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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메일 (43)화 (43/144)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은발이 함께 흔들렸다.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메일은 색이 옅고 가는 상대의 은발을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오래되지 않은 기억이 저절로 떠올랐다.

“아, 분명 저번에.”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다. 정확히는 만났다기보다는 부딪힌 적이 있는 거지만.

복도에서 모퉁이를 돌다 우연히 부딪혔던, 사소하고 별것 아닌 일이었으나 메일은 그것을 제법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온통 창백한 인상에 또렷한 하늘색 눈동자가 인상에 깊게 남았었기 때문이다.

“아…… 안녕하세요. 우연히 또 뵙네요.”

기억하고 있었던 건 메일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인은 메일의 아는 체에 순순히 호응했다. 그녀는 머리에서 손을 떼곤 고개를 꾸벅 숙였다.

“괜찮냐고 물어봐 주셔서 고마워요. 그때도 지금도 참 상냥하신 분이시네요.”

인사까지 받을 일은 아니었다. 메일은 손사래를 치다가 저번에도 상대에게 과한 인사를 받았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여인은 특이한 인물이었다. 다시 보아도 분명 곱게 자란 외양인데.

메일은 우선 화제를 바꿨다.

“책을 빌리러 오셨나요?”

“아, 네. 영애께서도……?”

“그럼요. 이곳은 책이 잘 정돈되어 있어서 좋네요. 한눈에 보기에 종수도 많고.”

이건 빈말이 아니었다. 도서관 내부는 확실히 칭찬이 아깝지 않을 만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것은 분류표만 간단하게 훑어보아도 알 수 있다. 사서의 솜씨가 확실히 빼어난 모양이었다.

“독서를 즐기는 사람들은 이 도서관이 정말 마음에 들겠어요. 앞으로도 쭉 찾고 싶을 만큼.”

그렇게 말한 메일은 직후 제 발언을 점검해 봐야만 했다. 여인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급격한 변화였다. 여인은 일부러 내비친 표정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금방 본인이 더 당황스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 숙인 채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그렇죠. 좋은 곳이에요. 황궁의 사람들에게만 개방되는.”

여인의 말은 그냥 듣기엔 당연한 발언이었다. 황궁 안에 위치한 도서관이니 자연히 황궁의 사람들에게만 개방된다. 단순한 사실을 이야기한 것처럼 들리나, 메일은 어쩐지 그 말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건 뒤집어 말하면 황궁의 사람이 아니라면 출입할 수 없다는 뜻. 뭐지? 그게 자기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걸까?’

가설을 세우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가령 여인은 지금 당장은 황궁에 머물지만 곧 이곳에서 쫓겨나게 될지도 모른다던가.

그럼 더 이상 황궁의 사람이 아니니 앞으로는 지금처럼 도서관에 드나들 수 없다. 그렇다면 표정이 어두워진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비약이야.’

메일은 금방 추측을 털어버렸다. 직감뿐인 가정에 굳이 무게를 얹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메일은 이만 자리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서서 오래 이야기를 나눌 사이도 아니었다.

“황궁의 도서관이라 그만큼 엄격하게 관리되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모쪼록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시길 바랄게요. 전 이만…….”

“아, 저기.”

퍼뜩 고개를 든 여인이 메일을 붙잡았다. 그리 잡아놓고선 잠시 망설이다가 곧 입술을 달싹인다.

“혹시…… 간택전의 후보이신가요?”

“네?”

여인의 질문은 갑작스럽고 맥락이 없었다. 메일은 의아하게 상대를 쳐다보았다. 창백하다는 느낌을 주는 흰 피부에 부러질 듯 앙상한 체형.

메일이 기억하기로 연회 홀에 모였던 후보 중 여인은 없었다. 있었다면 눈에 띄어서 바로 알아봤을 것이다. 그때 분명 모든 후보를 불러 모았다고 했었으니 바꿔 말하면 여인은 후보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왜 저런 것을 물을까?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이었으나 메일은 일단 순순히 답을 주었다.

“아니에요.”

“아……. 그러시군요.”

“다만 후보 한 분을 가까이서 모시고는 있답니다.”

여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메일이 후보가 아닌 시비로서 이곳에 체류하고 있다는 사실이 퍽 의외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기실 메일의 외모나 지위라면 충분히 후보에 오를 자격이 있었으니 그럴 만한 반응이었다.

“대체 어느 분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네요. 더 질문하실 것이 있나요?”

“아, 죄송해요. 저어, 한 가지……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될까요?”

“그러세요.”

허락을 받았지만 여인의 질문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사람에 따라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을 침묵이었다. 그녀는 조금 더 주저하다 침묵을 깼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알지만요.”

“……?”

“혹 알고 계시거나 들으신 것이 있나요? 폐하께서…… 달리 신경 쓰시는 후보에 대해.”

“네?”

반문하는 메일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높았다. 그만큼 놀랐다는 방증이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더니 정말로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폐하가 뭐?

‘달리 신경 쓰는 후보?’

그런 걸 알고 있을 리가. 아니, 그전에 전제부터가 이상했다. 메일이 알기로 황제에게는 따로 정인이 있었다. 간택전에는 일말 관여하지 않겠다 선언까지 했는데 웬 신경 쓰는 후보?

그런 게 있을 리가 없고 있다 해도 금시초문이었다. 메일은 고민할 것 없이 얼른 대답했다.

“유감이지만 없어요. 아는 것도, 들은 것도 전혀 없답니다.”

“…….”

“그렇게 쳐다본다고 제가 모르는 걸 갑자기 알게 되지는 않아요.”

“아, 죄, 죄송해요.”

“아녜요. 그럼 전 정말 가볼게요.”

메일은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왜 저런 걸 알고 싶어 하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구태여 캐물을 정도까진 아니었다. 그녀는 필요 없는 관심은 크게 갖지 말자는 주의였다.

그리 멀어지는 메일의 뒷모습에 여인의 눈길이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다.

메일이 사라지자 이젤린은 곧바로 표정 관리를 관뒀다. 애써 괜찮은 척 가장했던 낯빛이 도로 눈에 보이게 어두워졌다. 안색을 감추기 위해 책장을 바라보고 선 이젤린이 자기 입술을 깨물었다.

‘아는 것도, 들은 것도 없다고? 그럼 그 후보가 입이 가벼운 인물은 아니라는 뜻이네.’

이젤린은 추측이 아닌 확신을 했다. 황제에게는 분명 특별한 사람이 생겼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보이는 태도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미안하군. 선약이 있어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는 제 요청에 거절의 답이 떨어지던 날 이젤린은 깨달았다.

아, 위험하다. 나 정말 위험하구나. 선약이 있다고 말하는 황제는 웃고 있었다. 대체 누구를 생각하기에.

‘후보 중의 한 사람이 맞아. 틀림없어. 이제 와 전부터 일하던 시녀 따위를 품거나 할 리는 없잖아.’

새롭게 궁에 들락거리기 시작한 사람은 없다. 시기상으로도, 정황상으로도 황제의 그녀는 간택전의 후보 중 한 명이 분명했다.

입이 가벼운 사람이라면 이미 물밑으로 소문이 퍼졌을 텐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젤린이 초조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는 이미 전에 이 문제로 후작에게 상담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후작은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워낙 단호하게 이야기해서 이젤린 또한 잠시 안도를 얻었었다.

그러나 한번 생긴 불안감이란 얼마나 끈질긴지. 안타깝게도 그녀의 안심은 아주 잠깐이었다. 일시적으로 며칠은 괜찮았으나 그녀는 금방 도로 괴로워졌다.

‘날 버리지 않을 거라고 했지. 버리지 못할 거라고. 하지만 그걸 어떻게 알지?’

잠깐이나마 안도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이젤린을 뒤흔드는 불안감은 컸다. 그녀는 송두리째 흔들렸다.

한때는 믿음을 주었던 후작의 장담조차 이젠 같잖은 거짓부렁처럼 느껴졌다. 기실 일리 있는 의심이었다. 후작은 말만 그랬지 딱히 증거 같은 건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황제는 정말 저를 내치지 않을 것인가? 황제의 마음을 얻은 새 사람이 그에게 매달려도? 다른 이와 당신을 나눠 갖고 싶지 않다 눈물로 호소하고 매달려도?

정말?

‘어떡하지.’

후작은 말했다. 너는 그저 여태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고. 제자리에서 본분이나 마저 지키라고 말이다.

그러나 후작이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상실에 대한 이젤린의 공포가 생각보다 컸다는 것이다.

‘난 무엇을 해야 하지? 뭘 해야 지금 누리는 것을 지킬 수 있지?’

반복해서 깨물린 이젤린의 입술이 붉게 부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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