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를 으쓱하거나 손가락을 흔든다. 메일은 비언어적 표현까지 마음껏 사용하며 상대의 말이 구라였음을 기정사실화했다.
졸지에 일말의 여지없이 뻥쟁이로 낙인찍히게 된 남자가 기가 찬 듯 입을 벌렸다. 허,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진짜로 황제가 이곳을 자주 방문한다면 어쩔 거지?”
“어쩌긴요? 그냥 그런 거지.”
“그럼 실컷 거짓말쟁이로 취급당한 난?”
“정신적 피해 보상을 신청하겠다는 거예요? 좋아요. 만약 폐하께서 여길 자주 찾으신단 말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사죄의 뜻으로 앞구르기를 세 번하고 제자리에서 열 바퀴 돈 다음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오로지 진실만을 말씀하신다는 진실의 신을 뵙습니다!’ 하고 크게 삼창할게요. 원하신다면 외칠 때 양손을 하늘로 들어드릴 수도 있어요.”
“…….”
“모자라요?”
“……아니.”
가면으로 가려지지 않아 유일하게 드러난 남자의 입매가 실룩거렸다. 누가 보아도 웃음을 참는 모양새였다. 말을 꺼낸 메일은 오히려 태연했다.
“그렇게…… 크흠, 파격적인 사죄 방법은 처음 듣는군.”
“어차피 실제로 할 일도 없을 텐데요, 뭘.”
“그리 쉽게 장담해도 되나?”
“왜요? 참고로 폐하께서 직접 ‘그렇다. 짐이 이곳을 자주 찾느니라’ 하고 인정하시는 것 외엔 증명으로 치지 않을 테니까 알아두세요.”
메일은 그렇게 못 박은 뒤 새침하게 시선을 돌렸다. 오래 대화를 나눈 건 아니지만, 몇 마디를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이쪽을 쫓아낼 의지가 없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놀릴 의향은 있을지 몰라도 어제와 같은 배척이나 비난, 의심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하루 만에 바뀐 태도는 의아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메일로서는 기꺼운 변화이긴 했다.
그녀는 용감무쌍하게 무려 이쪽에서 먼저 단절을 선언했다.
“저 바쁜 사람이거든요? 이제부터 알찬 구경에 집중해야 하니, 서로 방해 없는 각자의 시간을 갖도록 하죠.”
“더는 말 걸지 말고 사라지라는 건가?”
“확인 사살은 않겠어요.”
“매정하군.”
“고작 두 번 만난 사이에 헤어진 전 애인처럼 달라붙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요? 바라신다면 새벽 두 시에 편지를 보내드릴 수도 있어요. ‘자니?’ 이렇게.”
메일은 어제보다 훨씬 편하게 말을 지껄였다. 딱히 저자세로 보이도록 어조에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다.
어느 정도는 건방지게 굴어도 상대가 언짢아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어쩌면 반말을 해도 한두 번 정도는 봐줄지도 모른다.
예상대로 남자는 기분 나빠 하거나 어투를 책잡는 대신 소리 내 웃었다.
“그건 그렇지. 초면이나 다름없는 사이에 그리 집착한다면 참 괴로울 거야. 그래도 영애는 나한테 너무 관심이 없는 거 아닌가? 이렇게 안중에도 없는 취급을 받긴 처음인데.”
영애. 메일은 호칭에 집중했다. 역시 이쪽을 귀족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을 저리 팍팍 놓고 있다는 소리였다. 얼마나 한가락 하는 신분이기에? 메일은 상대에게 다른 관심은 없지만 그것 하나는 약간 궁금하다고 생각했다.
“제가 원래 사람한테는 좀 무정해서요. 제 사랑과 관심을 원한다면 다음 생엔 식물로 태어나시면 되겠습니다.”
“식물이라. 그럼 그땐 먼저 다가와 살갑게 말도 걸어주고 하는 건가? 조금 전에 래쉬 매리골드한테 했던 것처럼?”
“……네, 뭐.”
평정을 가장한 메일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크윽, 아무리 매리골드가 반가웠어도 말은 걸지 말걸. 이제 한동안 자기 직전마다 이불 차게 생겼다. 그것도 아주 뻥뻥.
“뭐, 좋아. 그럼 다음 생을 기약해야겠군. 사람인 나는 이만 물러가줄 테니 매리골드와 보다 많은 이야길 나누도록 해.”
“…….”
“그러고 보니 식물도 노래를 들을 줄 안다던데. 매리골드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것도 좋지 않겠나?”
“…….”
“매리골드도 참 기뻐할 거야.”
“빨리 꺼지, 아니, 가주시지 않겠어요? 어서 매리골드와 단둘이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합주도 하고 춤도 추고 싶어서요.”
무시로 일관하려던 메일이 결국 눈썹을 실룩거리며 대꾸했다. 남자가 어깨를 떨며 웃는다.
‘솔직히 한 대 치고 싶지만 그건 안 봐줄 것 같으니 참는다.’
메일이 내면에서 솟구치는 폭력 욕구에 괴로워하는 사이, 저 혼자 실컷 웃은 남자가 이내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이젠 정말로 사라져 줄 모양인지 그는 선 자리에서 뒤로 물러나 메일과 간격을 넓혔다. 메일이 슬쩍 기대했다. 얼른 꺼져라.
“아, 그리고.”
“…….”
“정오에 다시 이곳으로 오도록. 내가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일 테니.”
무슨 수로?
그 순간 그런 메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남자가 말을 덧붙였다. 경쾌한 목소리였다.
“황제를 만나게 해주지.”