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할 거야.”
침대에 웅크려 앉은 메일이 중얼거렸다. 어제 일찍 잠든 탓인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기상한 리엘라가 조식을 먹다 말고 그런 메일을 흘긋 쳐다보았다.
“뭐 해?”
“혼자 있고 싶어요. 다 나가주세요.”
“뭐라는 거야.”
리엘라는 금방 흥미를 잃었다. 다시 포크를 움직여 구운 과일을 잘라먹기 시작한다. 메일은 세상을 때리고 싶은 기분이 되어 무릎을 세운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속았다.
누구한테 속았냐면 책의 저자한테 속았다. 메일은 억울했다. 그녀는 과거 동일한 저자가 집필한 비슷한 제목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제목은 ‘요염한 누나와 부엌에서 단둘이’. 그리고 그것은 불건전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표제와는 다르게 평범한 요리책이었다. 그래, 요리책. 요염한 누나는 그냥 요리사였다!
‘요염한 누나와는 요리를 하면서 왜 화끈한 그이와는 나무를 안 심는 건데…….’
나쁜 작가……. 진짜 저주할 거야……. 본의 아니게 낚여서 거대한 흑역사를 생성하게 된 메일이 침대 구석에서 내적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부끄럽다. 민망하다. 안면이 판매된다. 한참을 발버둥 치던 그녀가 진정한 것은 리엘라가 식사를 끝내고 후식인 초콜릿 티까지 모조리 들이켰을 때였다.
먹을 걸 다 먹고 나자 리엘라는 다시 메일에게 관심을 주었다.
“거기서 왜 그러고 있어?”
“……그냥…… 이러고 싶은 날이에요. 오늘 이 순간은요.”
“이거나 봐봐.”
애초 상대의 사정은 별달리 궁금하지 않았던 리엘라가 자기 용건만 들고 메일에게 다가갔다. 품에는 밝은 표지의 책을 안고 있었다. 메일은 파묻고 있던 무릎에서 고개를 들어 어느새 지척까지 접근한 리엘라를 쳐다보았다.
「공주와 기사와 왕자와 마왕과 드래곤 1권」
일단 내미니까 받아들긴 받아 든다. 메일은 리엘라가 내민 책을 든 채로 의아하게 상대를 응시했다. 이걸 왜 저한테?
책을 넘긴 리엘라가 진지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못 고르겠어.”
“네?”
“기사랑 왕자랑 마왕이랑 드래곤 중에서 누굴 골라야 할까?”
……?
그걸 왜 공주님이 고르시죠?
메일은 리엘라의 (딴에는 진지한)고민을 듣고는 떨떠름하게 책을 내려다보았다. 소설을 읽다 보니 여주인과 본인을 동일시하게 된 건지, 아니면 이참에 그냥 종이 애인을 하나 만들겠다는 선언인지. 황당해하면서도 메일은 일단 책을 펼쳤다.
“꼭 한 명만 골라야 하는 거예요?”
“결혼은 한 명이랑만 할 수 있잖아.”
언제 결혼 계획까지?
“아무튼 골라봐. 누가 제일 멋진 것 같아?”
“……책을 주신 건 읽어보라는 뜻이죠? 다 읽고 선택해 볼게요.”
이렇게 의미 없는 선발은 참 간만이었다. 메일은 제비뽑기 같은 걸로 아무나 고르려다 이내 생각도 비울 겸 소설을 완독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옳았다. 앉은 자리에서 공주와(이하 생략) 세 권을 연이어 독파한 메일은 성공적으로 머리를 비울 수 있었다.
머리가 비워지니 그녀를 괴롭게 했던 부끄러움 등의 감정들도 제법 희석되었다.
메일은 자기를 수치의 늪에서 꺼내준 리엘라가 고마웠다. 물론 리엘라는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겠지만.
“공주님, 저는 마왕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그래? 왜?”
“우선 잘생겼고, 또 여기 묘사를 보면…….”
책을 펼친 채로 성의껏 리엘라와 놀아주던 메일이 문득 아까 정원을 나오면서 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헤메라의 여신이 가호를 거두는 시간에 다시 여기서 만나지. 바구니와 깔개는 볼모야.’
후다닥 도망치는 메일의 등에 대고 로하이덴이 던진 말이었다. 말하자면 약속을 잡은 셈이다. 통상적으로 헤메라의 여신이 힘을 못 쓰게 된다고 여겨지는 시간은 저녁 6시쯤. 막 석양이 질 시간대였다.
‘어쩐다…….’
정원도 좋고 석양도 좋은데 자신이 망측한 성인 소설을 낭독했다는-비록 도입부이긴 했지만-것과 선배님에게 바구니를 던졌다는 사실은 매우 좋지 못했다.
메일은 골머리를 앓으며 일단 리엘라가 심각하게 늘어놓는 마왕과 드래곤의 매력 비교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