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 간택전은 그런 상황에서 귀족들이 이루어낸 쾌거였다. 정확히는 한 귀족이 대표 격으로 계속해서 열심히 주장하고 알랑거리고 설득하려 애쓰는 것을 보다 못한 황제가 넘어가준 것이긴 했지만.
어쨌든 열렸다. 개최를 하였으니 누가 됐든 황후는 간택될 것이다. 즉위 이후 십 년간 공석이었던 국모의 자리에 마침내 적자를 앉힐 때가 왔다. 식을 올리게 될 날은 예비 국가 기념일이나 다름없었다.
대륙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젊고 유능한 황제의 국혼. 만인이 제 일처럼 가슴을 졸이는 가운데, 정작 당사자인 로하이덴은 누구보다 태평한 심경으로 접시 위의 고기를 썰고 있었다. 달각달각. 능숙한 솜씨로 먹기 좋게 잘라낸다.
“입에 맞으신가요?”
“음. 좋군.”
정오의 햇살이 후원으로 따사롭게 내려앉았다. 황제는 현재 오찬을 즐기는 중이었다. 맞은편에는 꽃처럼 아름답지는 않으나 대신 풀잎처럼 가냘픈 여인이 앉아 있었다.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여인이 환하게 웃었다. 내리쬔 햇빛이 가지런히 늘어뜨린 은발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졌다.
평생 집 안에서만 갇혀 자란 사람처럼 흰 피부는 차마 빈말로도 혈색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대신 그 덕분에 색이 또렷한 하늘색 눈동자가 한층 선연하고 생기 있게 빛나 보였다.
반달 모양으로 눈을 접어 웃은 여인이 수줍게 입을 가렸다.
“기쁩니다.”
“한데 그대가 먼저 이리 오찬을 청하다니 별일이군.”
“그건…….”
불안해서.
여인은 속내를 삼켰다. 현 황제는 한때 암암리에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문이 돌았을 정도로 즉위 이후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나, 삼 년 전 첫 예외를 만들었다.
갑자기 웬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가문의 영애를 눈에 띄게 비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바로 지금 황제와 마주 앉아 식사를 들고 있는 하늘색 눈동자의 여인이었다.
변방의 작은 자작 가문이었던 여인의 집안은 몇 년 전 몰락했다. 능력은 없으면서 욕심만 거대했던 그녀의 아버지가 연이은 사업 실패로 천문학적인 금액의 빚을 지게 된 것이 그 배경이었다. 돈이란 참 무서운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열여섯에 깨우쳤다.
빚더미에 눌려 풍비박산이 난 가문은 하루아침에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는 여인이 어렸을 때 이미 돌아가셨고 재혼으로 들어앉힌 여자는 자작이 빚을 지던 순간 일찌감치 짐을 싸서 나가버렸다. 집안이 완전히 거덜 난 후에는 설상가상으로 그녀의 부친마저 실종되고 말았다.
그때 여인은 자작이 빚쟁이들을 피해 딸도 버리고 도망간 것이 아니겠냐는 주변의 쑥덕거림 속에서 이렇게 생각했다.
아. 아버지가 나를 팔지 않고 도망가 줘서 다행이다.
어린 계집을 밝히는 늙은 졸부의 몇 번째일지도 모를 후처로 들어가느니 차라리 친척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사는 것이 몇 배는 나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신분패 하나만을 들고 어머니 쪽 친척 가문에 몸을 위탁했다. 여인에게 있어 외숙부가 되는 사람은 다행히 정이 많은 인물이라 별달리 꺼리는 기색 없이 그녀를 받아주었다.
황제를 만나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황제는 처음 여인과 마주치던 순간부터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로라하는 미녀들은 죄 거절해 놓고선 별난 일이었다.
한 번, 두 번. 황제는 고작 세 번째 만남 만에 여인을 별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때부터 여인의 거처는 친척집이 아닌 황궁이 되었다.
그리고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현재.
제국에서는 황후 간택전이 열렸다. 황제의 옆자리에 공식적으로 타인이 앉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굳이 황제가 과거에 했던 선언이 아니어도 몰락 귀족의 신분으로는 감히 황후의 자리를 넘볼 수 없었으니, 여인은 그것에 대해서는 별달리 아쉬워하지 않았다. 기실 그 정도는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다.
다만 불안한 것은 혹시 황제가 마음을 내어줄까 봐.
삼 년을 곁에 저 외에는 아무도 두지 않았던 황제가 혹 간택전으로 모여든 후보 중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될까 봐, 여인은 그것이 두려웠다.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만에 하나라는 가정은 늘 사람의 발목을 잡는다. 누리는 호사와 비호를 잃게 되지는 않을까 내심 초조하고 애가 닳았다. 결국은 이렇게 먼저 만나자는 기별을 넣고 말았을 만큼.
“근래 바쁘셔서 통 용안을 뵙지 못하였으니까요. 그냥, 보고 싶었습니다.”
“흐음. 그랬었나? 앞으로는 자주 시간을 내보도록 하지.”
“아, 아닙니다. 저 때문에 굳이 그러실 필요는.”
“됐다. 짐이 그러고 싶은 것이니.”
로하이덴은 그렇게 말한 뒤 잘게 썬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의례적인 손놀림이었다. 대화가 끊기자 식탁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는 그것을 깨는 대신 생각에 잠겨들었다.
‘며칠쯤 걸리려나.’
그는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다른 게 아니라 메일에 대한 생각이었다. 오늘 그처럼 대단하고 엄청난 것을 보여준 뒤 퇴장했으니 아마 한동안은 상대를 정원에서 마주칠 수 없을 것이다. 황제는 그리 추측했다.
제아무리 신경 줄이 두꺼운 사람이래도 일생을 통틀어 가장 민망했을 장면을 연출해 놓고 금방 그 장소를 다시 찾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건 로하이덴에게 제법 아쉬운 일이었다. 근래 어디에서도 그만큼 그에게 웃음을 준 상대가 없었다.
반테르는 황제가 광대를 보고 온 것처럼 웃는다고 생각했었지만, 사실 황제는 광대보다 메일이 더 웃겼다. 체면도 잊고 뒤로 넘어갈 만큼 폭소해 본 것이 대체 얼마만인지.
‘나흘에서…… 길면 일주일 정도일까.’
그만한 기예(?)를 선보였으면 보통은 평생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겠다는 결심이 설 법도 했지만, 상대는 결코 보통이 아니었다.
정원을 향한 남다른 사랑으로 짐작하건대 못해도 저 정도 시간이라면 회복하지 않을까. 그럼 그때부터는 다시 능청스레 상대를 정원에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기다려지는군.’
로하이덴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하게 즐거움이 묻어나는 미소였다, 그 미소에 여인이 움직임을 멈추고 표정을 굳혔다.
‘웃으셨다.’
식사 도중 갑자기. 대화도 끊긴 상태에서. 여인은 멍청하거나 둔하지 않았다. 황제가 저와의 자리가 흡족하여 저리 웃은 것이 아님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황제의 주의는 현재 이곳에 없다.
‘아직 간택전은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텐데…….’
굳은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인 여인이 살그머니 입술을 깨물었다. 기분이 초조해진다. 대체 황제는 지금 무엇에 신경을 쏟고 있는가. 심지어 맞은편에 저를 놔두고.
“……폐하.”
“음?”
“조만간 외출을 하고 싶습니다.”
“외출? 궁 바깥으로 말인가?”
“네.”
“그래, 궁에서만 지내려니 답답할 수도 있겠지. 그대의 뜻대로 하라. 다만 짐이 붙여주는 호위는 반드시 대동해야만 한다.”
당부하는 목소리에서 걱정이 느껴졌다. 여인은 그에 일말 안도했다. 황제는 삼 년 전부터 여태 변함없이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고, 살피고, 보호해 주려 들고 있었다.
일부는 유별난 과보호라며 혀를 찼으나 여인은 그것이 마냥 기뻤다. 금방이라도 깨질 유리처럼 싸고도는 것은 다 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만큼 귀애하니까 그러시는 것이 아니겠나.
여인은 이 보호가 애정의 증거라고 믿었다. 비록 단 한 번도 그녀를 연인처럼 품에 안아준 적은 없어도.
‘괜찮아. 앞으로도 지금 같을 거야. 쭉 그래왔던 것처럼.’
그러나 한번 제 귓가에 존재를 속삭이기 시작한 불안감은 옅어질 줄을 모른다.
여인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외출을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