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한편으론 그럴 만한 외모였으니 어느 정도 참작이 되기는 했다. 그녀는 현실의 폭격으로 절망하기 전 느꼈던 감탄을 떠올리며 답을 뱉었다.
“눈이 부십니다.”
“흐음.”
“신의 강림이라는 소문이 과장되었다 여겼는데, 실제로 뵈니 오히려 부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름답다는 뜻인가?”
자, 자기 입으로.
메일은 당황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리엘라로 다진 내공이 이럴 땐 도움이 되었다.
“그렇습니다.”
“얼마나?”
“예?”
“세상에서 제일?”
“……그, 네, 물론입니다.”
“래쉬 매리골드보다 더?”
“……네?”
메일은 멍하니 반문했다. 이번에야말로 자기가 잘못 들은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환청이거나. 그렇지 않고서야 저기서 갑자기 매리골드가 튀어나올 까닭이 없었다.
“매리골드보다는 별로인가?”
“……!”
그때 황제가 친절히 확인 사살을 했다. 환청도 아니고 잘못 들은 것도 아니었다. 메일의 풀색 눈동자가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지진 난 탁자 위의 구슬처럼 흔들렸다.
아니, 왜? 왜 하필 매리골드? 성별을 떠나 미인이 꽃에 빗대어지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으니 질문 자체는 백번 양보해 멀쩡한 것이라 쳐도, 그 많고 많은 것 중에 왜 구태여 매리골드를 콕 집어서?
메일이 당황해서 표정 관리도 잊고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혼란스러운 심경이 그녀의 얼굴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순간 황제의 입매가 허물어졌다.
웃었다.
황제가 그 휘황한 얼굴로 입가를 무너뜨리며 웃었다. 그에 메일은 깨달았다.
‘날 놀린 거구나!’
황제는 일부러 말을 골라 그녀를 놀려먹었다. 아무리 둔감한 사람이라도 지금 그의 표정을 본다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황제는 마치 장난에 성공한 개구쟁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가 차 말을 잇지 못하는 메일의 머릿속으로 한 사람이 떠올랐다. 가면을 쓴 남자. 적발, 적안의 정체 모를 그 수상한 놈.
래쉬 매리골드에게 말을 건 것 하나로 일 년치는 그녀를 놀려먹을 것처럼 굴었던 상대를 떠올리자 메일의 주먹이 저절로 야무지게 말렸다.
‘말했네, 말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을 전달했을 만한 매개라곤 그 자식뿐이다. 범인을 확정한 메일이 이를 갈았다. 무슨 사이인진 모르겠지만 황제에게 그런 것까지 나불나불 전하다니, 신분은 높아도 성격은 퍽 유치한 것 같았다. 이러다 아주 대대손손 놀려먹으려 들겠네.
‘파티에서 짝사랑하는 여자한테 멋진 척 윙크를 날리자마자 단추에 머리카락이나 껴라!’
가면을 쓴 남자와 황제가 동일 인물일 거라고는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 메일이 용감무쌍하게 상대를 저주했다. 심지어 꽤나 구체적이었다.
메일이 그의 불행을 빌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제는 마냥 속 편하게 웃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답을 못 들은 것 같은데.”
“……매리골드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감히 비교의 대상으로 거론되었다는 것이 그저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따름입니다.”
“비교 자체가 안 된다?”
“예.”
“짐이 못하다는 뜻인가?”
“그, 그럴 리가요!”
어떻게 알았지!
정곡을 찔린 메일이 깜짝 놀라 빠르게 부정했다. 찔렸지만 찔린 티를 내선 안 된다.
정원 덕후에게 정원 안의 식물보다 아름다운 존재란 세상 만물을 다 뒤져도 없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렇다고 황제의 앞에서 ‘응. 너보다 매리골드가 백만 배쯤 예뻐’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가 목 위만 자유를 찾아 공중 부양을 하게 되면 어쩐단 말인가. 권력 앞에 작아지는 메일이 고개까지 붕붕 흔들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같은 공간. 그렇게 메일이 본심을 내리누르며 위태위태한 구라쟁이의 길을 걷는 동안, 그 원흉을 제공한 황제 로하이덴은…….
‘이거 재밌는데.’
즐기고 있었다.
그는 완벽이라는 단어가 몸에 맞춘 옷처럼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다방면에서 남들보다 잘났다는 소리다.
황제는 다섯 살에 검을 잡고 열 살 때 그것을 깨우쳤는데, 몇 년 전 야만족을 토벌하던 당시 무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정도로 이루어낸 성취가 깊었다. 무릇 뛰어난 검사란 실력에 비례해 동체 시력 또한 그만큼 특출하게 마련이다. 황제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미세하지만 실룩거리는 입가, 흔들리는 동공, 파래졌다 재빨리 돌아오는 안색.
심경에 따른 메일의 표정 변화를 로하이덴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어디가 진심이고 어디가 뻥인지 훤히 보였다. 메일 혼자 안 들켰다 믿고 있을 뿐이었다.
‘황제를 만나는 것보다 새싹에 물 주는 일이 더 소중하다던 말도 사실이겠군.’
황제를 찬양하라 명하면 눈치를 보며 그럴 듯한 말을 지어내겠지만, 정원을 칭찬하라 시키면 눈물을 흘리며 진심 어린 일장 연설을 토해낼 것이다. 로하이덴은 제법 메일을 사실에 가깝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신기했다.
‘풀 한 포기보다 못한 황제라.’
이미 꽃 한 송이-매리골드-와도 겨루어 밀렸다. 다른 것과 견주어도 딱히 다르지 않을 것이다. 로하이덴은 철이 든 뒤 처음으로 겪는 열외가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는 식물에게 밀리는 것이 신선한 기분이었다.
“폐하, 어찌 한낱 꽃이 폐하의 존안에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가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황제가 이미 속속들이 꿰어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메일이 딴에는 진실 되어 보일 거라 생각하는 연기를 펼쳤다.
물론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껌벅 속을 만큼 그럴 듯한 가장이긴 했다. 연기력이 좋은 편이란 자기 평가도 허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로하이덴이 다 알면서 짐짓 속는 척을 했다.
“짐이 훨씬 빼어나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하긴, 만개한 꽃밭 한가운데에 서 있어도 짐의 얼굴이 더 튀긴 하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오, 방금 눈가가 씰룩였어. 속눈썹도 조금 떨렸는데?
메일의 반응을 관찰하며 로하이덴이 웃음을 참았다. 사람의 표정을 구경하는 일이 이렇게 재미있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만약 메일이 알았다면 순간 상대가 황제라는 것도 잊고 주먹을 들었을 일이었다. 남은 필사적인데 넌 재밌냐? 하고.
분명 같은 시간을 공유 중이거늘 한 명은 목숨을 사수하는 중이고 한 명은 재미나게 노는 중이다. 그리 저 혼자 즐겁게 시간을 보내던 황제가 문득 깨달았다.
‘시간이 충분히 지났군.’
로하이덴은 애초에 오찬을 약간만 미룰 것을 약조하고 나왔다. 보름 전부터 조르고 졸라 약속을 잡은 소조바 후작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쓸모가 많은 인물이었다. 굳이 애를 태워 원망을 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황제가 작별을 준비했다.
“부족하지만 대화는 이쯤 나눠야겠군.”
“아, 이만 가십니까?”
“선약이 있어서.”
그는 그렇게 말하며 상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마주침을 허락한 녹색 눈동자가 언뜻 그릇에 담긴 물처럼 투명했다.
자고로 눈이 깨끗한 사람치고 헛된 욕심을 부리는 이가 없는 법이다. 황제는 문득 아까워졌다.
만약 이 여인이 간택전에 참가한 후보였다면.
아까움은 의문을 낳았다. 그는 시간을 조금만 더 쓰기로 결정하고 입을 열었다.
“오기 전에 시간이 있어 잠깐 알아보았는데.”
“……?”
“후보 명단에 이름이 없더군. 황후를 목적으로 한 것도 아니면서 이곳까지 온 연유를 물어도 되겠나?”
그가 말한 이곳은 제국이다. 왕국에서 제국은 먼 거리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 나들이를 가는 기분으로 가볍게 여정에 오를 만한 길이는 못 되었다. 더구나 연고도 없을 타지인데.
질문을 들은 메일은 약간 당황했다.
‘별걸 다 묻네.’
황제가 그런 걸 궁금해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타인에게 관심이 많은 성격인 것 같았다. 메일은 짧은 시간 머리를 굴려 답을 골라냈다.
“공주님을 곁에서 보필하기 위해서입니다, 폐하.”
정확히는 공주를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나라를 패망의 길로 끌고 들어가지 못하게. 물론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으니 그녀는 또 입에 침을 발랐다.
“공주?”
“예. 아무래도 낯선 타국에서 머무르셔야 하는 일이다 보니, 공주님께서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제가 꼭 필요하다고 하시어.”
함께 자란 적은 없지만 마차에서 같이 보낸 열 며칠이 마치 십몇 년 같았으니 그걸로 퉁 치기로 한다. 메일은 제법 뻔뻔하게 표정 관리를 해냈다.
“자국의 공주와 사이가 좋은가 보군.”
“공주님께서 워낙에 좋은 분이시라…….”
이때 대답을 뱉는 메일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리엘라가 황제에게 관심을 끄긴 이미 글렀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든 부딪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면 미리 조금이라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낫나? 칭찬을 몇 마디 해줄까? 나중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없는 뻥은 곤란할 테지만 적당히 현실과 닿아 있는 거라면.
그래. 따지고 보면 기회인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마음을 굳힌 메일이 입을 열었다.
“자랑은 아니오나, 저희 공주님께선 이 대륙 누구보다…….”
칭찬은 역시 거짓보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는 편이 좋다. 그녀는 말에 진심을 담기로 했다.
“깨끗하시고.”
뇌가.
“청순하시며.”
뇌가.
“순백으로 빛나는 분이십니다.”
뇌가.
“그 누구보다 맑으신 분이라 자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뇌가.
“이러니 제가 어찌 곁에서 보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말을 마친 메일이 생긋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정원에 맹세코 틀린 말 하나 없다. 단어를 하나 생략했을 뿐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만을 고한 메일의 미소가 앞의 그 어느 때보다 순수하게 빛났다. 사실은 가까이에 진실은 저 너머에.
“흐음…… 그래, 모시는 이와 사이가 돈독하단 건 좋은 일이지.”
시력은 남달라도 독심술은 구사하지 못하는 로하이덴이 그렇게 속아 넘어갔다. 사실 속았다고 표현하기엔 애매한 노릇이긴 했다.
그는 말을 듣기 전이든 지금이든 공주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 다만 속으로 ‘공주가 아무리 저렇게 칭찬을 들어도 매리골드와 붙으면 참패하겠지’ 하고 잠깐 생각했을 뿐이다.
“그럼 이만 가보아야겠군. 원한다면 영애는 남아서 정원을 더 둘러보아도 좋네.”
“황송합니다.”
“영애에게 헤메라(Hemera)의 축복이 함께하길.”
헤메라는 낮의 여신을 지칭한다. 한낮에 헤어지는 상대에게 건네기 나쁘지 않은 작별 인사였다. 메일이 상체를 숙이며 인사에 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