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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메일 (29)화 (29/144)

“안 먹을 수도 있지.”

“어허, 우리 선배 어린이. 토마토가 얼마나 몸에 좋은 채소인데요? 자고로 편식하지 않고 뭐든 잘 먹어야 쑥쑥 잘 크…… 기엔 이미 너무 크셨군요. 어쨌든 토마토에는 건강을 위한 영양소가 많이 들어 있답니다. 그것도 정~ 말 많이.”

건수를 잡은 메일은 신이 났다. 복수는 달콤한 것이다. 오르밀에게 앙갚음을 하면서 리엘라가 왜 그리도 신나 했던 건지 이제 십분 이해가 되었다. 이 맛은 통쾌한 맛이로구나.

로하이덴의 눈썹이 좀 전보다 더 크게 꿈틀거렸다.

“유치하군.”

“우리 선배 어린이, 편식도 모자라 선배 어린이를 걱정하는 사람한테 그런 나쁜 말이라니요? 때찌 때찌.”

메일은 불과 몇 시간 전 리엘라가 오르밀을 공격하는 것을 보며 어쩜 저렇게 얄미울 수 있을까 감탄했었지만, 사실 그녀의 자질 또한 만만치 않았다.

로하이덴은 물 만난 고기처럼 저를 놀리는 상대의 솜씨에 할 말을 잃었다. 얄밉다. 얄미우면 지는 건데, 그래도 얄밉다.

결국 오기가 솟아난 로하이덴이 불쑥 접시로 손을 뻗었다.

“어?”

말릴 새도 없었다. 그는 접시 위의 요리 중 가장 큰 토마토 조각을 집어 들더니 단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메일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머나.

“됐…….”

입에 넣었다. 삼켰다. 의연하게 ‘됐나?’ 하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로하이덴은 마지막 것은 실패하고 말았다.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킨 토마토의 맛과 향이 뒤늦게 올라와 그의 말문을 막은 것이다. 가면으로 가려진 그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윽.

상대방이 하는 양을 황당하게 쳐다보고 있던 메일이 얼른 컵에 물을 따랐다. 그리고 바짝 다가가 내밀었다.

“이거 마셔요.”

“괜찮…….”

“안 괜찮으니까 얼른.”

메일의 말이 맞다. 말마따나 사실 안 괜찮았다. 한 번은 튕겼지만 두 번 튕기기에는 너무 괴로웠던 로하이덴이 결국 그녀가 내민 물을 받아 마셨다. 그의 낯빛이 멀쩡하게 돌아온 것은 물을 연거푸 세 잔이나 들이켜고 난 후였다.

“…….”

진정을 되찾은 로하이덴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부끄러움이 해일처럼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오기 부리지 말걸. 후회는 원래 아무리 빨라도 항상 늦는 법이다. 체통을 잃은 로하이덴은 그나마 가면이라도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메일이 혀를 찼다.

“그걸 왜 억지로 먹고 그래요?”

타박을 하자 못마땅한 시선이 곧장 날아와 꽂힌다. 항의 섞인 시선에 담긴 의미가 명백해서 메일은 작게 헛기침을 했다. 뭐, 조금 열심히 놀리기는 했지.

“놀린 건 미안해요, 선배님. 편식 운운한 건 장난이었어요. 못 먹는 식재료 한두 개쯤 있으면 뭐 어때요? 뭐든 잘 먹는 것보다 하나쯤은 못 먹는 편이 더 인간미 있고 좋잖아요.”

진심으로 들리도록 어조에도 신경을 써주었으나 이미 늦은 위로였다. 다물어진 선배님의 입은 변화가 없었다. 미동도 않는 상대의 태도에 메일이 입맛을 다셨다. 이럴 줄 알았으면 때찌 때찌는 뺄 걸 그랬나. 저걸 무슨 말로 달래준담. 잠시 생각을 한 그녀가 재차 말을 꺼냈다.

“선배님, 혹시 가지 잘 드세요?”

“…….”

“저는 못 먹어요. 가지 요리만 보면 질색하는 편이에요.”

로하이덴이 반응을 보였다. 먹혔다. 메일이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이야기를 이었다.

“제가 되게 어렸을 땐데요, 우연히 바깥에서 가지를 주워 먹은 적이 있었어요. 아마 동물을 구경하겠다고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나간 숲에서였을 거예요. 그거 아세요? 익히지 않은 생가지에는 독이 있다는 거.”

기억을 더듬어 메일이 조곤조곤 과거사를 꺼내놓았다. 벌써 십 년도 훌쩍 지난 일이었다. 그녀가 아주 조그마했을 때의 이야기니까. 로하이덴은 삐졌던 것도 잊고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독 자체는 미약했어요. 아마 성인이었다면 잠깐 배앓이만 하고 지나갔을 거예요. 하지만 전 그때 한 손으로도 나이를 셀 수 있을 만큼 어린애였고, 뭣 모르고 야생 가지 한 개를 통째로 다 먹었다가 단단히 탈이 나고 말았죠. 지금 생각하면 그걸 왜 먹었나 몰라요. 맛도 없었을 텐데.”

“…….”

“하루 종일 배를 잡고 뒹굴고 다음 날에는 죽만 먹었는데, 그 기억이 어지간히 강렬했나 봐요. 그 뒤로 가지는 입에도 대지 못하게 됐거든요. 딱히 알레르기가 있는 건 아니니까 먹는다고 쓰러지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가지란 걸 아는 상태에서 그게 입에 들어오면 일단 뱉고 싶어져요. 억지로라도 삼키고 나면 꼭 물로 입을 헹구어야만 하고요. 아마 앞으로도 쭉 가지는 피하게 될 것 같아요.”

“…….”

“선배님은 어쩌다 토마토를 싫어하게 되셨어요?”

메일이 물 흐르듯 질문을 던졌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이야기에 집중하는 동안 삐진 것이 풀린 로하이덴이 순순히 대답을 입에 담았다.

“……모르겠군. 아마 나도 어렸을 때의 일이 계기가 된 것 같은데. 일곱 살 때쯤.”

“오, 우리 공통점이 있네요? 선후배 사이라서 통하나?”

메일이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사람은 아무리 작은 것이든 개인사를 공유하고 나면 보통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유대감은 쉽게 친밀감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메일이 웃으면서 덧붙였다. 왠지 우리 조금 친해진 것 같죠? 말만 친한 사이가 아니라. 로하이덴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런 것 같기도 하군.

“저랑 선배님이랑 같이 식사를 하면 굳이 요리를 가리지 않아도 되겠어요. 토마토가 나오면 제가 먹고, 가지가 나오면 선배님이 드시고. 그죠?”

남기는 음식 없이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메일은 여전히 웃는 낯을 유지했다. 어딘지 전염성이 있는 미소였다. 로하이덴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네?”

“이름을 가르쳐 주지.”

그는 자기가 말해놓고 제 발언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방금 내가 뭐라고 지껄인 거지. 이건 예정에 없었는데. 가면으로 가려진 상대의 혼돈을 알지 못하는 메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 오늘따라 선심이 넘치시네요? 질문도 하나는 덤으로 쳐주시고, 다음번엔 이름을 알려 주겠다 예고도 해주시고.”

“……그런 날도 있는 거지.”

“저야 알려주신다면 반갑게 듣겠지만. 아, 혹시 엄청 웃긴 이름이라도 안 비웃을 테니 걱정 마세요. 친해졌으니 저도 그 정도 인정은 보여드려야죠.”

그렇게 말한 메일이 이젠 정말 밥을 먹어야겠다며 아까 내려놓았던 식기를 도로 집어 들었다. 정원에 막 들어설 무렵에는 그리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 떠들고 나니 부쩍 출출해졌다.

냅킨을 풀어 포크와 나이프를 각각 한 손에 든 그녀가 ‘전 이제 식사할 건데 선배님은 뭐 하실 거예요?’ 하고 막 물으려던 참이었다.

바깥에서 소란이 일었다.

“침입자다! 잡아라!”

“응?”

침입자? 메일이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정원 너머 복도에서 무슨 일이 난 모양이었다.

“궁이 소란스럽군.”

“수상한 인물이 발각되었나 본데요? 실력이 좋은가 봐요. 여기까지 들어와 걸린 걸 보면.”

그리 한마디씩 대화를 주고받았을 때였다. 온통 시커먼 것이 저 멀리부터 미친 듯이 달려오다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주춤 멈춰 섰다. 사람이 있을 줄을 몰랐는지 그는 다소 놀란 기색이었다. 그리고 메일은 그보다 더 놀랐다.

‘침입자!’

외치는 소리가 들린 지 몇 초나 되었다고 당사자가 이리로 튀어 들어왔다.

침입자는 정말 침입자스러운 행색을 하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옷을 입고 얼굴에는 마찬가지로 까만 복면을 뒤집어썼다. 저놈이 침입자가 아니라면 이 세상에 침입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 분명하다.

메일은 순간 상황에 맞지 않는 감탄이 나왔다. 저러고 별궁까지 무사히 들어왔단 말이야? 침입자지만 당신의 실력, 인정합니다.

“정원으로 들어갔다!”

“인원을 나눠 움직인다. 너흰 다른 입구를 막아!”

“쳇.”

뜻밖의 만남에 주춤거리던 침입자는 바깥에서 들려온 외침에 곧 결심한 듯 몸을 날렸다. 급한 대로 들어왔으나 입구가 전부 막힌다면 그대로 독안에 든 쥐가 되고 말 상황.

이럴 때는 아무래도 고전적인 타개책이 제일이다. 이름하야 인질극. 그는 고민할 것도 없이 여성인 메일을 표적으로 삼았다.

‘헉! 호신술로는 안 되겠지?’

침입자가 제게 달려든다. 메일은 깜짝 놀란 와중에도 여차하면 휘두를 생각으로 손에 든 식기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때 로하이덴이 몸을 움직였다.

“윽!”

눈 깜짝할 새였다. 메일의 앞을 막하선 로하이덴은 침입자가 휘두른 단검을 몸을 낮춰 피한 뒤 그대로 상대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균형을 잃고 넘어진 침입자가 그 상황에서도 얼른 몸을 굴려 뒤로 멀찍이 간격을 벌린다. 로하이덴이 혀를 찼다. 쯧.

“성가신 놈이 들어왔군.”

“……와, 선배님. 솜씨 좋으시네요.”

메일이 솔직하게 감상을 뱉었다. 그녀는 마디가 도드라질 정도로 식기를 꽉 움켜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선배님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번개 같았다. 그런데다가 깔끔하기까지 했다. 아마 지금 상황이 조금만 더 평화롭고 그녀와 관계가 없었다면 메일은 박수를 쳤을지도 몰랐다.

뒤로 물러난 침입자는 곧장 다시 덤벼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방심했었다지만 너무 쉽게 당했다. 딱히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는 주저하다 결국 품 안에서 단검을 하나 더 꺼냈다.

“부상만 입히고 나란히 인질로 쓰려 했건만…… 어쩔 수 없지.”

단검 두 개를 들더니 갑자기 침입자의 분위기가 변했다. 메일은 상대가 풍기기 시작한 자신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무기가 두 개면 전투력도 두 배가 되나? 그 순간 침입자가 바닥을 박치고 달려들었다.

‘으악!’

구경하던 메일이 비명을 삼켰다. 단검은 아슬아슬하게 로하이덴의 몸을 스쳤다. 다치지는 않았으나 옷이 살짝 갈라졌다.

그리고 그때 메일은 침입자가 보였던 자신감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잘린 섬유가 이상한 색으로 물들며 변질된 것이다. 단검에 독을 발랐거나 마법이 걸려 있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치사하다!”

메일이 외쳤다. 침입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메일은 머리를 굴리며 뭔가 보다 강한 도발의 말을 생각해 내려 애썼다.

상대를 흥분시켜 빈틈이 생기게 하면 선배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텐데. 그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로하이덴이 픽 웃으며 메일을 만류했다.

“그럴 필요 없다. 저런 놈은 독 단검을 들든 국보를 들든 나한테 상대가 안 되니까.”

“그러게요, 정말 필요 없네요.”

알아서 도발 잘하시네. 메일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침입자가 재차 덤벼들었다. 휘두르고, 피하고, 찌르고, 피하고.

생판 남의 일이 아니다 보니-선배님이 쓰러지면 다음은 자기 차례-메일이 한층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선배님, 힘내요! 선배님, 이겨라!

그때 단검을 피하면서 침입자의 몸 쪽으로 깊숙하게 파고든 로하이덴이 그 상태로 상대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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