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왜 따라가는데요?”
“내 시비잖아. 날 보필해야지.”
머리 위에 진주 장식을 올리며 리엘라가 태연하게 답했다. 그에 메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젯밤엔 막 버리고 가더니? 그땐 방이나 지키라고 했으면서?
정작 이쪽에서 필요할 땐 내팽개치고 원하지 않을 땐 챙기는 리엘라의 청개구리 같은 작태에 메일은 입맛이 썼다. 그리고 밥 먹을 때 보필할 게 뭐가 있다고.
“음…… 공주님, 훌륭한 시비는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는 그런 시비가 아닐까요? 제 생각에 지금은 빠질 때인 것 같아요. 식사하시는 곳에 저를 데려가 봤자 딱히 도움은 안 될 거거든요. 전 소화의 요정 같은 게 아니라서 곁에 서 있는다고 공주님의 소화가 촉진되지도 않을 거고…….”
“밥 먹으러 가는 거 아니야.”
“식사 초대라면서요?”
“싸우러 가는 거야.”
“아하, 싸우러…… 네?!”
메일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용사로서의 본능이 그녀의 지친 몸을 저절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메일이 들은 것을 확인하듯 입에 올렸다.
“싸우러 가신다고요?”
“응.”
“왜요? 누구랑? 어디서? 아니, 어제 제국에 도착해 놓고 오늘 싸움을?”
혼돈과 의문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메일은 불친절하게 대답하는 능력이 거의 장인의 경지에 오른 리엘라 대신, 보다 오목조목 상세히 작금의 사태를 설명해 줄 만한 사람을 찾아 눈을 돌렸다. 물론 달리 여러 선택지가 있는 건 아니었다.
“……로즈. 혹시 아는 것이 있으면 나한테도 좀 말해줄래요?”
그렇게 해서 듣게 된 전말은 다음과 같았다.
오르밀 페튼이라는 영애가 있다. 벨티에와는 교류한 적이 없는 동쪽 끝 바인샤 왕국 출신이며, 이쪽보다 하루 일찍 제국에 도착해 간택전의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백작가의 둘째 영애라는 비교적 한미한 신분이나 미모는 경쟁자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뛸 만큼 빼어났다-물론 리엘라는 인정하지 않았다. 눈 색과 머리색은 각각 하늘색과 짙은 파란색.
그리고 어제 연회 홀에서 리엘라에게 시비를 걸었다.
“헐.”
기가 찬 메일이 한 글자로 심경을 표현했다.
리엘라는 객관적으로-세간의 평가를 기준으로-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거기에 타고난 혈통은 왕족이다. 미모에 신분이 더해졌으니 제법 위협적인 경쟁자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실상으로 성립하려면 황후의 자질에서 ‘지성’을 완전히 제하는 평가단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지만, 그런 것까지 생판 초면인 남들이 알 수는 없었으니 일단 겉으로는 나름 막강한 후보처럼 보였다.
오르밀 또한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그녀가 리엘라를 라이벌로 생각하고 연회 홀에서 선전포고 같은 말을 던진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경쟁자들끼리 처음 만나는 자리. 그곳에서 터진 가벼운, 눈싸움이나 몇 마디 말다툼 정도의 시비.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오르밀 페튼이 오늘 식사 초대를 빙자한 결투장만 보내지 않았어도 말이다.
‘이건…… 이 기운은……!’
무뇌의 기운!
메일은 직감했다. 심상치 않다. 리엘라를 상대하느라 본의 아니게 발달된 그녀의 뇌청순 감지 센서가 이건 보통이 아니라고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황후 간택전은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다. 참가를 신청한 후보들은 미처 다 도착하지 못했고 황제 또한 여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 혼자 개별 행동을 해서 분란을 일으키는 건 일반적으로 멍청이도 하지 않을 짓이다.
그리고 짚고 넘어가자면 멍청이라도 뇌는 있었다.
오르밀 페튼이 정말 싸우자는 의미로 리엘라에게 초대장을 보낸 거라면, 십중팔구 그녀에겐 뇌가 없을 공산이 컸다. 놀라운 일이었다. 사람이 뇌도 없이 돌아다닌다니.
“공주님, 정정할게요. 식사가 아니라 싸우러 가시는 데 제가 빠질 수야 있나요. 바로 출발하실 거죠?”
언제 드러누워 쉴 준비를 했었냐는 듯 메일이 스프링처럼 침대에서 튀어나와 외투를 챙겨 입었다. 지금 메일의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은 한 가지였다.
‘위험해.’
리엘라를 혼자 보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물론 아예 혼자는 아니고 로즈가 함께하겠지만 그녀는 동행인이라기보단 숫제 병기에 가깝다고 보는 편이 나았다.
여차할 때 리엘라를 말리기는커녕 주인의 명령에 따라 상대편을 진짜 불귀의 객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인간 병기. 함께 있으면 위험도는 오히려 증가한다. 절대 메일이 빠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요, 공주님.”
용사에게 퀘스트가 내려왔다. 뇌청순과 무뇌가 격돌하는 곳에 가서 세계 멸망을 막으시오.
메일은 비장한 표정으로 리엘라의 우측 뒤에 가서 섰다. 좌측은 로즈가 맡았다.
“흥, 곰팡이처럼 생긴 오트밀 주제에 어디서.”
싸우러가면서도 치장은 빼먹지 않은 리엘라가 반짝반짝한 상태로 처소를 나섰다. 목소리에 못마땅함이 잔뜩 서린 것을 보아 상대가 제게 싸움을 건 것이 퍽 기분 나쁜 모양이었다.
메일은 시녀의 안내를 받아 오르밀 페튼의 거처-그녀는 그리로 리엘라를 불렀다-로 향하며 마음속으로 그래도 한 자락 희망을 품었다.
‘혹시 이쪽이 오해한 건 아닐까? 전달이 잘못되었을 뿐, 실은 정말로 식사만 하자는 의도로 초대한 게 아닐까?’
아니다.
장소에 도착한 순간 메일은 누군가가 귓가에 ‘응, 아니야. 희망 없어. 포기해’ 하고 속삭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왔으면 앉아요.”
오르밀은 리엘라 일행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저렇게 말했다. 인사도 달리 없었다. 마치 상급자가 하급자를 대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메일은 그에 잠깐 현기증이 일 뻔했다.
‘없어!’
뇌는 없다. 확실했다. 메일이 지금껏 겪고 들은 그 어떤 미친 사람도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 앞에서 저런 식으로 굴지는 않았다.
국법에 따라 심하면 극형까지 처벌이 가능한데 당연한 일이었다. 머리가 아픈 사람도 자기 목 소중한 건 알게 마련이다. 그런데 쟤는.
“앉으라니까? 따라온 시녀들은 좀, 구석으로 꺼지고. 낄 곳 안 낄 곳 구분을 못하네.”
‘아플 머리도 없나 봐!’
공작 영애의 신분으로 졸지에 낄 곳 안 낄 곳 구분 못하는 시녀 취급을 받았지만 메일은 화가 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화를 낼 정신머리가 없었다. 뇌 없는 신인류의 등장에 그저 놀라워하기에도 벅차다. 대신 쌍심지를 켠 것은 리엘라였다.
“네가 뭔데 꺼지라 마라야? 여기에 너보다 못한 애 아무도 없거든?”
“지금 뭐라고…….”
“의자나 더 가져와. 모자라니까.”
시녀가 공손히 빼놓은 의자에 일단 앉기는 앉은 리엘라가 눈을 홉뜬 채 그렇게 말했다. 무뇌의 존재에서 오는 충격과 놀라움의 폭풍에 빠져 있던 메일이 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공주님! 머리채를 잡지 않고 우선 말로 하시는군요!’
그 와중에 대견한 일이었다.
리엘라의 말마따나 거처엔 마련된 의자가 모자랐다. 동그란 탁자를 가운데 두고 고작 이쪽과 저쪽 한 개씩밖에 놓여 있지 않았다. 본래는 몇 개쯤 더 있었을 텐데 오르밀이 치우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오르밀 페튼은 손님 측에서 마땅히 앉을 자리를 요구하는 것에 코웃음을 쳤다.
“내 방에선 천한 시녀는 앉을 수 없어요.”
메일은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칠 뻔했다. 대단한 개소리였다. 왕족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시비 중엔 귀족 출신도 적지 않다. 그건 설사 시녀 복장을 하고 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귀족이 천하다면 오르밀 본인도 천한 것이다.
리엘라가 의외로 그 부분을 날카롭게 공격했다.
“얘 공작 영앤데? 안 천한데? 아, 서열을 따져서 가장 천한 사람 순으로 서 있는 거였어? 그럼 오트밀 네가 일어서면 되겠다. 의자는 얘한테 주고.”
그럼 되겠네! 경쾌한 해결책을 제시한 리엘라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상대의 말을 받아치면서 공격을 두 번이나 했다.
너 이름 오르밀 아니고 오트밀. 그리고 너 네가 무시하는 시녀보다 더 천해.
의도하고 계산해서 한 말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역공에 성공했다. 모욕을 당한 오르밀의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 눈가가 파들 떨린다.
“감히…….”
“감히 뭐? 얼른 의자나 내놔. 천한 애는 못 앉는데 너는 왜 앉아?”
“감히 그딴 식으로 입을 놀리다니. 장차 황후가 될 내 앞에서 그리 굴었다가 어떤 화를 입게 될 줄 알고!”
오르밀이 사납게 말을 뱉었다. 아무리 나라가 다르다지만 고작 백작가를 뒤에 업고 일국의 공주에게 무슨 배짱으로 저렇게 구나했더니,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신분을 믿고 저러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이내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그때 가서 내 발아래 납작 엎드려도 늦었으니, 살고 싶다면 지금 어떻게든 용서를 비는 것이 좋을 거예요. 아직은 무례를 용서해 줄 수도 있으니까.”
메일은 이 와중에 오르밀의 담력이 참 굉장하단 생각을 했다. 미래의 황후고 뭐고를 떠나 지금 당장 눈앞의 로즈가 무섭지도 않을까? 이 순간에도 팔의 근육이 마구 꿈틀거리는데?
자칫 얼굴이라도 한 대 맞았다간 간택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죽고 말 텐데? 영혼결혼식으로 황후가 되어봤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텐데 말이다.
‘엄청난 배짱이야. 뇌를 바치고 그걸 대신 얻었나 보다.’
참 손해 보는 장사를 했다. 메일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리엘라가 언성을 높였다.
“너나 엎드려! 그리고 누가 너한테 황후 시켜준대? 폐하가 너를 거들떠나 볼 것 같아?”
“그건 그쪽 얘기겠죠! 내가 황후가 되는 건 이미 정해진 미래거든요?”
“내 미래야!”
“내 미래예요!”
‘제국의 미래는?’
구경꾼 메일은 왠지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어느 쪽이 황후가 되던 제국은 그날로 부흥은 포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안 망하면 다행 아닐까?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메일은 리엘라에게 내심 황후 자질 점수를 조금 더 주었다. 아무리 청순한 뇌라도 아무렴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지.
그때 무뇌 쪽이 인신공격을 펼쳤다.
“얼굴도 못생긴 게!”
가리킨 대상은 당연히 리엘라였다. 물론 리엘라는 못생기지 않았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고 대충 손으로 윤곽만 더듬어도 미인임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니 저만큼 허무맹랑한 주장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면 오르밀이 그런 리엘라보다 근소하지만 더 예쁘다는 정도일까. 리엘라가 오는 길에 곰팡이라며 폄하했던 짙은 파란색 머리카락은 실은 바다를 옮겨놓은 비단처럼 색이 아름다웠다.
하늘색 눈동자야 말할 것도 없고, 별달리 꾸미지 않아도 지닌 얼굴의 선 하나하나가 유려하다. 아마 미모 하나로 고국에선 제법 떵떵거리며 지냈을 것이다.
참고로 외모 비하는 공격을 하는 화자가 예쁘면 예쁠수록 괜히 더 열 받게 마련이다. 리엘라가 기가 차고 코가 막히고 빡쳐서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