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려라 메일 (24)화 (24/144)

오르밀은 모르겠지만 메일은 사실 그녀의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로즈가 나서도록 그대로 두었다면 그녀는 지금쯤 고작 실신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부유하고 있었을 테니까.

메일은 지난 결전에 이어 두 번이나 살인 사건을 막아낸 스스로가 퍽 대견스러웠다.

리엘라는 미동도 없이 축 늘어진 오르밀을 신기한 듯 쳐다보더니 말했다.

“죽었어?”

“아뇨, 그럴 리가요. 살았어요.”

“안 움직이는데?”

“기절해서 그래요. 시간이 지나면 깨어날 거예요.”

메일은 그리 대답해 주며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시녀들을 불러 오르밀을 넘겼다. 이곳에서 별궁까진 멀지 않으니 알아서 잘 데려다 주겠지. 그렇게 오르밀을 들려 보낸 메일이 개운하게 손을 탁탁 털었다.

“작은 소란이었네요. 그럼 다시 갈까요?”

“응. 그런데 조금 전엔 어떻게 한 거야?”

“넘어뜨린 거요?”

“맞아, 그거.”

“어릴 때 호신술 같은 걸 조금 배웠었어요. 그중에 방금처럼 달려드는 상대에게 발을 거는 동작이 있었구요. 어려운 건 아닌데 연습을 많이 해야 하긴 해요.”

“왜 배웠는데?”

“그냥……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렇구나.”

변덕이 빠른 리엘라는 금방 그 주제에 흥미를 잃었다. 이러나저러나 어쨌든 오르밀을 퇴치했다는 건 마음에 드는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복도를 걷기 시작한다.

어릴 때부터 유달리 변태에게 자주 시달려 만에 하나를 대비해 호신술을 익혀야 했던, 슬픈 비화의 주인공 메일이 그런 리엘라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생각에 잠겼다.

‘내 악몽은…… 정말 가능성이 있는 꿈일까?’

메일은 새삼 그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리엘라는 마치 어린애 같았다. 단순하고, 무지하며,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어린아이.

타인이 뒷목을 잡고 넘어가게 하는 과감한 언행을 곧잘 남발하긴 하나, 대체로 그것에 악의는 없었다.

전에는 긴가민가했으나 며칠을 곁에 붙어서 지켜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행동에 앞서 생각이라는 과정을 생략할 뿐 천성이 악독하지는 않다.

어린아이는 과연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물론 무지는 가끔 몹시 참혹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메일은 배우지 못한 어린애가 순전히 호기심으로 작은 짐승을 돌로 내려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확인해 보진 못했으나 짐승은 아마 죽었을 것이다. 아이의 호기심은 그렇게 살생을 불러왔다. 순수는 때에 따라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짐승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이 아닌가.

살인과 살생의 깊이는 분명 다를 것이다. 죄의 경중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본능적인 거부감의 문제였다.

네 발로 뛰고 전신에 털이 나 있는 짐승은 똑같이 살아 움직이더라도 저와 다른 무언가로 인식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람은 아니었다. 저처럼 말을 하고, 동일한 외양에, 익숙하게 행동한다. 아무리 배우지 못한 이라도 상대와 제가 같은 테두리에 속한다는 것은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동일한 개체를 죽인다. 그것이 정말 질투만으로 가능할까? 질투에 눈이 멀어 살아 있는 사람을 독살하는 건 과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일까?

혹 어쩌면…….

“메일.”

앞장서 걷던 리엘라가 우뚝 멈췄다. 덩달아 메일의 생각도 함께 끊겼다. 생각에 골몰하느라 내내 바닥만 보며 걸어온 메일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어라, 이거 뭐죠?”

“길을 잘못 든 것 같아.”

리엘라가 말했다. 목적지도 없으면서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한다. 그건 무슨 뜻일까.

바로 더 이상 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이야기다. 메일은 눈앞을 가로막은 굳건한 벽을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이게 웬 막다른 길?

“음…… 공주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본궁 안에 벽이 있네요.”

“그러게. 어쩌지?”

“어쩌긴요,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요.”

“기억이 안 나는데?”

“네?”

“돌아가는 길이 기억이 안 나.”

길치 리엘라가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아, 네. 그러시군요. 침묵한 메일이 이어 로즈를 돌아봤다. 로즈라면 기억하겠지. 한눈을 팔지 않고 우직하게 리엘라를 보필하며 함께 걸어왔을 테니까.

그러나 시선을 받은 로즈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전 심각한 길칩니다.”

“…….”

제 유일한 오점이죠. 로즈가 덧붙였다. 메일은 할 말을 잃었다.

이곳에 공주님과 파괴신과 용사님이 있다. 셋은 힘을 합쳐 본궁이라는 이름의 미로를 무사히 주파해야한다. 셋 중 공주님과 파괴신은 길치다.

여기서 깜짝 문제. 그렇다면 보다 효과적인 진행을 위해 일행의 선두에 서야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정답은 당연히 용사님인 메일이다. 그녀 혼자 길치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리엘라는 정답을 무시하고 당당하게 앞장섰다. 단호한 의지가 엿보이는 표정이라 말릴 수도 없었다. 메일은 대단히 미덥지 못한 선봉을 뒤따르며 질문을 꺼냈다.

“공주님, 왜 굳이 맨 앞에 서신 거예요? 길 모르시잖아요.”

“놀이야.”

“놀이요?”

“길 찾기 놀이.”

대답을 들은 메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러분, 여기 길치가 길 찾기 놀이를 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불가능에 도전해 보겠다는 왕족의 패기가 아닐까요? 다들 박수를.

그리고 메일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왜 여긴 벽밖에 없어?”

메일은 리엘라의 새로운 재능을 발견했다. 그녀는 단순한 길치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뭔가 좀 더 고차원적인 영역에 속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는 곳마다 막다른 벽을 만나는 이 비범한 능력이 설명이 되질 않는다.

일행은 다섯 번째로 조우한 굳건한 벽 앞에서 잠시 작전 회의를 갖기로 했다.

“이거 아까 만난 그 벽 같은데요? 이래선 끝이 없겠어요.”

“여기 이상해.”

“제가 그냥 벽을 전부 부수겠습니다. 맡겨주시죠.”

“정말?”

“공주님, 좋아하지 마세요. 부수긴 뭘 부숴요. 로즈는 그게 가능해도 절대 하지 말아요.”

소득은 없었다.

기실 꼭 도착해야 하는 특정한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길을 조금 헤매며 뱅뱅 돈다고 해서 달리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계속해서 벽을 만나니 좀 성질이 날 뿐이다.

로즈의 주먹에 기대를 걸었던 리엘라가 메일의 만류에 시무룩하게 표정을 바꿨다. 길 찾기 놀이는 이제 싫증이 난 것 같았다.

“놀이 안 해. 다리 아파.”

“그럼 이만 돌아가실 거예요?”

“응. 여기 더 안 있을래.”

리엘라가 귀환을 선언했다. 그에 메일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놀이도 끝났으니 본궁을 탈출하고 싶다면야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이름하야 지나가는 사람 찬스. 길을 모르겠다면 길을 알 만한 사람을 붙잡아 물어보면 그만이다. 메일이 리엘라와 로즈에게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고 막 움직이려던 참이었다.

“거기서 뭘 하는 거지?”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어젯밤에 들어보았던 목소리였다. 메일은 소리가 난 반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화들짝 놀랐다. 놀라면서도 반사적으로 일단 예부터 취한다.

“헬베른의 태양, 존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메일과 로즈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공손하게 상체를 숙였다. 그런 와중에 리엘라만이 저 혼자 멀뚱멀뚱 가만히 서 있었다.

곁눈질로 그것을 살핀 메일이 얼른 공주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인사하세요, 인사!’라고 입 모양으로 전달하자 그제야 리엘라가 엉거주춤 메일의 자세를 따라했다.

고개를 숙인 메일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황제와 이렇게 마주치다니. 무슨 이런 우연이.’

궁 안에서 길을 잃고 막다른 벽 앞에 모여 있다가 황제를 만났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리는 우연이었다. 아니, 어떤 꼴이든 일단 자주 봐야 상대의 눈에 익을 테니 좋아해야 할 일이 맞나. 메일은 우선은 행운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흐음…… 분명 막다른 길일 텐데 인기척이 느껴지기에 와봤더니, 이거 의외의 구성원이 있군.”

“예?”

“아니다. 되었으니 이만 고개를 들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리엘라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보석이 박힌 머리 장식이 반짝거리며 흔들렸다. 그리 고개를 든 리엘라는 황제의 수려한 얼굴에 멀거니 시선을 고정했다. 아무런 행동도 없이 그저 얼굴만 쳐다보는 모습에 메일이 다시 공주의 옆구리를 찔렀다.

‘자. 기. 소. 개.’

뻐끔거리는 메일의 입 모양을 읽은 리엘라가 아, 하는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벨티에 왕국에서 온 공주, 리엘라 드 벨티에라 합니다.”

순수 백지 리엘라라도 자기소개 정도는 할 줄 알았다. 낭랑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메일이 내심 안도했다.

당장 열어볼 수 없는 머릿속이야 어떻던, 겉으로 보이는 리엘라의 자태는 마냥 곱고 예뻤다. 화사한 금발에 금색 눈동자가 반짝거리니 지상에 강림한 천사가 따로 없다. 외모만 놓고 본다면 황제의 옆에 리엘라를 세워놓더라도 아주 썩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괜히 흐뭇한 기분이 든 메일이 시선을 돌렸다. 리엘라에게 성공적으로 인사를 시켰으니 상대의 반응을 좀 살펴볼 요량이었다. 그리고 황제에게로 눈길을 옮긴 메일은 즉시 깜짝 놀랐다.

‘왜 날 봐?’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황제가 눈을 피하지 않았기에 놀란 메일이 먼저 시선을 내리깔았다. 훔쳐볼 생각으로 힐끗 보았다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쳐서 그런지 당황한 심장이 쿵쿵 뛰었다. 메일은 애꿎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연회 홀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땐 황제가 노골적으로 시선을 피했지만 어쨌든 눈이 마주쳤던 건 사실이다. 뭐지? 메일의 심경이 혼란스러워졌다.

‘왜 자꾸 나를……? 헉, 설마 선배님이 황제한테 내 욕이라도 했나?’

메일의 낯 위로 문득 깨달음이 스쳤다. 저와 황제의 연결 고리는 그것뿐이었으니 제법 그럴듯한 가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선배님은 이미 전적-매리골드-도 있지 않나.

싹을 틔운 의심이 뭉게뭉게 구름처럼 증폭될 때였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둔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래, 벨티에의 공주?”

“네.”

“하면 다시 묻지. 이곳에서 뭘 하던 중이었나?”

어딜 봐도 벽뿐인 길을 황제가 흘긋 응시했다. 설마 저걸 뚫고 가려던 건 아니었을 테고.

리엘라를 향해 물었으니 차마 끼어들지 못하게 된 메일이 초조하게 공주를 쳐다보았다. 공주님, 사실 그대로만 대답해 주세요. 멀쩡하게. 예쁘게. 얌전하게.

그런 메일의 바람 속에서 리엘라가 답을 뱉었다.

“길을 잃어 헤매던 중이었습니다.”

휴. 메일이 안심했다. 길을 헤매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자랑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별달리 문제는 없는 대답이었다. 그때 리엘라가 말을 이었다.

“이게 다 어제 연회 홀에서 이상한 애가 우리한테 헤매라의 가호를…….”

“크흠! 큼!”

메일이 급하게 헛기침을 하며 리엘라의 말을 끊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 아니, 이 공주님이 쓸데없이 그런 건 왜 기억하고 있지. 그리고 문제는 틀렸다는 것이다. 그 헤매라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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