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내가 못생겨? 너 어디 아파? 아, 설마 장님?”
“개성 없는 금발에…… 흥, 우리나라에 오면 길거리에 널렸을 얼굴이네.”
“뭐가 어째? 야! 넌 천하잖아!”
“뭐, 뭐라고?”
“너 이 중에서 제일 천해! 신분도 구려! 백작가? 솔직히 그 신분으로 황후가 되겠다니, 너 양심이 뭔지 모르지?”
양심. 그건 공주님도 모르시잖아요. 메일은 자동으로 떠오른 말을 도로 삼켰다. 이런 데서 팀 킬을 할 수는 없지.
그 순간 자기는 외모로 공격해 놓고 신분으로 반격당한 것에 분노한 오르밀이 더 심한 모욕을 입 밖으로 꺼냈다.
“하! 고작 보잘것없는 약소국인 주제에, 알량한 공주 지위를 가지고 어디서……!”
‘으악!’
그리고 그에 식겁한 건 그때까지 조용히 서 있던 메일이었다. 이건 크다. 심각한 게 나왔다. 나라 욕이라니! 부모 형제 욕 다음으로 사람의 이성을 건드린다는 나라 욕!
“오르밀 페튼 영애!”
탕.
메일은 일부러 화려하게 끼어들었다. 앞으로 나서며 구태여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킨 뒤 동작의 마무리를 선보이듯 탁자 중앙을 내려쳤다.
부끄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덕분에 확실히 주의를 이쪽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나라 욕에 눈이 뒤집혀 로즈를 출동시키려던 리엘라도 하려던 것을 잊고 깜짝 놀라 메일을 바라보았을 정도였다.
황당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는 오르밀과 눈을 맞추며 메일이 입을 열었다.
“인사가 늦었군요. 벨티에 왕국에 적을 두고 있는 비제아트 공작가의 장녀 메일 폰 비제아트라고 합니다. 한데 영애, 영애가 바라는 게 국가 간 분쟁인 줄은 몰랐네요.”
뜬금없는 회전에 탁자까지 친 사람 답지 않게 메일의 태도는 진지했다. 표정은 심각하며 목소리도 한껏 내리깔았다. 그에 오르밀이 휙 눈썹을 추어올렸다.
“무슨 말이죠?”
“간단한 얘기예요. 영애가 방금 저속한 표현을 사용하여 본국을 모욕한 것에 대해, 이쪽에선 얼마든지 영애의 왕국에 책임을 물을 의향이 있다는 이야기죠. 어려울 것도 없답니다. 당장 서신을 작성해 공주님의 직인을 찍어 보내기만 하면 되니까.”
건조하게 또박또박 이야기하니 말에 설득력이 담겼다. 오르밀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응수하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 나왔다.
“……고작 그런 걸로 무슨.”
“고작이라니? 영애가 깎아내린 건 개인이 아니라 국가인데 말이에요. 역사 속 전쟁들이 얼마나 사소한 계기로 발발해 왔는지 알면 굉장히 놀라겠군요. 덧붙여 사안의 경중을 판단하는 건 영애가 아니라 우립니다. 우린 충분히 영애의 발언을 사유로 바인샤에 전쟁을 선포할 수 있어요.”
전쟁. 메일이 부러 자극적인 단어를 고르긴 했으나 기실 아예 없는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작은 씨앗도 그럴 의사만 있다면 얼마든지 전쟁의 구실로 삼을 수 있었다. 더구나 전쟁을 결정하는 윗사람은 대체로 실질로 죽을 위험은 없는 사람들이다.
당장 내 목이 날아가지 않는 일에 도장을 찍는 것은 쉬웠다. 벨티에의 왕이 멍청이에 다혈질이었다면 진짜로 군대를 소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르밀이 대꾸 없이 입을 다물었다. 질린 안색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것이 누가 보아도 당황한 낌새가 역력했다. 메일은 이쯤에서 쐐기를 박기로 했다.
“영애가 바란 것이 벨티에와 바인샤의 불화라면 성공이 눈앞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한데 한 가지 궁금한 게, 바인샤 왕국이 지금 병력을 외부로 돌릴 수 있는 상황이던가요? 이쪽이 알기로 바인샤는 현재 내전으로 한창 정신이 없을 텐데.”
맞다. 사실 오르밀의 조국인 바인샤 왕국은 얼마 전부터 나라 안에서 박 터지는 싸움이 진행 중이었다.
사고로 왕이 덜컥 서거했는데 책봉해 둔 왕세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이좋게 동일한 계승 서열을 나눠가진 왕족들은 그 즉시 세력을 구축하여 옥좌에 앉기 위한 전쟁에 뛰어들었다. 어지간해선 끝나지 않을 지독한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 형국에 영애가 대담하게 타국을 도발했다는 기별이라니! 참 희소식이겠어요. 그렇지 않나요?”
“…….”
“경고는 한 번뿐입니다. 오늘 영애가 뱉은 발언을 없었던 일로 치부해 주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단지 유예기간을 두겠다는 거죠. 태어나 자란 조국으로부터 버림받는 비참한 일을 겪고 싶지 않다면 그 가벼운 입을 더 이상 놀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페튼 영애.”
말을 마친 메일이 휙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앉아 있는 리엘라에게 이야기했다.
“가시죠, 공주님.”
조금 전부터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던 리엘라가 그에 깡총 의자에서 일어났다. 표정은 그새 햇살처럼 밝아져 있었다. 그리 환해진 얼굴로 한껏 웃으면서 오르밀을 향해 한마디를 던진다.
“야, 그렇대! 오래 살고 싶으면 입 열지 마, 그냥!”
어조가 경쾌했다. 상대방이 한 마디도 못 하고 바들거리고만 있는 꼴이 퍽 통쾌하여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인사 대신 속 시원히 비아냥을 던져 준 리엘라가 올 때처럼 로즈와 메일을 대동하고 방을 나섰다. 문턱을 넘는 그녀의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탁!
닫힌 문을 노려보며 오르밀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후 날카로운 고성과 함께 거처의 세간이 박살 나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복도로 나온 메일은 그 생각부터 했다. 협박이 먹혀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전쟁을 운운하며 상대를 몰아세우면서도 한편으론 내내 걱정이 들었다.
오르밀이 진짜 맛이 가서 전쟁이고 뭐고 모르겠다는 식으로 나오면 어쩌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싶지만 정말 그 정도로 정신이 상해 있는 상태면 어떡하지?
뿐만 아니라 우려는 또 있었다. 내가 나서는 걸로 리엘라가 화를 안 풀면 어쩌지? 기어이 로즈를 출동시켜 상대에게 영면을 선사해 주면 어쩌지? 살인 사건의 목격자로 제국 재판부에 불려가게 되면 그땐 뭐라고 증언해야 하나?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다. 사태는 평화롭게 일단락되었다. 메일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있잖아. 걔네 나라 꼴이 그 모양인 건 어떻게 알았어?”
돌아가는 길에 리엘라가 질문을 던졌다. 메일이 간략하게 대답했다.
“얼마 전에 그 왕국에 대해 좀 알아볼 일이 있었거든요. 그때 어쩌다보니.”
주변국의 정세를 공부하는 건 자수와 뜨개질에만 관심이 있을 거라고 여겨지는 귀족 영애들도 대다수는 하는 일이었지만, 바인샤는 위치상으로 그 주변국에 포함되지 않았다.
사실 메일이 자국과는 교류도 없는 먼 나라의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꽃 재배 때문이었다.
우연히 관심을 가지게 된 어떤 꽃이 이곳에선 배양이 힘들지만 바인샤 왕국에서는 씨만 뿌리면 쑥쑥 자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체 무슨 조건이 그런 극명한 차이를 만들어내나 싶어 바인샤의 토양이나 기후에 대해 샅샅이 조사했었는데, 그러다 본의 아니게 왕국의 정치 사정까지 덤으로 파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정원 덕후로서의 열정이 용사님의 활약에 도움을 준 셈이다.
리엘라는 딱히 더 궁금하진 않았던지 그것까지는 묻지 않았다. 그렇게 도로 입을 다물고 부지런히 걷는데, 열린 창문으로 문득 바람이 불어왔다.
마침 창가 쪽에 가까이 서 있었던 메일의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나부꼈다. 풀린 실타래처럼 허공을 수놓는 갈색 머리카락을 보며 리엘라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메일, 네 머리색 말이야.”
“네?”
“지금 보니까 색깔이 꼭…….”
리엘라가 그리 운을 떼자 메일이 눈에 보이게 흠칫했다. 리엘라는 비하에 관해서는 일시적으로 언어의 연금술사가 되는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까 누가 보아도 예쁜 파란색 머리카락을 썩은 곰팡이라고 표현하거나, 만인이 감탄하는 초록색 머리채를 말라비틀어진 시금치에 빗댄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그 능력으로 흑갈색 머리카락을 평가한다면 대체 어떤 참사가 벌어지게 될 것인가.
메일은 괴롭지만 얼추 상상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응으로 시작하는 두 글자라던가, 또는 이음동의어로 비읍이 들어가는 한 글자, 쌍디귿이 들어가는 한 글자 같은 그런 듣기만 해도 냄새나는…….
“나무 같아.”
“……네?”
“나무껍질이랑 색깔이 똑같네? 네 머리색.”
나무?
그 어떤 충격적인 비유를 들어도 동요하지 않도록 마음의 각오를 다지고 있던 메일이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그에 리엘라가 왜 갑자기 걷다 마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 뒤 이어서 말을 꺼냈다.
“서서 뭐 해? 그러고 보니 너 눈 색도 초록색이네. 그냥 네가 전체적으로 나무를 닮았다.”
“제가…….”
생각지도 못 했던 비유에 메일은 말문이 막혔다. 녹색 눈 중앙 검은 동공이 얌전히 있지 못하고 세차게 흔들렸다. 내가, 내가 나무를 닮았다고? 내가 나무를?!
“……공주님.”
“그만 서 있고 빨리 와.”
“저 열심히 할게요.”
“응?”
“정말 열심히 할게요.”
나라가 불타지 않도록. 그리고 꿈속에서처럼 공주님의 목이 분노의 칼질로 뎅강 떨어지지 않도록.
물심양면으로 노력하겠습니다. 메일은 그 어느 때보다 굳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