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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메일 (20)화 (20/144)

어쨌든 현재 제국 내에서 가장 유명할 것이 틀림없는 이름이 힘찬 목소리를 타고 홀 안으로 울려 퍼졌다.

그러자 여태 굳게 닫혀 있던 크고 화려한 문이 그에 화답하듯 벌컥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만인이 기다리던 주인공이 호위 기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저분이…….”

“헬베른의 황제 폐하.”

혹 신의 사자가 걸어 들어온다면 이런 느낌일까. 몇몇 영애가 체면도 잊고 벌어지는 입을 가렸다. 그중 한둘은 들고 있던 부채를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태양이 아닌 조명 아래에서도 눈이 부신 백금발.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 아래로 반듯한 이마와 환상적인 이목구비가 당연한 듯 타인의 시선을 끌었다.

타고난 체격에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몸은 의복으로 가렸음에도 어딘지 엿보이는 단단함이 있다. 녹아들 듯 깊은 황금색 눈동자는 더 말할 것도 없이 화룡점정이었다.

메일과 가까이에 서 있던 어느 영애가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하아……. 어서 폐하를 닮은 쌍둥이의 엄마가 되고 싶어.”

거리가 가까워 본의 아니게 영애의 혼잣말을 고스란히 들은 메일이 흠칫 놀랐다. 어, 엄청 앞서가는데.

그렇게 홀 안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등장한 황제는 이내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준비된 옥좌에 가 앉았다. 그를 따라 양옆으로 호위 기사가 경건하게 자리를 잡고 선다. 날 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무척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메일은 그것을 보며 문득 얼마 전에 있었던 독대를 떠올렸다.

‘짐을 보았으니 뭔가 느낀 바가 있을 것 아닌가. 이야기해 보도록.’

……그랬었지. 그때는 약간 깬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 역시 황제는 황제구나 하는 감상이 든다. 그저 앉아 있는 것뿐인데 저절로 좌중을 아우르는 위엄이 느껴졌다. 그는 마치 숨을 쉬듯 자연스레 군림하고 있었다. 단지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곁에 서 있는 호위 기사에게서도 은연중에 충성심이 느껴져. 십중팔구 황권이 약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럼 간택전은 역시 황제의 뜻인가?’

그리 생각하다 메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두 번이나 그녀를 괴롭혔던 악몽의 내용이 생각난 탓이다.

꿈속에서 황제는 정인의 죽음에 크게 진노했다. 전쟁에 환장한 살인광으로 보이지도 않는데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라 하나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렸을 정도면 그 분노가 얼마나 컸을지 대략적으로나마 짐작이 간다.

황제는 아마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최소한 반 정도는 미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만큼 그에게 정인이 소중한 존재였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대상을 놔두고 왜 황후 간택전을? 혹시 앞으로 후보 중에 정인이 생기는 건가?’

머리를 굴리다가 메일은 불쑥 깨달았다. 아차. 꿈의 내용이 현실과 닿아 있을 거라는 보장은 아직 없다. 꿈에서처럼 현실의 황제에게도 소중한 정인이 있을 거라고는 함부로 단정할 수 없었다. 없을 수도 있고, 안 생길 수도 있다.

‘앞으로 생길지의 여부는 둘째 치고라도, 이미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알 수 있으면 좋겠는데…… 무슨 방법이…… 아!’

생각에 골몰하던 메일이 손가락을 튕겼다. 선배님!

‘그 자식’에서 ‘선배님’으로 한순간에 호칭이 격상된 그 인물은 어제 정원에서 메일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싹의 모양만 보고서 꽃의 이름을 맞히면 황제에 대해 묻는 것을 알려주겠다는 약속이었다. 그게 무엇이든, 어떤 질문이든지.

그리고 메일은 꽃의 이름을 정확하게 맞혔다. 상대가 보상으로 내걸었던 질문권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남몰래 주먹을 꼭 쥐었다. 아자! 그때는 그런 걸 받아서 어디에 쓰나 했는데 이렇게 요긴하게 쓰게 되는구나. 메일은 속으로 상대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황제를 팔아주셔서 고마워요. 후배가 곤란할 땐 역시 선배님뿐이군요. 그런데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계시나요?’

언뜻 상대의 행방에 생각이 미친 메일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선배로 모시기로 한 이후로는 여태 얼굴을 보지 못했다.

정원에는 두어 번쯤 더 들렀지만 상대가 바빴거나 시간이 엇갈렸던 모양이다. 물론 이제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니 행방이 묘연하다고 궁금해하기에는 민망한 기간이긴 했다.

‘내일 아침쯤에는 만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응?’

생각에 빠져 있느라 내리깔았던 눈을 도로 든 메일이 순간 멈칫했다. 찰나지만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구냐면 황제랑. 이쪽을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착각인가?’

메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제는 지금 완전히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쪽에서 보기에 얼굴이 정면보다는 측면에 가까울 정도로 시선의 방향이 다르다.

그냥 기분 탓이었을까? 사실 눈이 마주쳤든 아니든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착각인들 어떠하고 아닌들 어떠하리.

그때였다.

“다들 모이셨군요. 그럼 제 소개를 먼저 드리겠습니다. 마르힘 볼텐입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귀족 한 명이 앞으로 나와 자기소개를 했다. 아마 후보들이 홀 안에 모이기 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 같았다.

황제 때문에 본의 아니게 잠깐 투명인간이 되고 말았던 그는 한번 모습을 드러내고 나니 의외로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강렬한 존재감의 소유자였다.

콧수염.

그는 우연히 쳐다본 사람이라도 도무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정신 나간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망측해…….”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메일은 조금 동감했다.

마르힘 볼텐이라 이름을 소개한-그러나 왠지 망츠크 코수히엄 같은 이름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귀족은 주위의 술렁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한 손길로 제 콧수염을 매만졌다.

가만 보니 향유까지 발라놓은 것이 딴에는 꽤 아끼고 아껴 기르는 중인 모양이었다. 스스로가 미치는 시각적 공해를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 무시하는 건지, 그는 그저 의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름을 알려드렸으니 직책 또한 말씀드려야겠죠. 저는 폐하께 이번 황후 간택전에 대한 총지휘를 임명받았습니다. 다시 소개드리죠. 간택전의 총책임자 마르힘 볼텐 후작입니다.”

“총책임자?”

“저 콧수…… 저 귀족분이?”

“어머나.”

후작이 던진 말은 좌중에 파문을 일으켰다. 이름은 잊어도 콧수염만큼은 단단히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상대는 놀랍게도 간택전에 한해 대단히 중요한 직책을 차지하고 있었다.

총책임자. 말하는 투를 봐선 일을 나눌 관리자도 따로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메일은 지나가듯 생각했다. 한가한 사람인가 보네.

“그럼 책임자로서 간단하게 몇 가지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간택전은 언제까지 진행된다는 정해진 기간 같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1차, 2차를 거쳐 절반씩 후보의 수를 줄여나갈 것이며, 남은 후보가 다섯 명 이하가 되면 그중에서 최종적으로 황후가 되실 분을 간택할 예정입니다. 선별 과정에서 떨어진 분들은 별도의 절차 없이 바로 귀국길에 올라주시면 됩니다.”

절반씩이라. 메일은 눈대중으로 홀 안에 모인 후보들의 수를 가늠해 보았다. 백은 넘지 않겠지만 거의 그 가까이는 되어 보인다.

그렇다면 다섯 명 이하로 남기까지 필요한 선별 회수는 못해도 네 번에서 다섯 번. 일주일에 한 번씩 후보들을 골라낸다고 해도 한 달은 걸릴 일이었다. 무슨 기준으로 뽑고 떨어뜨릴지는 모르겠지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선별에는 매번 황제가 관여하는 걸까? 어째 저 필요 이상으로 당당한 얼굴을 봐선 아닐 것 같기도 하고…….’

볼텐 후작의 반질반질한 낯을 보며 메일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후작이 화답하듯 그 주제를 입에 담았다.

“참고로 폐하께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선별 과정에는 관여하지 않으실 겁니다. 기본적으로 누구를 남기고 누구를 떨어뜨릴지는 순전히 제 주도하에 결정됩니다. 오해 없으시라고 미리 말씀드립니다.”

술렁.

후작이 뱉은 말은 충분히 거대한 폭탄 발언이었다. 황후를 뽑는 과정인데 황제가 손을 놓고 관망이나 하겠다니. 상식적으로 바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결정이다. 홀 내부가 지금까지 중 가장 크게 동요했다.

메일 또한 의문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정말 저 후작이 모든 권한을 넘겨받았구나. 설사 그렇더라도 최종 선택은 황제가 직접 할 줄 알았는데, 그런 언급까지 없을 줄이야. 그런데 왜?’

메일은 후작이 처음 입을 열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를 유심히 살폈다. 후작은 틀림없이 황제를 어려워하고 있었다. 태연한 척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를 꺼낼 때마다 은근슬쩍 황제의 용태를 살피는 것이, 어떻게 보아도 대상이 신경 쓰여 마음을 졸이는 티가 났다.

메일은 둔한 편이 아니다. 황제가 힘에 밀려 본의와 관계없이 권한을 내어준 것이 아님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럼?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건가? 황후의 자리에 누가 앉든 일말 상관없으니, 간택전 같은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다는 의미라면…….’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아니. 잠깐 납득했던 메일이 다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생각해 보니 더 이해가 안 간다. 그럴 거면 이렇게 번거로운 간택전은 대체 왜 연 거지? 아무나 상관없다면 정말 아무나 앉히면 되는 거 아닌가.

‘가만 보자. 그럼 누가 되든 상관은 없지만 조건은 사전에 정해져 있다는 얘기가 되나? 후작은 말로는 자기가 맘대로 선별할 수 있는 것처럼 굴지만 실상은 규격처럼 미리 정해진 조건에 따라 후보를 가려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거라면…… 음. 이게 나름 그럴듯하네.’

결론을 내린 메일이 내심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제는 황후의 자리에 이 영애가 앉든 저 영애가 앉든 딱히 관심이 없다. 다만 그 영애는 일정 이상의 조건은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판별하는 역할은 콧수염이 인상 깊은 볼텐 후작이 맡았다.

‘대략 이런 상황이라는 거지. 근데 황제가 간택전에 저만큼이나 무심하게 군다는 걸 굳이 지금처럼 알릴 필요가 있나? 마치 황후를 맞이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고, 황후의 자리에 앉는 여자는 누가 됐든 그저 조건에 맞는 상대를 아무나 뽑았을 뿐이라는 걸 미리 광고라도 하는 것 같은…… 으응?’

메일이 미간에 다시 주름을 잡았다. 일시 개운하게 풀렸던 머릿속이 언제 그랬냐는 듯 도로 복잡해졌다.

정말 저런 이유로 구태여 황제의 관망 사실을 예고한 거라면, 이건 아무리 봐도 황제에게 따로 정인이 있다는 쪽으로 해석이 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제는 황후에게 별달리 관심을 안 줄 것이며 황후는 높은 확률로 병풍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후보들에게 이렇게 돌려서 일러줄 이유가 없었다.

사랑은 전혀 없는 이름뿐인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경고. 눈치가 빠른 영애라면 벌써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은 아까 떠올렸던 것으로 되돌아간다. 황제는 정인이 있으면서 왜 그녀를 놔두고 황후를 따로 들이는가? 혹시 정인이 차마 제국의 국모가 될 수 없을 정도로 한미한 신분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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