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계속 읽어줘. 빨리.”
“알았어요. 왕과 왕비님은 서로 사랑했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 사이엔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왕비님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왕은 후사를 위해 두 번째 부인을 들였습니다.”
동화책 같던 시작과는 달리 책의 이야기는 제법 어둡고 현실적으로 흘러갔다.
성정은 나쁘지 않지만 무능한 왕. 왕을 사랑하지만 질투가 많은 왕비. 착하고 소박하지만 입궁한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왕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 후궁.
이야기는 그렇게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평생 왕비님만 사랑할 것 같던 왕은 후궁이 예쁜 공주님을 낳자 그녀에게 더 큰 관심을 주었습니다. 왕의 명령 아래 후궁은 항상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었습니다. 왕비님은 그런 왕의 행동이 일시적인 변덕일 거라 생각했지만, 왕의 변덕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질투가 많은 왕비는 과연 가만히 있었을까? 슬프게도 그러지 않았다. 후궁은 공주를 낳았지만 힘이 없었다. 속한 가문이 한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은 더없이 무능했다.
“예쁜 공주님이 처음으로 자기 힘으로 걸을 수 있게 되던 날, 왕비님은 후궁에게 끔찍한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날은 공주님의 생일이었습니다. 햇볕이 내리쬐던 오후, 후궁은 왕비님이 보낸 독을…….”
문장을 읽어 내리던 메일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거 더 읽어야 되나? 별로 정서상 좋지 못한 이야기였다.
리엘라가 정말로 어린아이인 건 아니지만 더 들려주는 것이 공연히 내키지 않았다. 말을 멈춘 메일이 슬그머니 책에서 눈을 뗐다.
‘자는구나.’
다행이었다. 리엘라가 새근새근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한 메일이 즉시 책을 덮었다. 손놀림에 주저는 없었다.
제목이 왜 공주님의 눈물인가 했더니 가정사가 이 모양이면 나라도 눈물이 나겠다. 메일은 책을 따로 빼놓았다. 반납 일 순위였다.
리엘라가 잠이 들자 메일은 다시 자유를 얻었다. 할 일이 없어진 메일은 의자에 앉은 채로 턱을 슬쩍 괴었다. 시선은 리엘라를 향하고 있었다.
아이처럼 잠에 빠진 리엘라. 눈을 감고 고른 숨소리를 내는 작은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평온해 보인다.
메일은 아이가 자는 모습을 보며 종종 천사 같다고 이야기하던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안 어울려.’
새삼스럽지만,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았다. 저 천사처럼 맑고 평온한 얼굴과 메일을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던 지독한 악몽 속 광경은.
‘내가 놓치고 있는 뭔가가 있는 걸까?’
메일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나뭇잎을 떠올리게 하는 초록색 눈에 음영이 졌다. 그녀는 곰곰이 악몽 속 내용을 다시 짚어보았다. 굳이 상기하려는 노력은 필요 없었다. 꿈은 마치 어제 꾼 것처럼 생생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비, 비보가 늦었습니다. 화, 황제가, 헬베른의 황제가…….’
‘아악!’
‘멍청한 공주를 둔 자기들의 운명을 탓해라. 씨 하나 남기지 말고 모조리 쓸어버려! 폐하의 명령이다!’
‘공주님이…….’
‘고, 공주님께서 황제의 정인을…….’
‘독살…….’
아, 머리 아파. 메일은 턱을 괬던 손을 풀어 제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눌렀다.
꿈의 내용을 떠올릴 때면 으레 따라붙곤 하던 두통은 이번에도 어김없었다. 지끈거리는 통증이 익숙해질 듯 말 듯 이어진다. 메일은 생각을 멈췄다.
‘안 되겠어. 머리를 좀 비우자.’
사실 이제 와 꿈의 내용에 대해 분석하는 것은 대단히 쓸모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현실의 리엘라는 황제를 사랑하지 않았고, 질투에 눈이 멀기는커녕 황제의 정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며, 무엇보다 사람을 죽일 만한 성정도 못 되었다.
악몽 속 전개는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았다. 지금은 생생하더라도 제국을 떠나고 나면 곧 꿈의 내용 또한 흐려지고 잊힐 것이다.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그냥 밝은 생각으로 채우자. 밝은 생각. 몸에 좋고 정신에도 좋은 밝은 생각.’
메일은 처소를 나왔다. 자기에게 세뇌를 걸 듯 밝은 생각, 밝은 생각을 중얼거린 그녀가 어디로 향했을지는 구태여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 믿는다. 이쯤 되면 메일의 거처는 두 군데라고 봐야 했다.
정원 안으로 들어서며 메일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 이 공기야. 뭘 맡고 뭘 봐도 밝은 생각밖에 안 떠오르는 곳. 온갖 부정을 정화하는 그대의 이름은 정원…….”
메일은 말끝을 흐렸다. 눈앞에 펼쳐진 정원의 모습은 여상히 아름다웠지만 정작 그녀의 눈길을 끈 것은 따로 있었다.
잎이 무성한 긴 가지를 넓게 뻗은 커다란 나무 옆, 그 그늘 아래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거의 올 때마다 마주치는 수준이었으니 상대는 그녀에게 정원의 지박령이라고 불린대도 할 말이 없었다.
어제도 봤고, 아마 그저께도 봤을 것이다. 메일은 선 자리에서 뒤로 도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반.’
이름을 들었지만 어쩐지 부르기가 쑥스러웠다. 메일은 그것을 속으로만 삼키고 대신 익숙한 호칭을 꺼냈다.
“선배님, 혹시 여기서 사세요?”
“왔군.”
“한가해도 너무 한가하신 거 같은데.”
뭘 또 기다린 사람처럼 맞아주고 그런담. 메일은 가까이 걸어가 상대를 마주 보고 서선 공연히 헛기침을 했다.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약속을 한 것 같은 이 만남이 새삼 신기했다. 이제는 놀랍지 않다는 것이 놀랍다.
피식 웃은 로하이덴이 먼저 편안하게 앉았다.
“잠깐씩 들르는 건데 신기하게 올 때마다 마주치는 것 같군.”
“그건 제가 할 말이에요.”
“실은 아침에도 이곳에 왔었는데.”
“그땐 제가 없었잖아요. 아쉬우셨겠어요.”
“아쉽지 않았다고 하면 삐치나?”
“설마.”
치마를 그러모아 쥔 메일이 간격을 조금 띄우고 마찬가지로 주저앉았다. 그러고 보면 이성을 이처럼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다. 또래의 친구들과 어릴 때나 이렇게 마주 보고 떠들었었지.
메일은 앉은 채로 물끄러미 로하이덴을 응시했다. 가면은 생김새는 보여주지 않아도 눈동자까지 가리지는 않았다. 로하이덴은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메일을 의아하게 마주 보았다.
“오늘따라 시선이 뜨거운데?”
“선배님.”
“음?”
“…….”
“불러놓고 왜 말이 없나.”
“눈동자 말이에요. 원래 그 색이에요?”
“뭐?”
로하이덴이 흠칫 놀랐다. 가면은 이럴 때 참 유용하게 도움이 된다. 찰나 표정 관리를 놓치더라도 그것을 알아서 가려주니까. 놀랐지만 놀라지 않은 척한 그가 재차 응수했다.
“눈동자를 염색할 수 있다는 건 금시초문인데.”
“그건 저도 아는데요, 음……. 그러게 왜 그런 생각이 들었지?”
긴 갈색 머리를 하나로 간단하게 묶은 작은 머리통이 갸웃거렸다. 메일은 방금 전 상대의 붉은 눈동자를 응시하다 문득 ‘다른 색이면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저런 질문이 나온 것이다. 본인도 왜 그런 생각이 들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메일은 그리 조금 의아해하는 데서 그쳤지만, 반면 로하이덴은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덜컥 내려앉았던 그의 가슴을 알아주는 사람은 이 자리에 그 혼자뿐이었다. 보는 사람이 없었다면 가슴께에 손을 얹고 숨을 골랐을지도 모른다.
‘들키는 줄 알았다.’
로하이덴의 눈동자는 본래 붉은색이 아니다. 그는 적안이 아니라 황금을 옮겨놓은 듯한 금안이었다. 눈부신 백금발에 선명한 금안. 황가의 상징이자 현 황제의 상징. 얌체같이 가면 하나로 제 정체를 숨기고 있는 로하이덴이 위기를 넘기고 한숨 돌렸다.
“그러는 메…… 너는.”
“네?”
운을 터놓고 로하이덴이 부자연스럽게 침묵했다. 그가 메일의 이름을 부르려다 실패해서 ‘너’로 급하게 선회했다는 것은 그를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는 사실일 것이다.
로하이덴은 이제 와 뒤늦게 충격을 받았다. 그는 꽤 전부터, 그러니까 메일을 처음으로 마주쳤던 날 이후부터 계속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부르려고 시도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 대신 매번 영애라고 칭했지. 그래, 호칭이야 그렇다 치고 문제는 실패를 했다는 부분이다. 이름을 부르려다 실패했다.
왜? 아니, 이게 뭐 성공하고 실패하고 할 만한 거라고. 혼란에 휩싸인 로하이덴은 실패의 이유도 모르면서 곧바로 다시 도전했다.
“메…….”
“메?”
“메리골드가 참 예쁘군.”
“전 또 뭐라고. 당연한 얘기잖아요.”
……뭐야, 이거?
로하이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게 아닌데. 그는 이 순간 굉장히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동공지진을 겪고 있었다.
제국 하늘 아래 더는 올려다볼 사람이 없던 지고한 황제가 지금 스무 살 소녀의 이름을 부르지 못해 연달아 실패를 겪고 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이야기였다. 심지어 로하이덴 그 본인조차도.
“대체 뭐지?”
“뭐가요?”
“설화에서 읽은 것 같기도 한데. 이름을 부르면 돌로 변한다던가? 아니, 그건 얼굴을 보는 거였나.”
“무슨 소리예요?”
어디 아프세요? 황당한 표정을 한 메일이 이어 물었다. 로하이덴은 대답하는 대신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응시했다.
메일. 메일 폰 비제아트. 그녀의 이름은 메일. 메일의 이름은…….
“메일.”
“갑자기 웬 설화 얘기를…… 어?”
아. 불렀다.
뭐야, 쉽잖아.
그러나 로하이덴에게서 이어지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고작 이름을 불린 걸로 화들짝 놀란 메일이 이내 선명하게 당황스러워하는 티를 냈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눈을 빠르게 깜박거린 그녀가 곧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피했다.
“아, 네. 음, 부르셨어요?”
바로 앞에 상대를 놔두고 왜 애꿎은 허공을 보며 대답하는지, 그리고 귓가는 왜 붉어진 건지.
로하이덴은 드는 의문 중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애초 자신조차 왜 이름 하나를 바로 부르지 못하고 몇 번이나 버벅였는지 이유를 답해 줄 수 없었으니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매리골드만이 저 홀로 발랄하게 바람에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