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려라 메일 (26)화 (26/144)

처소에 도착하자마자 메일은 흐물흐물한 상태로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잠시 동안은 이렇게 앉아서 숨만 쉬어야 기운이 좀 회복될 것 같았다.

리엘라는 허물을 벗듯 외출복을 훌훌 벗어 던지더니 꾸물꾸물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평소보다 덜 잔 상태로 이리저리 걸어 다녔더니 도로 피곤이 몰려온 모양이었다.

이불 바깥으로 얼굴만 쏙 내놓은 리엘라의 꼴을 응시하다 메일이 픽 웃었다. 한번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하니 하는 행동마다 다 그렇게 보였다.

메일은 머리만 뉘이면 잠에 드는 리엘라가 그대로 수마에 빠지기 전에, 문득 떠오른 것을 얼른 입 밖으로 꺼냈다.

“공주님, 물어볼 게 있는데요.”

“응?”

“폐하 말이에요.”

“폐하가 왜?”

“그…… 잘생겼죠?”

아니,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닌데. 질문을 고르다가 그만 엉뚱한 말이 튀어나갔다. 실은 상대가 황제에게 독점욕을 동반한 애정을 품고 있는지 아닌지 알아보려던 거였는데.

메일이 자기가 뱉은 말에 당황하는 사이, 누운 채로 눈을 두어 번 껌벅인 리엘라가 입을 열어 대꾸했다.

“그렇지. 나 아까 깜짝 놀랐잖아.”

“놀라다뇨?”

“폐하가 웃었을 때 말이야. 갑자기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거든. 그런 걸 보고 보통 눈이 부시다고 하지?”

“아하…… 그거요.”

“확실히 폐하는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것 같아. 거기다 황제이기도 하고. 역시 완벽한 내 신랑감이야, 그치?”

칭찬이 술술 나오더니 마지막엔 신랑감 얘기로 끝을 맺는다. 한 손으로 턱을 괸 메일이 으음, 침음을 삼켰다. 결국 간단하게 잘생겨서 좋다는 건가? 사람이 좋다는 건지, 얼굴이 좋다는 건지, 아니면 아직 아무 감정 없지만 조건이 출중하니 앞으로 좋아질 것 같다는 건지.

메일이 무슨 질문으로 그걸 확인해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정자세에서 옆으로 몸을 돌려 누운 리엘라가 말을 이었다.

“근데 조금 이상해.”

“네? 뭐가요?”

“나는 당연히 폐하가 내 운명라고 생각하거든? 그렇잖아, 완벽하니까.”

운명의 상대. 뜻밖의 소녀 감성에 메일이 잠깐 멈칫했다가 호응했다.

“그런데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게 오질 않아.”

“그거요?”

“응. 그거.”

그게 뭔데?

리엘라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러나 메일로서는 그녀가 뭘 말하려는 건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운명의 상대를 운운하더니 거기에 대뜸 ‘그거’라니? 뭔 그거? 메일이 답답해서 대놓고 물어보려던 순간 리엘라가 답을 알려주었다.

“전기.”

“……네?”

“전기가 통하는 느낌 말이야.”

메일은 잠깐 제 귀를 의심했다. 무슨 느낌?

“좀 전에 본궁에서 만났을 때도 계속 기대했었어. 언제쯤 통할까? 이제 슬슬 통할 때 아닌가? 어젯밤엔 거리가 멀어서 그랬다 치더라도 아깐 엄청 가까이 있었잖아. 그럼 당연히 통해야 맞는 건데, 이상하게 아무리 기다려도 전기가 느껴지질 않는 거야.”

“…….”

“말도 안 되잖아.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무조건 전기가 통해야 하는데.”

메일의 사고 회로가 일시적으로 파업을 선언했다. 파업! 파업! 잠시 후 겨우 정신을 차린 메일이 관리에 실패한 표정으로 물었다.

“공주님, 그러니까…… 운명의 상대와 마주치면 전기가 통하는 느낌이 온다고요?”

“그래.”

“어…… 정확히 그게 어떤 느낌인가요? 구체적으로.”

“발끝에서부터 찌릿한 전기가 타고 올라와서 머리로 빠져나가는 느낌이잖아. 몰라?”

리엘라가 그것도 모르냐는 얼굴로 메일을 쳐다보았다. 메일은 혹시나 리엘라가 갑자기 똑똑해져서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만일의 가정을 고이 접어 하늘로 날려 보냈다. 저건 진짜다. 진짜 전기를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공주님을 대하면서 더 놀라게 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졌다고 여겼거늘 오판이었다. 과연 뇌 청순의 위용은 대단하다.

메일은 혼돈 속에서 가출하려 하는 넋을 겨우 붙잡았다. 대체 저런 건 어디에서 배운 걸까? 심지어 남들도 다 아는 당연한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가령 상식처럼.

“공주님.”

“응?”

“그건 어디서 들으신 거예요? 그, 전기 이론이요.”

“책에서.”

“……멋진 책이네요.”

“누구나 다 아는 거잖아? 설마 정말 몰랐어? 이거 상식인데.”

습득 경로야 어떻든 리엘라가 그 전기 이론을 신봉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메일은 리엘라의 상식도 모르냐는 타박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이내 어떤 것을 문득 떠올렸다.

‘잠깐, 이거 잘된 거 아니야?’

깨달음이 내려왔다. 이론의 비상식성에서 오는 충격을 잠시 걷어놓고 냉정하게 판단해 보면, 이건 아주 제대로 된 기회였다.

이것을 이용해서 리엘라가 황후 간택전에서 발을 빼도록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벼락처럼 지각한 사실에 메일이 얼른 말을 바꿨다. 표정도 가다듬었다.

“아차! 깜박했어요, 공주님. 공주님 말이 맞아요.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전기가 통한다는 건 모든 사람이 아는 상식인데 제가 그만 잠깐 잊고 있었네요.”

“그렇지?”

“흐음…… 한데 정말 안타깝네요. 폐하를 만났을 때 전기가 안 통하셨다고 했죠? 그것도 어제 오늘 두 번이나.”

“응.”

“그건 아쉽지만 폐하가 공주님의 운명의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네요. 확실히요.”

사실을 일러주듯 메일이 진중하게 말했다. 연기는 이미 그녀의 전문 분야가 되어 있었다. 리엘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어 미간을 찡그렸다.

“진짜?”

“공주님도 이미 아시잖아요. 운명의 상대라면 무조건 전기가 통해야만 한다는걸.”

“그렇지만…… 폐하보다 완벽한 사람이 있을까? 폐하가 제일 완벽하니까 틀림없이 내 운명의 상대여야 하는데.”

“지금은 안 보여도 어딘가에 더 완벽한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요. 혹은 운명을 짝지어주는 신이 실수를 했든가요. 어쨌든 중요한 건 공주님에게 전기가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아시죠, 공주님? 두 번이나 만났는데도 전기가 안 통했으면 앞으로 백 번을 더 만나더라도 소용이 없다는 거.”

메일의 능청스러운 구라에 리엘라가 흔들리는 기색을 보였다. 좋아, 넘어온다. 메일은 내친김에 의자를 움직여 리엘라와의 간격을 좁혔다. 가까이서 눈을 보고 이야기하면 더 설득력이 있겠지.

“하지만 정말 아까운데……. 아까는 폐하가 너무 잘생겨서 순간 생각을 까먹기까지 했었단 말이야.”

“공주님, 그거 모르세요?”

“뭐?”

“운명의 상대는 하늘에서 신이 정해 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운명의 상대가 아닌 다른 사람과 맺어졌다간 어떻게 되겠어요? 신이 엄청 분노하겠죠. 하늘에서 바로 천벌이 내려올 거예요.”

“천벌? 어떤 벌인데?”

리엘라가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이런 설정은 따로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쪽에서 창조할 수밖에. 메일이 부러 심각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못생겨져요.”

“모, 못생겨져?”

“천벌이 뭐냐면, 바로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답니다. 절대 피할 수 없는 벼락이요. 그 벼락을 맞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머리는 온통 구불구불하게 타버리고 얼굴이며 팔다리며 피부는 온통 새카맣게 변해서 무지무지 못생기게…….”

“시, 싫어! 그거 안 받을래. 천벌 안 받을 거야.”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리엘라가 누운 채로 마구 도리질을 쳤다. 상상만으로도 어지간히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과연 공주님. 죽는다는 말보다 오히려 이게 더 무섭겠지. 천벌의 공포에 떠는 리엘라를 내려다보다 메일이 달래주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세요, 공주님. 운명의 상대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만 하지 않는다면 천벌은 결코 내려오지 않으니까요. 폐하는 포기하실 거죠?”

“……응. 어쩔 수 없지. 내가 못생겨지는 건 국가적 손실이니까.”

리엘라가 웬일로 어려운 단어를 썼다. 메일은 그에 잠깐 놀랐다가 곧 웃음을 참으며 리엘라를 토닥여 주었다. 우리 공주님, 천년만년 평생 예쁘실 거예요. 우쭈쭈.

“그럼 우리 짐 쌀까요?”

“짐? 짐은 왜?”

“왜긴요, 집에 가야죠. 황후가 될 필요가 없으니 굳이 여기에 더 있을 이유도 없잖아요? 짐 챙겨서 고국으로 가요.”

“그래? 알겠…… 아, 맞다!”

“왜 그러세요?”

“있잖아, 만약 오트밀이 황후가 되면 어떡해?”

기습적으로 무시무시한 가정을 들은 메일이 화들짝 놀랐다. 뭐! 오트밀이 황후! 무슨 그런 미친 미래가!

“그럴 리가요.”

“아니야, 혹시 모르잖아.”

리엘라의 표정은 사뭇 어두웠다. 뭘 생각하는지 고운 미간에 잔뜩 주름이 잡힌다. 무언가 괴로운 상황을 그려 보았는지 잔뜩 기분 나쁜 기색으로 리엘라가 입을 열었다.

“오트밀이 황후가 되면 말이야. 날 비웃겠지?”

이 순간 리엘라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재수 없는 오트밀이 만에 하나 황후가 돼서 나를 비웃으면 어쩌지?

물론 오르밀 페튼이 정말 황후가 될 경우 고작 비웃음으로 끝난다면 그게 도리어 다행인 일이겠지만, 단순한 리엘라의 사고는 거기까지는 닿지 않았다.

그저 오트밀이 자길 비웃는 사태가 오면 아주아주 무지하게 약이 오를 거라고 분기탱천하여 생각할 뿐이었다.

메일은 잠자코 오르밀이 제국의 국모가 되는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윽, 5초 만에 현기증이 인다. 아무리 세상사 어찌 될지 모르는 거라지만 역시 그건 좀.

“공주님, 제국에서도 가능하면 정상인을 황후로 들이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페튼 영애, 그러니까 오트밀이 황후가 될 가능성은 아무래도…….”

“아냐, 나 그냥 여기에 계속 있을래.”

“네?”

“누가 황후로 선택되는지 보고 갈 거야.”

리엘라가 선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르밀이 간택전에서 탈락하는 꼴은 확인하고 떠나야겠다는 굳은 의지가 표정에서 묻어났다. 메일은 그에 신음을 삼켰다. 저 타오르는 두 눈을 보아하니 말리기는 이미 그른 것 같았다.

‘아쉽긴 하지만…….’

하는 수 없지. 어차피 리엘라가 황제에게서 관심을 끊게 된 이상 꿈에서 보았던 참극은 이제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애초에 질투를 안 할 테니, 독살도 안 할 거고.

그러니 며칠쯤 더 제국에 머무른다고 크게 위험한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오르밀도 보나마나 광속으로 탈락할 테고. 메일은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주 찜찜하지 않은 건 아니긴 한데, 괜찮겠지.’

“그래요, 공주님. 우리 오트밀이 떨어지는 건 꼭 구경하고 가요.”

“응!”

대답이 씩씩했다. 리엘라는 그리 대답한 뒤 허리까지 흘러내려간 이불을 도로 목 밑으로 끌어올려 덮었다. 그 상태로 이불 안에서 꾸물꾸물 움직여 편하게 자리를 잡고는 곧 눈을 감는다.

피곤한 상태로 떠들었더니 수마가 강하게 밀려든 모양이었다. 리엘라는 금방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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