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려라 메일 (33)화 (33/144)

그녀는 여상한 발길로 정원에 들어섰다. 그리고 선정해 둔 명당에 앉아 음식과 식기를 꺼냈다. 오늘의 식사는 어제와는 달리 평화로웠다.

옆에서 말을 거는 누구도 없었고 갑자기 등장해서 달려드는 단검 팔이 침입자도 없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그저 조용하고 느긋했다.

메일은 마지막 접시의 요리를 깨끗이 비운 뒤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왜 허전하지?’

어쩐지 약간 모자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딱히 양이 부족했다거나 요리의 맛이 성에 안 찼다거나 한 것도 아닌데 의아한 일이었다.

메일은 묘하게 아쉬움과 닿아 있는 이 느낌의 근원을 찾으려 노력하다가 문득 바일렛의 싹을 눈에 담았다. 싹은 오늘도 파릇파릇했다.

“이건가? 인사를 빼먹어서? 흐음…… 안녕, 바일렛? 네 자태는 여전히 예쁘구나. 봉오리는 언제쯤 맺히는 거니?”

동년배의 친구들이 다들 약혼에 결혼에 빠르면 애까지 낳아 기르는 동안, 연애는커녕 짝사랑조차 해보지 않은 메일은 그렇게 엉뚱한 곳에서 감정의 연유를 찾다가 의문을 풀지 못하고 정원을 나왔다.

의아함은 그대로였으나 메일은 원인 모를 허전함에 대한 생각을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딱히 시간을 들여 고민하고 싶을 만큼 궁금한 건 아니었다.

메일은 식당에 들러 식기가 든 바구니를 반납한 뒤 거처로 돌아왔다. 메일의 귀환을 맞이해 준 건 침대에 정자세로 누운 리엘라였다.

“곰팡이한테 이겼어?”

저번에는 얼굴에 오이를 올리고 있더니 이번엔 감자를 얇게 썰어 붙이고 있었다. 저걸 왜 한다고 했었지? 아, 심심해서. 메일은 두 번째라고 벌써 익숙해지려 하는 리엘라의 식재료 사용법에 시선을 주며 대답했다.

“그럼요.”

“그럴 줄 알았어. 별거 아니야, 곰팡이.”

“그렇더라구요.”

누운 채로 발장구를 치는 리엘라는 퍽 즐거워 보였다. 직접 본 것도 아니면서 그저 오르밀의 패배를 전해 들은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남의 불행을 본인의 행복으로 삼는 건 썩 권장할 만한 행위가 아니었지만 상대가 오르밀인 만큼 메일은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리엘라는 얼굴에 감자를 붙인 채로 한참을 더 오르밀의 욕을 하더니 어느 순간 대뜸 화제를 바꿨다.

“있잖아, 나 도서관 갈래.”

“네? 도서관이요?”

메일은 순간 놀라서 리엘라를 쳐다보았다. 도서관은 보통 지식의 보고라고 일컬어지는 공간이다. 리엘라와 지식의 보고라니. 안 어울리는 걸 넘어 괴상하기까지 한 조합에 당황하던 메일은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 도서관에는 연애 소설도 있지.’

리엘라는 청순한 뇌를 지녔지만 문맹은 아니었다. 독해력도 은근히 나쁘지 않아서 로맨스 소설 정도는 곧잘 읽었다. 아마 전기 이론도 그러다가 습득하게 되었을 것이다. 평정을 되찾은 메일이 몸을 움직여 리엘라에게로 가까이 이동했다.

“같이 가자는 말씀이신 거죠?”

“응.”

“알았어요. 혼자 가신다고 했어도 따라갔을 테지만요. 로즈는요?”

부를까요? 묻는 것에 리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감자 몇 개가 베개로 떨어졌다.

“로즈는 바빠.”

“뭘 하는데요?”

“수련을 좀 하고 오겠대.”

“…….”

무슨 수련인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저번에는 팔 근육을 단련했으니 이번엔 다리 근육을 단련하고 있으려나. 메일은 다음에 로즈를 만나면 어디가 전보다 더 발달했는지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가까운 곳으로 가실 거죠?”

“도서관이 여러 개야?”

“아마 이곳 별궁에도 있고 저쪽 본궁에도 있을 거예요.”

“그래? 어디가 더 커?”

“그건 잘 모르겠어요.”

성의 크기만 따지면 본궁이 별궁의 배는 된다. 하지만 설계에 따라 도서관 같은 시설은 별궁의 것이 큰 경우도 더러 있었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드나들기에 본궁보다는 아무래도 별궁이 쉽기 때문이다. 리엘라는 3초쯤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가까운 데로 가자.”

“알았어요. 그럼 우선 감자부터 뗄게요.”

메일이 시선도 돌리지 않고 줄을 당겼다. 줄을 당기는 솜씨에도 경지가 있다면 메일은 자신이 장인 근처까지는 오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곧 익숙하게 들이닥친 시녀들이 현란한 손길로 리엘라를 꾸미기 시작했다. 감자를 떼고 세안을 시키고 화장을 하고 드레스를 입힌다. 반복된 작업에 그녀들도 익숙해진 건지 속도가 빨랐다.

메일은 그걸 구경하다 새삼 리엘라가 이런 것에서만 유난히 부지런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갈 때마다 저런 과정을 거치는 것도 정말 게으르다면 못할 텐데.

메일은 잠시 후 반짝반짝해진 리엘라와 함께 처소를 나섰다.

“그런데 왜 갑자기 도서관에 갈 생각이 드셨어요?”

“그게, 심심해서 감자 미용을 했는데.”

“네.”

“그래도 심심한 거야.”

“…….”

“그래서 어쩌지? 오이 미용을 해야 하나? 하다가 도서관이 떠올랐어. 나 원래 책 많이 읽거든.”

리엘라답다면 리엘라다운 사고의 흐름이었다. 메일이 ‘과연 공주님이시네요’ 하고 대답하자 리엘라가 칭찬으로 알아듣고 콧대를 세웠다. 예쁘니까 그러는 모습도 나름 귀여워 보이긴 했다.

도서관은 생각보다 가까워서 안내를 받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메일은 안으로 들어서며 가볍게 내부를 둘러보았다.

전체적으로 한산한 가운데 드레스 차림으로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는 영애가 서너 명쯤 되었다. 낯선 면면이 아닌 것을 보니 후보들인 모양이었다.

메일은 혹시라도 공주님이 저들과 마찰을 빚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하며 리엘라를 책장 쪽으로 이끌었다.

“생각해 두신 책이라도 있으세요?”

“음…….”

“읽고 싶으신 내용이라든가.”

“여주인공이 금발이고 공주인 소설.”

금발이고 공주인 리엘라가 주춤거리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메일은 그것참 리엘라다운 선정이라고 생각하며 가까이 있던 사서를 불렀다.

“필요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책을 찾고 싶은데, 좀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어떤 책이죠?”

메일은 리엘라가 말한 조건을 고스란히 사서에게 전달해 주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찾을 때 주로 제목이나 저자명, 주제를 알려주는 것을 생각하면 다소 미안할 정도로 불친절한 조건이긴 했으나 그래도 그냥 ‘재미있는 책’을 찾아 달라 요구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메일은 미리 고맙다는 말을 건넨 뒤 근처에서 자기가 볼 다른 책을 골랐다.

‘기왕 왔으니 한 권 정도 골라볼까?’

메일은 책을 자주 읽는 편도, 그렇다고 아주 드물게 읽는 편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적당했다. 평균을 내면 딱 그 정도가 나오지 않을까 싶을 만큼, 남들이 읽는 것과 비슷하게 읽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주로 찾는 서적의 종류일 것이다. 그녀는 메마른 감수성의 소유자라 남이 사랑하고 질투하고 행복해하는 이야기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즉 로맨스 소설은 안 본다는 소리였다. 메일은 책을 고를 때 오로지 한 가지 키워드의 여부만 따졌다. 정원.

‘오, 있다.’

원하는 키워드를 발견한 메일이 눈을 반짝였다. 검은 표지에 금박으로 된 제목은 빽빽이 꽂힌 책들 사이에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제법 높은 곳에 꽂혀 있었으나 평균보다 반 뼘쯤 키가 큰 메일이 까치발을 들자 꺼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그렇게 책을 빼내 손에 쥐었을 때, 리엘라가 저도 막 필요한 책을 얻었는지 폴짝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제 가자.”

“생각보다 빨리 찾으셨네요? 어, 세 권씩이나 고르셨어요?”

“3권이 완결인 책이거든.”

세 권짜리 책은 리엘라 대신 사서가 들고 있었다. 메일은 흘긋 눈길을 주어 제목을 살폈다. 공주와 기사와 왕자와 마왕과 드래곤. 어쩐지 제목만 읽었는데도 내용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책이었다.

메일은 리엘라의 이름으로-도서관 자유 이용은 후보의 권한이었다-대출증을 쓴 뒤 책을 들고 거처로 귀환했다.

오는 길에 쉬웠기에 가는 길은 굳이 안내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 길을 기억하는 메일이 앞장서고 길치 리엘라가 그 뒤를 가벼운 발걸음으로 쫄랑쫄랑 따랐다. 도착은 아까처럼 금방이었다.

심심하다던 말이 정말이었던 듯 리엘라는 처소에 도착하자마자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쳤다.

그렇게 몇 장쯤 읽다가 눈을 빼꼼 올려 메일을 쳐다본다. 넌 안 읽냐는 뜻이었다. 낮잠이라도 잠깐 잘 요량으로 옷을 갑아 입던 메일이 그 시선에 간단하게 답을 주었다. 내일 읽으려구요.

메일은 옷을 전부 갈아입은 뒤 시녀를 불러 따뜻한 차를 부탁했다. 그녀는 누구처럼 머리만 대면 깊은 잠에 빠지는 축복받은 체질이 아니었기에, 숙면을 위해 자기 전 차 한잔으로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작은 노력 정도는 필요했다.

“여기 말씀하셨던 차입…….”

“아, 고마워요.”

메일은 피곤한 상태였다. 오전부터 꽤 넓은 곳을 산책한데다 오르밀을 상대한 뒤 도서관까지 다녀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피곤하니까 다른 곳에 주의를 기울일 만한 기력이 없었고, 그래서 메일은 차를 가져온 시녀가 왜 도중에 말을 끊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 탓에 미처 보지 못했다. 화장대 위에 올려둔 책의 제목을 읽은 시녀의 표정이 일순 묘하게 변했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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