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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메일 (25)화 (25/144)

“공주님, 사람을 안심시켜 놓고 갑자기 그렇게 뒤통수를 치시면 안 되죠.”

“뭐라고? 작아서 잘 안 들려.”

“드레스에 뭐 묻으셨다고요.”

매무새를 정돈해 주듯 리엘라의 드레스를 툭툭 털어낸 메일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생긋 웃었다.

하마터면 황제의 앞에서 무식 자랑을 시킬 뻔했다. 그건 안 되지. 웃고 있지만 여전히 마음은 조마조마하다. 메일은 가능한 태연한 낯을 가장하며 황제에게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말씀을 나누시는데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괜찮다. 그나저나 본궁에서 헤매던 중이었다고?”

“부끄럽사오나 그렇습니다.”

“가려던 곳이 어딘가?”

“달리 어딜 찾아가려던 것은 아니고…… 마침 이만 별궁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메일의 대답을 들은 황제는 잠시 동안 대꾸가 없었다. 마치 생각에 잠긴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흘러 황제가 도로 입술을 뗐다. 꺼내놓은 말은 의외였다.

“좋다. 짐의 궁에서 길을 잃었으니 짐이 책임을 져야지.”

“예?”

“따라오도록.”

그렇게 말한 황제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책임을 질 테니 따라오라고 한다. 누가 어떻게 보아도 길 안내를 해주겠다는 표현이었다. 메일이 입을 떡 벌렸다. 진짜?

“뭐 해? 메일, 로즈, 따라와.”

상황의 대단함을 모르는 리엘라가 홀로 제일 태연자약했다. 정신을 차린 메일이 얼른 발을 놀려 따라붙었다. 걸으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앞장서 걷는 황제의 뒤통수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어째 현실 같지가 않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람.

‘황제가 몸소 길 안내라니? 왜?’

물론 해주면 좋긴 하다. 싫은 대상한테 굳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없을 테니 이건 황제의 눈에 긍정적으로 들었다고 보아도 좋은 상황이었다. 쌍수를 들고 제자리 회전을 하며 기뻐해야 할 일이다. 문제는 연유를 전혀 모르겠다는 거지만.

‘공주님이 마음에 들었나? 정말? 혹시 취향이 예쁜 길치?’

메일이 그처럼 생각하며 막 고개를 갸웃했을 때였다. 묵묵히 걷던 황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공주, 그대에 대한 이야기는 일전에 기회가 닿아 많이 들었지.”

‘응?’

“듣자 하니 그대가 굉장히 남다른 인물이라던데. 특히 뇌…….”

‘으아악!’

메일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거기 잠깐! 잠시만! 순간 발이 꼬일 뻔할 정도로 놀란 메일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뇌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아름다운 분이시지요.”

필사적인 가로채기였다. 불경을 감수하고 불쑥 끼어든 메일이 겨우겨우 웃는 표정을 유지했다.

이게 뭐지? 어떻게 황제가 저 비밀을 알고 있는 거지? 간신히 발설의 위기를 막은 메일을 내려다보며 황제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호오? 뇌가 착각을 일으켜?”

“예. 너무나 아름다운 나머지 사람이 아닌 요정이나 엘프로 착각될 정도의 미인이시랍니다. 공주님께서는.”

임기응변이 빛을 발했다. 연기력을 십분 발휘하여 메일이 최대한 진심어린 척 어조를 꾸몄다. 이건 황제를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어차피 황제는 이미 알 만큼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의 과제는 따로 있었다.

리엘라에게 들키지 않기.

공주님의 일급비밀(?)을 바깥에서 까발렸다는 사실이 들통나서는 안 된다. 리엘라의 분노는 크게 무섭지 않지만 로즈의 충성심은 대단히 무서웠다. 벽도 부술 수 있을 것 같은 로즈의 무쇠 주먹을 떠올린 메일이 조용히 식은땀을 흘렸다.

메일의 응변을 들은 황제의 낯에 얼핏 장난기가 스쳤다. 아쉽게도 메일은 포착하지 못한 아주 찰나의 낌새였다. 제 턱을 한번 쓰다듬은 황제가 재차 말을 꺼냈다.

“그래. 그러고 보니 공주, 그대가 청순하기로도 이루 말할 수 없다던데. 놀랍게도 뇌…….”

“뇌쇄적이기까지 하시지요!”

생존을 건 임기응변이 시작되었다. 황급히 외친 메일이 경련을 일으키려는 입가를 겨우 달래 미소를 고수했다. 황제의 낯이 언뜻 웃음을 참는 사람처럼 일그러졌다가 빠르게 도로 펴졌다.

“크흠. 뇌쇄적이라?”

“예. 본래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청순함이 극에 이르면 도리어 뇌쇄적인 매력이 발산되기도 하는 법이온데, 저희 공주님께서 바로 그러하십니다.”

설명을 늘어놓는 메일의 얼굴이 구김 없이 밝았다. 막 지어낸 개소리였지만 진지하게 이야기하니 그럴듯했다.

찔리는 기색? 흔들림? 그게 뭐죠, 먹는 건가요? 본래도 뛰어난 편이었던 메일의 연기력에 한층 물이 올랐다. 과연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가진 능력이 한 단계 상승하는 모양이었다.

“후훗.”

정확히 뭐라는진 모르겠지만 제 칭찬을 한다는 건 알아들은 리엘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콧대를 세웠다. 황제는 잠깐 고개를 돌린 채 어깨를 떨었다가 곧 시선을 되돌렸다.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다시 입을 연다.

“그거 참 흥미로운 사실이군. 아, 듣자 하니 순수함과 깨끗함으로도 따라올 자가 없다고 하던데. 무려 뇌…….”

“뇌물이란 단어를 모르실 정도죠!”

“오호?”

급히 단어를 갖다 붙인 메일이 속으로 눈물과 욕을 삼켰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황제만 아니었다면 진작 멱살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속내와는 다르게 밝은 미소를 유지하며 메일이 말을 이었다.

“뇌물 따위의 부정부패는 평생 가까이 해보신 적이 없으셔서……. 그만큼 순수하시다 보니 뇌물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신답니다.”

“응? 아닌데? 나 그거 뭔지 알…….”

“공주님! 어머나, 드레스에 또 뭐가 묻으셨네!”

이 와중에 리엘라는 또 도움 안 되게 솔직했다. 메일이 급히 돌아서서 드레스의 먼지를 털어주는 척 상대의 말을 막았다.

이거 진짜 살 떨려서 살 수가 있나. 이게 무슨 신세야. 문득 본인의 처지가 슬퍼진 메일이 속으로 한탄을 내뱉었을 때였다.

황제가 돌연 웃었다.

선명한 웃음이었다. 눈가는 접히고 가지런한 치아는 고스란히 드러났다. 순간 주변이 환해지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이 일었다. 메일을 포함한 셋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조각 같은 미남자의 웃음은 상상보다 파급력이 컸다. 리엘라는 헤 넋을 놓았고, 로즈는 파괴신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수줍은 소녀처럼 얼굴을 붉혔다.

기본적으로 사람에게는 평가가 박한 메일조차 다른 걸 잊고 순수하게 감탄했을 정도였다. 허어, 이게 바로 대륙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미남의 위력인가.

그러나 메일의 감탄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언뜻 떠올랐기 때문이다.

‘웃어?’

메일은 금방 정색했다. 누군 살겠다고 이 말 저 말 다 동원하며 아등바등하는데 자긴 웃어? 마치 ‘지금까지 뇌를 언급한 것은 전부 너를 놀리기 위한 것이었으며, 덕분에 나는 아주 재미있는 심정이라 이렇게 웃음이 다 나오느니라’ 하고 고백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모양이 아닌가.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확인 사살을 당하니 더 열이 뻗친다. 속에서 열불이 난 메일이 눈썹을 실룩거렸다. 야, 황제면 다냐?

“비제아트 영애.”

물론 다였다. 불쑥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메일이 반사적으로 공손히 대답했다.

“예.”

“혈압 괜찮나?”

“……예?”

메일은 잠깐 제 귀를 의심했다. 황제의 방긋방긋 웃는 얼굴에서 튀어나온 질문은 순간 이게 뭔가 싶었을 정도로 생뚱맞았다. 뭐라? 혈압?

“안 괜찮은가?”

“아, 아뇨. 괜찮습니다. 아주 멀쩡합니다만, 제 혈압.”

재차 내려온 질문에 메일이 당황한 기색도 다 지우지 못하고 급히 대답했다. 감히 황제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하도록 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서도 계급이란 불변의 깡패였다.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흠, 정말인가?”

“물론입니다. 제가 어찌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내가 어쩌다 황제랑 혈압에 대한 이야길 나누게 된 거지. 메일이 혼란스럽게 막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표정에서 웃음을 거두지 않은 황제가 들은 답을 부정했다.

“아닌 것 같은데?”

“예?”

“괜찮다기엔 얼굴이 너무 붉어서 말이야. 금방이라도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것 같다만.”

“…….”

메일은 하마터먼 입을 떡 벌린 멍청한 낯을 할 뻔했다. 저 황제 양반이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잠깐 가출을 감행한 넋을 얼른 찾아온 메일이 표정을 수습한 뒤 응수했다.

“설마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제 얼굴에 붉은 기미가 도는 탓은 순전히 폐하의 용안을 이리 가까이서 뵈는 것이 지나치게 황송하여…….”

“부끄러워서라 이건가?”

“그렇습니다, 폐하.”

“아닌 것 같은데.”

“……맞습니다.”

“영 아닌 듯해.”

“분명 맞습니다.”

“그래? 한데 왜 이리 믿음이 가질 않는가.”

내리깔린 메일의 속눈썹이 순간 파르르 떨렸다. 황제에게서 익숙한 선배님의 깐죽거림이 느껴지는 것은 과연 기분 탓인가. 친구라면 원래 이런 것도 닮는 것일까.

메일은 속으로 ‘참을 인 세 번이면 황족 모독죄 줄처형도 면한다’는 문장을 다섯 번쯤 되뇐 다음 입술을 뗐다.

“좋습니다. 의원에게 진단서를 받아오겠습니다.”

“음?”

“폐하께서 넓은 마음씨로 제 건강을 염려해 주시는 듯하니, 시간이 나는 대로 곧장 의원을 찾아가 혈압이 괜찮은지 진단을 받은 다음 결과를 문서로 첨부하겠습니다. 사용인을 통하여 보낼 테니 받아주시겠습니까?”

“뭐? 하하하.”

메일은 이 순간 황제와 선배님의 공통점을 정리할 수 있었다. 하나, 남의 괴로움을 보며 재미있어 하는 훌륭한 인성을 지녔다. 둘, 병이 의심될 정도로 허파가 많이 안 좋다.

황제와 선배님에 대한 평판이 그렇게 메일의 마음속에서 나란히 사이좋게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 순간 황제가 발을 멈췄다.

“거의 다 왔군.”

본궁은 아까 벗어났고, 어느새 별궁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걸음을 멈춘 황제가 고민하듯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돌려 메일에게 시선을 준다.

“여기서부터라면 헤매지 않고 갈 수 있겠지?”

당연한 질문에 메일이 물론 그러하다고 대답했다.

“그럼 이쯤에서 헤어져야겠군.”

“짧은 시간이나마 영광이었습니다. 몸소 안내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옆구리를 찔린 리엘라가 앵무새처럼 메일의 인사를 따라했다. 마지막으로 씩 웃은 황제가 이내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상대가 완전히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메일은 맥이 탁 풀렸다. 오는 내내 긴장을 했더니만.

힘이 빠져 걸음도 느려진 메일과 달리 리엘라는 팔랑팔랑 나비처럼 가볍게 걸어 별궁 안으로 쪼르르 들어섰다.

메일은 그런 리엘라를 앞지르려다 포기하고 대신 뒤에서 길을 알려주었다. 공주님 왼쪽, 다음은 오른쪽, 그다음은 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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