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의 하루에도 여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숙였던 몸을 다시 폈을 때는 이미 상대가 한참 멀어진 뒤였다. 메일은 점점 작아지는 황제의 등을 말없이 응시하다가,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크게 숨을 뱉어냈다. 후아!
“심장 터질 뻔했네.”
메일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황제를 대면했다. 심지어 독대였다. 제국에 온 지 고작 하룻밤 만에 일어난 일이다. 우연히 알게 된 정원에서 황제를 만나 단둘이 대화를 나누다니?
호사가에게 말한대도 믿어주지 않을 만한 이야기였다. 사실 메일 본인부터도 아직 크게 현실감이 없었다.
“꿈은 아니겠지? 음, 벨벳나무에서 향기가 나는 걸 보니 아니군.”
코를 킁킁거린 메일이 그렇게 확언했다. 꿈속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전에는 간혹 꿈에 정원이 나올 때마다 그것이 아쉬웠는데, 요새는 그만큼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기만 해도 괴로운 악몽에 생생한 피비린내까지 났다면 그녀는 진작 정신병을 하나 얻었을지도 모른다.
“후, 아무튼 이렇게 된 이상 용사 생활은 한동안 지속이겠고…….”
빠른 귀국의 꿈은 애석하게도 무산되었다. 메일은 현실적인 문제로 아파오기 시작하는 머리를 꾹꾹 지압하며 정원을 빠져나왔다.
시간을 내어 더 구경할까 싶었지만 당장은 심경이 복잡해 식물 친구들의 아름다운 자태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우선 점심 식사도 해야 하고.
‘그나저나 구라쟁이가 아니었잖아?’
복도를 걸으며 메일이 가면 쓴 남자를 떠올렸다. 래쉬 매리골드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저를 놀림받게 한 것은 괘씸하지만, 어쨌든 선언한 것은 그대로 실현시켰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황제를 만나게 해주었으니 뱉은 말을 지킨 셈이다. 이젠 자신이 상대를 뻥쟁이로 치부했던 것을 철회하고 사과해야 할 차례였다.
‘폐하께서 정원을 자주 찾으신다는 이야기도 사실인 것 같고.’
경황이 없어서 그걸 직접 물어 확인하지는 못 했다. 그러나 메일은 황제가 가장 처음 입에 담았던 말을 기억했다.
‘기르느라 고생 좀 했지.’
벨벳나무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들은 목소리였다. 주어와 목적어가 뭉텅이로 빠진 문장이었지만 상황에 맞추어 빈 부분을 유추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높은 확률로 주어는 ‘내가(짐이)’ 더 높은 확률로 목적어는 ‘네가 쳐다보고 있는 벨벳나무를’ 이어서 서술어 ‘기르느라 고생 좀 했지’.
메일은 새삼 생각했다. 대단히 훌륭한 군주로다!
‘세상에는 정말 그런 꿈의 통치자도 있구나.’
놀림을 당했던 것은 벌써 잊었다. 메일은 제국 부흥의 원동력은 사실 정원을 사랑하는 황제의 신성한 마음씨가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추측을 하며 처소의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침대에 누워 있는 리엘라였다.
리엘라는 그냥 누워 있지 않았다. 조막만 한 얼굴에 뭘 다닥다닥 붙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보이는 게 맞다면 저거 저민 오이 아닌가?
“……공주님? 얼굴에 그거 뭐예요?”
“오이.”
“잘못 본 건 아니네요. 오이를 왜 얼굴에 붙이고 계세요?”
“안 해봤어? 이렇게 하면 피부가 예뻐져.”
입가에도 오이를 붙이고 있는 주제에 리엘라는 입을 오물오물 움직여 잘도 말했다. 의외로 안 떨어지고 잘 붙어 있네. 메일은 손으로 건드려 보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상대의 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런 거 안 해도 예쁘시잖아요.”
“알아! 사실 난 이런 걸 하든 안 하든 엄청 예쁘지. 그냥 심심해서 하는 거야.”
세상물정도 모르고 현실도 모르는 공주님이 유일하게 아는 것이 있다면 바로 본인이 예쁘다는 사실일 것이다.
메일은 리엘라의 뻔뻔한 대답에 전혀 놀라지 않는 스스로가 놀라웠다. 이렇게 익숙해져 가는 걸까? 역시 사람이란 적응의 동물이었다.
“공주님.”
“왜?”
“음…… 아는 나무 이름 세 개만 말해보실래요?”
메일의 질문은 뜬금없었으나 아주 이유가 없지는 않았다. 메일은 만에 하나 황제와 리엘라를 이어주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해야 할지도 모르는 미래를 상상했다.
불과 조금 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나라 황제는 은혜롭게도 무려 정원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식물에 박학하다면 긍정적인 눈도장을 찍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리엘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나무에도 이름이 있어?”
“…….”
“굉장하네.”
퍽 신기하다는 듯 묻는 목소리가 나름 진지했다. 메일은 그런 것을 물어본 스스로가 멍청이였다고 생각하며 말을 돌렸다.
“오이 모자라면 말씀하세요. 더 붙여드릴게요.”
가능한 더욱 예뻐지는 것만이 방법이었다. 메일은 험난할 것이 뻔한 앞날을 되도록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않으려 애썼다. 안 그러면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