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삼 년 전 봄, 저는 제 취미에 대해 알고 싶다는 약혼자를 흔쾌히 집으로 초대했어요. 저택의 후원에 제가 직접 가꾼 정원이 있었거든요.”
목소리를 깔자 분위기는 알아서 형성되었다. 로하이덴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약혼자는 책 읽기를 좋아하고, 바깥 활동을 잘 안 하는 사람이었어요. 말수가 없고 얌전했죠. 그래서 따로 호위 기사 없이 정원에 단둘이만 있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아무 일 없을 거라고. 그런데…….”
아무 일이 있었다. 청취자 로하이덴이 긴장했다.
“약혼자, 아니, 그 자식이 그날따라 무슨 책을 읽고 왔는지 남녀 간에 대한 호기심이 넘치는 상태였던 거예요. 당연히 저는 전혀 관심이 없는 혼자만의 호기심이었죠. 하지만 그 자식은 어차피 곧 결혼할 사이인데 괜찮지 않으냐며 혼자 앞서가서 제게 강제로 과한 접촉을 시도했고…….”
긴장이 더 심해졌다. 언제 주먹을 쥐었는지 모를 로하이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그 자식을 넘어뜨린 다음 마구 때리기 시작했죠.”
“……음?”
생각지도 못 했던 전개였다. 뭘 시작해? 청자가 혼란스러워하든 말든 메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진짜 핵심은 보다 뒤에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제가 호신술을 몇 가지 배웠었거든요. 사실 약혼자 자식을 초대했던 것도 여차하면 힘으로 이길 자신이 있어서였어요.”
약혼자는 전형적인 학자 타입이었다. 개중에서도 아마 특히 유약한 편이었을 것이다. 깡마른 몸에 체력은 바닥을 쳤으니 설사 주먹다짐을 하게 되었더라도 이쪽이 이겼을 거라고 메일은 종종 생각하곤 했다.
“아무튼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놀란 마음에 엉겁결에 나뭇가지로 상대를 마구 후려쳤죠. 나무를 손질하던 와중이라 막 잘라낸 상한 가지를 손에 들고 있었거든요.”
“…….”
“그런데 문제는 이때 일어났어요. 제가 겨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때리던 것을 멈췄을 때, 몸을 웅크린 채로 맞고 있던 약혼자가 벌떡 일어나서는 제게 이렇게 말한 거예요.”
뭐지? 두 번째 위기인가? 로하이덴이 재차 긴장해서 표정을 굳혔다. 그 순간 메일의 입이 열렸다.
“너무 좋아요! 더 때려주세요! 부디 저를 이 나뭇가지로 사정없이 더 후려쳐 주세요!”
로하이덴은 귀를 의심했다.
“……뭐?”
“알고 보니 그 약혼자 자식은 피가학적 변태였던 거죠. 하지만 스스로는 모르고 살아왔었구요. 그랬는데 저한테 정의의 나뭇가지 응징을 당하면서 그만 눈을 뜨게 된 거예요. 말하자면 제가 각성시켜 버리고 만 거죠!”
“…….”
여태 진지하게 듣던 청자 로하이덴이 말문을 잃었다.
“물론 저는 그것도 개인의 취향이라고 생각해요. 맞으면서 좋아할 수도, 때리면서 좋아할 수도 있죠. 남에게 피해만 안 주면 나쁜 건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그 자식은 그런 걸 떠나 저를 강제로 덮치려고 했었으니 당연히 약혼은 깨질 수밖에 없었어요.”
“…….”
“한데 상대측 가문에선 이 혼처를 놓치고 싶지 않았나 봐요. 우리 아이가 마음이 앞서 실수한 건 죄송하지만, 그래도 오래 이어온 관계인데 한 번만 넘어가 주실 수 없겠냐고 저희 집까지 찾아와 사정을 했죠. 그러다 약혼자의 상처를 들먹이며 폭행죄로 공녀가 재판에 회부되면 서로 좋을 게 없지 않겠냐고 협박도 곁들였고요. 제가 듣다못해 약혼자 분의 성향이 이러이러하더라 설명을 하자 지금 누구네 명예를 실추시키려고 그런 말을 하냐며 막 노발대발하기도 했는데…….”
“어떻게 끝났지?”
“다음 날 약혼자가 자기 가정교사랑 야반도주를 했어요.”
“…….”
“자길 가장 거칠게 훈육해 주었던 가정교사였대요. 나중에 제 이름으로 고맙다고 편지가 와서 알았어요.”
“가관이군.”
기가 찬 로하이덴이 이마를 짚었다. 살다 살다 이렇게 뒤통수가 얼얼한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풀썩 나무에 등을 기대는 로하이덴을 보며 메일이 씩 웃었다.
“제 친구가 전에 이 얘길 듣고 그러더라구요. 웃어야 할지 탄식해야 할지 욕을 해야 할지 박수를 쳐야 할지 모르겠다고.”
“마찬가지야.”
가면이 없었다면 그는 꽤나 얼빠진 표정을 상대에게 보여주고 말았을 것이다.
로하이덴은 다시없을 파격적인 이야기를 꺼내놓고는 눈을 접으며 웃는 메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황당한 전개에 당황스러운 결말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다행이군.”
“뭐가요?”
“다치거나 하지 않아서.”
“…….”
메일은 일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로하이덴과 시선을 맞췄다. 변태를 각성시키고 약혼이 깨지고, 충격적인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런 걸 떠나 그 와중에 다치거나 해를 입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한다.
물론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던 친척이나 지인 중 몇몇은 그런 식으로 그녀를 걱정해 주곤 했다. 딱히 새로울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 새롭네.’
걱정을 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낯간지러운 일인 줄은 몰랐다. 어째 공연히 상대를 계속해서 마주 보기가 어렵다. 상대의 시선을 피한 메일은 내심 허둥지둥 화제를 전환할 만할 걸 찾았다. 그러니까, 아, 맞다. 책.
그녀는 거처에서 책을 가지고 나왔다. 어제 리엘라의 주도로 함께 갔던 도서관에서 빌려온 서적이었다.
책등을 포함해 전체적으로 검은색 표지에 제목은 고급스럽게 금박으로 되어 있다. 메일은 정원에서 식후에 여유롭게 읽을 목적으로 챙겨온 것을 얼른 꺼냈다.
“저는, 크흠, 슬슬 책을 좀 읽어볼까 해요.”
“책?”
로하이덴이 이채를 띠었다. 정원 안에서 식사를 마치더니 이제는 책이라. 잘하면 나중에는 여기서 잠도 잘 것 같았다.
여태 열심히 가꾸기는 했지만 정원을 그리 다용도로 활용할 생각은 못 해본 그가 메일의 발상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 자리에서 책이라. 나쁘지는 않겠군. 한데 무슨 책이지? 느낌상으론 분명 정원…….”
로하이덴의 말이 끊겼다. 책의 제목을 눈에 담자마자 그는 움직임을 멈췄다. 적색 눈동자가 일순 세차게 흔들렸다.
……잘못 읽었나? 그러나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적힌 글자는 변하지 않았다. 자기 눈을 의심한 로하이덴이 짧은 침묵 후 입을 열었다.
“그 책.”
“네?”
“혹시 내용은 알고 빌린 건가?”
메일은 상대의 시선이 책의 표지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녀는 눈을 내려 화려한 금실로 수놓아져 있는 서명을 응시했다.
「화끈한 그이와 정원에서 단둘이♡」
마지막 글자 옆에는 앙증맞은 하트도 붙어 있었다.
도로 눈을 든 메일이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냐는 어조로 대답했다.
“화끈한 그이와 정원에서 단둘이 나무 심는 내용이잖아요.”
“…….”
“선배님? 괜찮으세요?”
메일은 화들짝 놀랐다. 로하이덴이 갑자기 등을 대고 있던 나무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쓰러졌기 때문이다.
자세를 무너뜨린 그가 고개를 숙인 채로 어깨를 떨었다. 당황한 건 메일이었다. 뭐야? 왜 저래?
“그…… 책, 지금부터 읽을 건가?”
뭔가를 꾹 눌러 참는 듯한 목소리였다. 메일은 상대가 왜 저러나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순순히 대답했다. 네.
“혹시 책에 관심 있으세요? 그럼 다 읽고 나서 빌려드릴게요. 대출 기간은 넉넉하게 잡았으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
“지금부터 읽을 거라고 했지? 그럼 낭독을 좀 부탁해도 되겠나?”
겨우겨우 차분한 척 말을 뱉는 로하이덴의 입매가 미세하게 떨렸다.
메일은 모를 것이다. 지금 그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느라 훈련 때도 안 쓰던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로하이덴은 인내했다. 아직, 아직이다. 아직 웃을 때가 아니야.
“낭독이요? 그야 어렵진 않죠.”
메일은 흔쾌히 상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고국에 있을 때 곧잘 놀아주곤 했던 사촌 동생이 올해 겨우 일곱 살이었다. 소리 내 책을 읽어주는 것 정도야 그녀에겐 익숙한 행위 중 하나였다. 왜 요구한 건지 궁금하긴 하지만 낭독이 딱히 별건 아니니까.
목을 가다듬은 메일이 능숙하게 책을 펼쳤다.
“목차는 건너뛸게요. 아, 어차피 없네.”
책은 서장이나 소제목도 없이 첫 장부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메일은 무릎 위에 책을 올려놓은 채 낭랑한 목소리로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
“로젤리아는 정숙한 여성이었다. 집안에서 엄격하게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그녀는 부지 내의 정원을 방문하면서도 반드시 장갑을 꼈다. 얼굴을 절반 이상 가리는 챙이 넓은 모자를 빼먹지 않는 것은 물론이었다.”
메일은 속으로 로젤리아의 마음가짐을 칭찬했다. 나무를 심기 위해선 장갑이 필수였다. 예쁘게 관리한 손을 아무리 자랑하고 싶더라도 반드시 장갑을 끼고 있어야 한다.
또 오랜 시간 정원에 머물러야 했으니 햇빛이 강한 날에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쓰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역시 정원 책. 여주인공의 준비성에 내심 고개를 끄덕거린 메일이 다음 문단으로 눈을 내렸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로젤리아는 정원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남자였다. 로젤리아는 그를 마주치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망가뜨릴 것이다.”
……?
메일은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갑자기 망가뜨리긴 뭘 망가뜨려?
어쨌든 만났으니 이제 곧 나무를 심겠지. 여백이 넓은 책은 한 면에 들어가는 글자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메일은 다음 장을 넘겼다.
“그는 정원에서 로젤리아를 발견하는 순간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낚아챘다. 그리고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 그녀를 밀어붙였다. 로젤리아는 반항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어두운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마치 거미줄에 옥죄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라. 이거 뭐지. 메일이 조금씩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무를 심어야 하는데 흘러가는 책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저러다가 나무를 심나?
“한순간에 상대의 포로가 된 그녀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가빠지는 숨을 조금씩 몰아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때 그런 로젤리아를 향해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서 삽을 가져와.
그렇게 둘은 서로 정답게 정원에서 나무를 심었다.
……는 어디까지나 메일의 희망 사항이었다. 실제로 책에 적힌 다음 구절은 그녀의 기대를 인정 없이 박살 냈다.
“로젤리아, 당신이 남자의 앞에서 결코 모자와 장갑을 벗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내가 벗기고 싶은 건 다른 거니까. 싫으면 싫다고 이야기해요. 그렇게 말한 그가 능숙한 손길로 로젤리아의 치…… 마를…….”
탁.
메일은 책을 덮었다.
방금 내가 뭘 읽은 거지?
해당 페이지의 우측 하단에는 낯부끄러운 삽화까지 그려져 있었다. 섬세한 그림체로 아주 노골적이게도 그려 놨다.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책장을 덮은 메일이 즉시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식은땀이 흐른다. 아무리 메일이라도 이쯤 되자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얘네 나무 안 심잖아.
안 심어.
나무는 안 심고 정원에서 서로…….
“……어라.”
“뭐?”
“기억을 잃어라!”
메일은 냅다 로하이덴의 머리를 향해 바구니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리나케 도망쳤다. 그런 메일의 뒤로 로하이덴이 정원이 떠나가라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