약조했던 것이 있었다. 일부러 감시를 하진 않더라도, 일상 중에 우연찮게 메일을 발견하게 되면 두어 번쯤은 에이미에게 당장 알려주기로 한 것이다.

인원이 네 명이나 되니 한 명 정도는 일과 중에 잠깐 자리를 비우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전달을 받은 에이미는 듣자마자 얼른 주인 아가씨에게 보고했고, 오르밀은 그렇게 이 자리에 나타나게 되었다.

‘마침 잘 기어 나왔어. 아주 엉엉 울게 해주마.’

“에이미, 그거.”

메일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오르밀이 손을 내밀었다. 식당까지 따라 나온 에이미가 그에 얼른 품 안에서 주머니를 꺼내 아가씨의 손 위에 얹었다. 오르밀의 하얀 손과 대비되는 어두운 갈색 주머니였다.

필요한 것을 전달한 뒤 에이미는 공손하게 옆으로 빠졌다. 그러면서 눈길은 주머니를 힐긋거린다.

저 안에 대체 뭐가 들었을까?

에이미는 몇 시간 전을 회상했다. 에나 일행은 돈 값을 하기 위해 준비했다며 그녀에게 작은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칙칙하고 어두운 갈색에, 크기도 크기거니와 무게가 현저히 가벼웠다. 뭐가 들었는지 궁금했으나 열어보면 별로 좋지 못할 거란 말을 들었기에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에나 일행은 경고에 이어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차를 마시든, 식사를 하든 아무튼 뭔가를 먹고 있을 때 사용하면 효과가 좋을 거야. 차라면 찻잔 안에, 음식이라면 스프 안에 퍼부어줘. 엉엉 울다 뿐일까? 잘하면 기절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을걸.’

그들은 그렇게 말한 뒤 당부도 잊지 않았다. 나중에 혹시 저걸 사용한 일로 추궁을 당하게 되더라도 무조건 네가 구한 것으로 하라고. 우리 이름이 나오는 일은 절대 없게 하라고. 신신당부를 한 뒤에나 일행은 자리를 떴다.

‘궁금해.’

누군가를 괴롭힌다는 양심의 가책은 여전히 그녀를 아프게 했지만, 사람의 호기심이란 또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에이미는 주머니를 든 채 메일에게 다가가는 제 주인 아가씨의 모습을 까치발을 들어가며 주시했다.

오르밀의 걸음은 의기양양했다. 주머니에 든 게 뭔지는 그녀 또한 아직 모른다. 그러나 잘하면 기절까지도 시킬 수 있다고 했으니 자연히 기대가 되었다.

메일의 바로 근처까지 당도한 오르밀은 상기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콧바람을 뿜었다. 식사를 막 끝내가던 메일이 깜짝 놀랐다.

“……페튼 영애?”

“식사는 맛있나요?”

메일이 미간을 슬쩍 좁혔다. 오르밀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도 황당한데 그렇게 나타나서는 대뜸 밥은 맛있냐니. 걸어온 말은 두 배쯤 황당했다. 메일은 일단 식기를 내려놓았다.

“주방장이 힘을 썼는지 아주 맛있네요. 남은 거 드릴까요?”

무슨 꿍꿍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침착하게 응수했다. 이 자리에 로즈가 없는 것이 내심 다행이었다.

오르밀이 죽을 걱정은 덜었으니까. 그런 메일의 속내를 알 길 없는 오르밀이 잠깐 발끈했다가 금방 표정을 바꿨다.

“호호, 필요 없으니 마저 드세요. 제가 특별히 더 맛있게 해줄 테니까.”

메일은 그제야 오르밀의 손에 들린 갈색 주머니를 발견했다. 어, 설마 저거? 오르밀의 대사나 주머니의 존재감이 심상치 않았다. 아카데미 재학 시절 비슷하다면 비슷한 상황을 목격했던 메일이 얼른 리엘라를 돌아보았다.

리엘라는 먹던 것을 멈추고 멀뚱히 앉아 있었다. 오르밀의 등장에 짜증은 나는데, 상대가 자신이 아닌 메일에게만 말을 걸고 있으니 이 상황에서 자기가 화를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헷갈리는 것 같았다.

식기를 내려놓아 자유로워진 메일의 손이 움찔거렸다. 여차하면 당장 리엘라의 눈부터 가려야 했다.

“그쪽을 위해 준비했으니 마다하지 말고…….”

그때 오르밀이 멈칫했다. 말을 하며 주머니의 끈을 풀던 도중이었다. 주머니를 얹은 그녀의 손바닥이 뭔가 이상한 감각을 잡아냈다.

방금 뭐가 움직였는데?

바스락.

“바스락……?”

촉각 말고 청각도 자기 몫을 했다. 움직임도 느껴지고 소리도 들렸다. 오르밀이 그리 멍청하게 들은 것을 입 밖으로 중얼거렸을 때였다. 반쯤 열린 주머니의 입구로 긴 더듬이 한 쌍이 모습을 드러냈다. 쫑긋.

“…….”

검고 긴 더듬이.

본 것을 뇌가 인지하는 데까지 일 초쯤 걸렸다.

오르밀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뭐, 뭐야?”

“무슨 일이지?”

들고 있던 주머니를 오르밀이 있는 힘껏 던졌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행했다. 바닥으로 패대기쳐 지며 주머니의 입구가 완전히 열렸다. 그때부터는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 오르밀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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