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려라 메일 (31)화 (31/144)

“엘시한테는 이미 넘치게 신경을 써주는 중이야. 나보단 오히려 남편이 더 극성이긴 하지만. 오라버니도 얼른 나처럼 짝을 만나면 좋을 텐데. ……오라버니, 솔직히 아직까지 누굴 제대로 좋아해 본 적 없지?”

턱을 괸 텔리야가 대뜸 반테르의 지난 연애사에 돌을 던졌다. 반테르는 마시려던 찻잔을 들다 말고 발끈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지금까지 연애를 몇 번이나 했는데.”

“단순히 연애 횟수랑은 다르지.”

“좋아하지도 않는데 사귀었겠어?”

“글쎄, 터놓고 말하면 오라버니는 연애할 때마다 늘 평등주의자처럼 굴었으니까.”

“무슨 말이야? 그게.”

텔리야가 한 손을 뻗어 아까 조각내둔 반쪽 쿠키를 집어 들었다. 그걸 입으로 쏙 털어 넣더니 그새 적당히 따뜻해진 찻물로 입가심을 한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좋아하긴 좋아했겠지. 그런데 오라버니는 연인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폐하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하고, 친구도 좋아하고, 동물도 좋아하고, 빵집에 파는 빵도 좋아하고, 길거리의 잡초도 좋아했잖아.”

“마지막 건 안 좋아했어.”

“아무튼. 내 기억에 오라버니는 사귀는 상대를 특별하게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어. 그래서 그녀들이 못 견디고 죄 떠난 거고.”

오라버니는 진정한 사랑을 몰라. 횟수만 많지 연애 초보야. 텔리야가 진단을 내리듯 그리 못 박았다. 반테르는 숫제 연애 박사처럼 구는 제 여동생을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그럼 제대로 좋아하는 게 뭔데? 사랑 이야기에 나오는 예의 죽고 못 사는 불타는 사랑? 하루라도 못 보면 심장이 타들어가고 그런 거?”

“얼추 비슷하지.”

“텔리야. 진지하게 말하는데, 너 사춘기가 조금 늦게 온 것 같구나.”

무슨 꿈 많은 십 대 소녀처럼 사랑 타령이냐며 반테르가 그녀를 타박했다. 그는 여동생의 주장이 퍽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다. 이야기책에 나올 법한 사랑? 그런 게 진짜 세상에 있을까? 없으니까 이야기책에나 나오는 거다. 이야기는 가짜니까 이야기인 거고.

그럼 여기서 잠깐 반테르의 지난 연애사를 살펴보자.

반테르는 여태 일곱 명의 여자를 만났다. 나이를 생각하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한 숫자였다. 그리고 그는 그 일곱 명 중 누구에게도 절박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의 사고방식은 대략 이렇다. 당장 연인을 못 만난다고 애타고 초조해하는 걸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 못 만나면 내일 상대가 죽기라도 하나? 대륙이라도 망하나? 오늘이 안 되면 내일, 내일이 안 되면 모레, 모레가 안 되면 그다음 날 만나면 되지. 어차피 며칠 못 만난다고 상대가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이런 식이었다.

이별을 겪은 뒤 심하게 괴로워해 본 적도 없다. 연인이 떠나니 조금 착잡하긴 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떠난 연인을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은 당연지사 안 해봤다. 세상의 절반이 여자인데 나 싫다는 상대를 뭐 하러 붙드나. 시간 낭비 아닌가?

반테르는 늘 이런 식으로 사람을 사귀어왔다. 처음 이성에 눈을 뜬 이후로 지금까지 쭉 한결같은 태도였다. 그는 자신이 해온 것이 지극히 평범한 연애라고 믿었다. 그가 진단하기에 스스로가 결혼을 못 하는 이유는 단순히 바빠서였다.

텔리야는 뭐라 반박하거나 대꾸하는 대신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당사자가 자각을 못 하고 있는 이상 백날 말해봐야 이쪽만 입이 아플 일이다.

죽기 전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면 자기가 알아서 깨닫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한 뒤 남은 찻물을 비웠다. 미지근했다.

“하기야 세상에 연애 초보가 어디 오라버니뿐인가. 황제 폐하도 마찬가지이신 것 같고.”

“음? 폐하가 왜? 텐고트 영애랑 벌써 3년째 만나고 계신데.”

텐고트 영애는 이젤린을 가리킨다.

이젤린 텐고트. 자작가는 재산 문제로 몰락했지만 이름은 남아 있어서 그녀는 여전히 텐코트 영애라고 불렸다.

반테르는 황제가 언급된 것이 통 의아하다는 얼굴로 텔리야를 바라보았다. 네가 말하는 사랑, 나는 몰라도 폐하께선 잘하고 계신 것이 아니냐는 의미의 질문에 텔리야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역시 저 인간은 자기 사랑뿐 아니라 남의 사랑에도 둔하군.

“내가 궁금한 건 한 가지야. 폐하, 혹시 그 영애한테 빚지셨어?”

“뭐? 폐하께서 그런 걸 왜 져.”

“최소한 오라버니는 모른다는 거네.”

텔리야는 황당한 심경이 묻어나는 반테르의 대답을 들으며 도로 턱을 괬다. 그녀가 제 오라버니에게 그런 것을 물은 이유는 간단했다.

부채 의식.

오라버니를 따라 우연찮게 몇 번 목격했던 황제와 이젤린 텐고트의 관계에서는 어딘지 이유를 할 수 없는 부채 의식 같은 것이 느껴졌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황제가 대체 그런 몰락 가문의 여식한테 빚을 질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심지어 그 당사자도 모르는 눈치였는데.’

그녀가 보았던 이젤린 텐고트는 단단히 착각에 빠져 있었다. 황제가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 그렇다면 이젤린 또한 황제의 행동이나 표정에서 언뜻언뜻 묻어나는 무언의 부채 의식과 같은 책임감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소리가 된다.

텔리야는 흐음, 비음을 흘렸다. 궁금하긴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것을 감히 황제에게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텔리야, 나니까 받아주는 거지 어디 밖에 나가선 그런 얘기 하지 마라. 폐하의 연인 관계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건…….”

“걱정 마. 나도 이런 자리라서 주절거린 거니까. 내가 얼마나 입을 조심하고 몸을 잘 사리는지 알면서 그래?”

텔리야는 품고 있던 의문을 걷어내듯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래, 생각하고 있어봤자 소용없다. 당장 풀릴 것도 아니고.

더구나 그녀는 그 주제를 누군가와 공유할 수도 없었다. 폐하의 이야기인 것은 둘째 치고, 관계의 이질성을 짚어낸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특이할 정도로 타인의 감정에 예민한 인물이라 가능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남들은 그 이상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아무리 둔하다지만 하루 종일 붙어 지내는 제 친오빠마저 모르는 것을 보면 대충 답이 나온다.

텔리야는 엄밀히 따지면 저와 일말도 상관이 없는 황제에 대한 생각을 저 멀리 무저갱으로 던져 버린 뒤, 곧장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나저나 오라버니, 검집 교환할 때 되지 않았어?”

“검집? 갑자기 웬?”

“곧 생일이잖아. 선물로 주려고 그러지. 안 그래도 최근에 엄청 기발한 착상이 하나 떠올랐는데…….”

몇 주 만에 만난 오누이의 대화는 그 뒤로도 몇 번 이야깃거리를 바꾸어가며 제법 길게 이어졌다.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조금씩 옆으로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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