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려라 메일 (32)화 (32/144)

말문을 잃었던 메일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이 초대장을 전해 준 사람 말이에요, 저기 저 시녀 맞죠?”

“응.”

“지금까지 내내 나가지도 못 하고 서 있었을 거구요.”

“어떻게 알았어?”

“곰팡이 영애의 의도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아서요.”

하여간 악독한 성미였다. 메일이 위처럼 대답하자 리엘라는 고개를 한번 갸웃하더니 시녀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곤 묻는다.

“너 왜 안 가고 거기 계속 서 있어?”

시녀는 두 시간 전부터 저 자리에 있었다. 그걸 이제야 묻는 리엘라에게 메일이 시녀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거예요.”

“응? 왜?”

“페튼 영애, 그러니까 곰팡이가 오지 못하게 했을 테니까요. 저를 데리고서가 아니면 돌아오지 말라고 했겠죠. 안 그래요?”

“……맞습니다.”

얌전히 서 있던 시녀가 시인했다. 그녀는 오르밀이 고국에서부터 데리고 온 개인 시녀였다.

시녀는 모시는 아가씨의 명령을 받고 초대장을 전달하러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여태 돌아가지 못했다. 상대방이 초대에 응할 때까지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그곳에 서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어기고 빈손으로 돌아간다면 십중팔구 매질을 당하게 될 터였다.

시녀는 익숙한 듯 크게 힘겨워 보이지 않았다. 사실 하루까지는 이러고서 버틸 수 있었다. 그 이상이 경과하면 쓰러지겠지만.

혀를 찬 메일이 침대맡의 줄을 당겼다. 애꿎은 사람을 괴롭히고 싶지는 않으니 초대에 응해 줄 생각이었다. 다만 이 상태로 그냥 가지는 않는다. 저쪽은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 이쪽도 어느 정도는 갖춰줘야 구색이 맞지 않겠는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 메일을 보며 리엘라가 말했다.

“로즈 빌려줄까?”

큰 선심이었다. 고맙지만 메일은 거절했다. 상대를 죽이러 가는 게 아니었다.

“아마 단순하고 유치한 괴롭힘일 거예요. 절 골탕 먹이고 면전에서 비웃을 목적이겠죠. 아카데미를 다닐 때 비슷한 걸 목격한 적이 있거든요.”

“그건 왜 챙겨?”

“예상이 맞다면 필요할 일이 있을 것 같아서요.”

“옷은 또 왜 그렇게 입고?”

“이것도 필요할 것 같거든요.”

“이상해.”

“승리를 위한 거예요.”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잠시 후 메일은 초대장을 전달한 시녀와 함께 방을 나섰다.

오르밀 페튼은 높은 확률로 뇌의 부재가 의심되는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사람인고로 아주 기본적인 사고 정도는 할 줄 알았다. 그러니까 죽이고 싶다고 아무나 다 잡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쯤은 안다는 소리였다.

그녀는 생각했다.

‘아직은 내가 신분에서 밀려.’

오르밀은 백작 영애. 메일은 공녀. 국력이야 비슷했으니 그녀와 메일의 배경은 엄밀히 따져 두 단계나 차이가 났다.

오르밀은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열받긴 하지만 현실이었으니까. 오르밀의 이성은 보통 사람보다는 못해도 짐승보다는 나은 수준이었기에 그녀는 현실의 앞에서 작은 타협을 했다.

‘황후가 되기 전까진 목을 붙여둘 수밖에.’

그녀는 선심을 쓰는 척 처형의 집행을 뒤로 미뤘다. 상대의 목은 자신이 황후가 된 다음에 따도록 하겠다. 황후의 관을 쓰고 황제를 살살 구슬린다면 그깟 약소국 귀족의 목 따위는 얼마든지 실컷 뗐다 붙였다 할 수 있겠지.

오르밀은 꿀 같은 미래를 그려보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달콤한 상상이었다.

똑똑.

“아가씨, 저 에이미입니다.”

‘왔군.’

오르밀이 짙게 머금고 있던 미소를 얼굴에서 싹 지웠다. 그녀는 오늘 메일을 초대했다. 거창한 의도는 아니었다. 그냥 선전포고라도 할 겸 상대방에게 골탕을 좀 먹여줄 심산이었다. 치욕으로 부들부들 떠는 상대의 얼굴을 구경하는 것은 목을 따는 것보다는 못해도 그 나름대로 재미가 있을 것이다.

“들어와.”

문이 열렸다. 오르밀은 앉은 채로 눈을 들어 제 개인 시녀와 함께 들어오는 인영을 응시했다.

나무껍질 같은 갈색 머리카락은 평범하고 특색이 없다. 녹음을 닮은 초록색 눈동자는 비교적 봐줄 만했으나 그마저도 제 하늘색 눈동자와 비교한다면 칙칙할 뿐이었다. 오르밀은 픽, 비웃음을 흘렸다. 볼품없기는.

“무슨 착오가 있었나 보네요. 난 당신을 식사 자리에 초대한 거지, 사냥터에 초대한 게 아닌데.”

사냥터의 짐승들과 섞여 뛰어놀면 퍽 어울릴 법한 모습이로군요. 노골적으로 메일을 위아래로 훑은 오르밀이 그렇게 덧붙였다. 어투에서는 조소가 묻어났다. 사냥터처럼 거칠고 먼지가 가득한 장소에나 알맞은 정도로 네 행색이 초라하다는, 드러내놓고 던지는 조롱이었다.

메일을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며 오르밀의 맞은편에 앉았다.

“제가 원래 사슴 같다는 말을 종종 듣곤 해요.”

“뭐…….”

“자리에 맞게 대충하고 왔는데 그래도 티가 났나 봐요? 자연에서 뛰노는 사슴 같은 제 미모가.”

그렇게 말한 메일이 생긋 웃었다. 메일은 상대에게 수준을 맞춰줄 각오를 하고 왔다. 상대가 저렇게 나온다면 이쪽에서도 이렇게 나가면 그만이다. 그녀는 얼마든지 유치하고 뻔뻔해질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말문이 막힌 오르밀이 하, 기가 차다는 듯 헛숨을 뱉은 뒤 손짓으로 시녀를 불렀다.

“……요리를 내와.”

“네.”

음식은 금방 나왔다. 그래도 명색이 식사 자리라고 밥을 준비하긴 한 모양이었다. 고급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접시 위에는 스테이크와 구운 채소가 먹음직스럽게 올려져 있었다.

오르밀은 포크와 나이프를 들곤 제법 우아하게 그것을 썰기 시작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나름 교양 있는 레이디처럼 보일 만한 모습이었다.

그리 요리를 썰다 말고 오르밀이 눈을 들었다. 그러곤 짐짓 놀란 체를 한다.

“어머, 왜 안 먹나요?”

메일의 앞에도 요리는 있었다. 오르밀의 앞에 놓인 것과 같은 내용물이었다. 문제는 그걸 먹을 수 있을 만한 식기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메일의 앞에는 오로지 음식이 담긴 접시만 놓여 있었다. 덩그러니.

“특별히 준비한 요리라 맛이 좋을 거예요. 어서 들어요. 아, 설마 남의 눈을 신경 쓰는 건가요? 그러지 말고 그냥 평소 하던 대로 야만인처럼 손으로 집어먹어요.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오르밀은 그같이 말을 던지고선 혼자 신나서 깔깔깔 웃었다. 메일은 그에 호호호 따라 웃으며 챙겨온 바구니에서 깨끗한 천에 싸인 은식기를 꺼냈다. 조명을 받은 포크와 나이프가 반짝거렸다. 오르밀이 웃다 말고 멈칫했다.

“어…….”

“사람은 보통 본인의 습관을 무의식적으로 남에게 투영하곤 하죠. 영애가 평소 혼자 있을 때 그런다고 상대방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해요. 아, 영애에게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 은밀한 취미가 있다는 사실은 어디 가서 이야기하지 않을게요. 걱정 말아요.”

“누, 누가 손으로 음식을…….”

“비밀로 해줄 테니 애써 감추지 않아도 돼요. 그러고 보니 목이 마르네. 여기 냅킨이랑 물 좀 갖다 줄래요?”

메일이 태연한 낯으로 필요한 것을 요청했다. 그때 이를 악문 오르밀이 덥석 제 앞에 있던 잔을 움켜쥐었다. 안에는 물 대신 포도주가 들어 있었다.

“목이 마르면 이거나 마시지그래?”

촤악!

오르밀은 잔 안에 든 내용물을 메일을 향해 힘껏 뿌렸다. 마치 ‘식사 자리에서 상대방에게 맛있는 엿을 먹이는 법! 이렇게만 한다면 당신도 오늘부터 엿장수 : 초급 편’ 이런 데에 실려 있을 것 같은 정석적인 행동이었다.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정석의 힘이구나. 메일은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렸던 드레스 자락을 내렸다.

기가 찬 오르밀이 눈을 부릅떴다.

“무슨…….”

“이런, 드레스가 더러워졌네.”

오르밀이 벌인 짓은 정석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흔한 행위였다. 지금도 어디 아카데미나 사교계에서는 뭇 영애들이 상대방에게 음식을 주면서 일부러 식기를 빼놓고 목이 마르면 이거나 마시라며 와인을 끼얹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흔하다는 것은 동시에 당하는 쪽이 그만큼 대비책을 마련하기 쉽다는 뜻이기도 했다. 남이 겪는 걸 두 눈으로 보고도 똑같은 수법에 당하는 사람은 잘 없으니까.

메일은 애초에 드레스 두 벌을 겹쳐 입고 나왔다. 겉에 입은 것이 끈으로 묶고 푸는 형태라 쉽게 그럴 수 있었다.

그녀는 오르밀이 ‘난 당장 너에게 이 포도주를 뿌려 버릴 테야’ 하는 표정으로 잔을 잡는 순간 바로 겉의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려 머리까지 감쌌다.

겹겹으로 된 천이라 드레스는 제법 훌륭하게 방패의 역할을 했다. 얼굴을 노리고 뿌린 포도주는 메일의 머리카락조차 한 올도 젖게 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버리려던 걸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앞일은 모르는 거라더니.”

메일의 말은 진심이었다. 입고 나가기에는 민망하고 잠옷으로 입기에는 불편해서 왜 이걸 제국까지 가져왔나 후회했던 게 바로 이 옷이었다.

가지고 있어봤자 자리만 차지하니 그냥 버려야겠다, 그리 마음을 먹자마자 오르밀이 이처럼 요긴하게 쓸 기회를 만들어줬다. 사람의 앞날뿐 아니라 옷의 앞날도 참 이렇게 알 수가 없다. 삶이란.

“페튼 영애, 준비한 게 더 있어도 이 이상은 받아주고 싶지 않네요. 내가 대비한 게 여기까지거든요. 패를 다 썼으면 빈손으로 미적거릴 게 아니라 이만 퇴장해야겠죠?”

의자에서 일어난 메일이 더러워진 드레스를 서슴없이 벗기 시작했다. 탈의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민망하다는 게 달리 민망하단 게 아니다. 이 드레스는 벗기가 너무 쉬웠다. 끈만 몇 개 풀어주면 마법처럼 몸에서 탈출했다. 대체 뭘 노리고 만들어진 옷인지.

메일은 드레스를 다 벗자마자 그걸 돌돌 말아 오르밀을 향해 던졌다.

펄럭! 날아가는 도중에 펼쳐진 드레스가 상대의 머리 위로 풀썩 안착했다. 황당해서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오르밀은 미처 그것을 피하지 못했다.

“이건 초대해 준 값이에요. 좀 물들긴 했지만 영애가 물들였으니 예쁘기 입길 바랄게요!”

그럼 난리 치기 전에 도망쳐야지. 메일은 얄밉게 선물(?)을 건네준 뒤 얼른 처소를 벗어났다. 문을 전부 닫기도 전에 내부에서 접시 따위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메일은 귀를 막은 채 종종걸음으로 거리를 벌리면서 생각했다.

저거 전부 황궁 소유의 물건일 텐데 변상 안 해도 되나?

물론 남의 일이었다.

오르밀을 퇴치한 메일은 바로 처소로 돌아가지 않고 식당을 거쳐 정원에 먼저 들렀다. 오르밀은 명목상으로는 메일을 식자 자리에 초대했으나 실제로 그녀에게 밥을 먹을 여유는 주지 않았다. 메일은 나온 김에 어제처럼 정원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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